130년간 인류 무게 단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 ‘르 그랑 K (국제킬로그램원리)’와 그 혁명의 양대주역인 ‘키블저 (좌)’과 실리콘 공(우)’ [위키피디아, 사진 제공·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사진 제공 · 독일연방물리기술원(PTB)]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식이 끝나고 닷새 뒤 베르사유궁에서 어쩌면 인류역사에서 훨씬 의미심장한 결정이 내려졌다.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질량(kg), 전류(A), 온도(K), 물질량(mol)에 해당하는 4개 단위가 새롭게 정의됐다. 그 핵심은 질량단위인 킬로그램(kg)을 플랑크상수(h)라는 절대적 물리량에 기초해 재정의한 것이다.
1889년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제1차 CGPM에서 그 정의가 도입된 이래 130년 만의 변화다. 이로 인해 시간(s), 길이(m), 광도(cd)를 포함한 7개 기본단위가 모두 절대적 물리수치로 규정돼 지구뿐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됐다. 인류가 사용하는 7개 기본단위가 모두 절대반지로 바뀌게 됐다고 표현할 수 있다.
7개 반지 가운데 마지막까지 골치를 썩인 게 바로 질량단위인 kg이다. 사실 kg은 길이단위인 미터(m)와 함께 CGPM이 채택한 가장 오래된 국제단위였다. 제1차 CGPM에선 무게와 길이의 표준으로 각각 국제킬로그램원기와 국제미터원기를 나란히 채택했다.
마지막 절대반지, kg
국제단위계(SI)의 7개 기본단위가 절대적 물리량에 기초해 재정의 됐음을 알리는 포스터(오른쪽). 이를 공식 채택한 제26차 국제도량형 총회(CGPM) 현장. [사진 제공 · 독일연방물리기술원(PTB)]
그래서 지구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기다란 금속막대를 국제미터원기(일명 ‘메트르 드 아쉬브’)로 삼고, 1㎥에 해당하는 물의 질량을 토대로 제작된 금속원기둥을 국제킬로그램원기(일명 ‘르 그랑 K’)로 삼았다. 파리에 있는 국제도량형국 지하에 보관된 이 국제원기의 길이와 무게가 전 세계 m와 kg의 기준이 됐다.
이들 국제원기가 프랑스에 있는 이유는 1789년 프랑스혁명을 전후해 프랑스가 전 세계 공통으로 쓰일 보편적 도량형 도입을 선도해왔기 때문이다. 로버트 P 크리스의 ‘측정의 역사’에 따르면 국제원기는 프랑스가 국가도량형의 통일을 위해 1799년 100% 백금으로 제작한 키다리와 뚱뚱이로 이뤄진 한 쌍의 ‘에탈롱’(원기를 뜻하는 프랑스어)을 원형으로 삼아 만든 것이었다.
처음엔 질량과 길이 딱 2개였던 단위는 1946년 시간단위로 초(s)와 전류단위로 암페어(A)가 더해져 4개로 늘었다. 1948년엔 광도단위인 칸델라(cd), 1954년엔 열역학적 온도단위인 켈빈(K), 1971년 양자역학 차원의 물질량인 몰(mol)이 더해져 국제단위계(SI)를 구성하는 7개 기본단위가 확정됐다. SI는 이 7개의 기본단위와 이로부터 파생된 뉴턴(N), 헤르츠(Hz), 줄(J), 와트(W) 같은 22개의 유도단위로 구성된다.
사실 근대 이전의 측량단위는 인간의 발 길이나 팔 길이 등 인간적 잣대에 맞춰 만들어졌다. 18세기 프랑스 과학자들은 이런 인간 중심의 자의적 기준을 자연 표준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모든 시대를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라는 모토가 이를 대변한다.
그 결과 7개 기본단위에 대한 정의는 직관적·구체적 기준에서 보편적·추상적 기준으로 바뀌어간다. 이는 길이단위 m에서 시작됐다. 1960년 m는 파장이 가장 안정된 크립톤 원자의 등황색선 스펙트럼이 가진 진공 중 파장의 1,650,763.73배로 재정의됐고, 1983년 ‘빛이 299,792,458분의 1초 동안 진공 상태에서 날아간 거리’로 재규정됐다. 이에 따라 ‘메트르 드 아쉬브’는 국제도량형국의 유물이 됐다. 초(s)는 세슘 133원자의 초미세 준위를 기준으로, 온도는 물의 삼중점(고체·액체·기체가 공존하는 온도)의 273.16분의 1로 규정됐다.
하지만 오직 kg만큼은 ‘르 그랑 K’라는 인공물에 의거해야 했다. 그동안 CGPM 회원국(현재 160개국)은 양팔저울 형태의 질량비교기를 통해 이 원기와 똑같은 무게의 사본을 만들어 각각 국가원기로 삼았다. 회원국들은 이를 기준으로 자국 산업체에 정확한 kg 기준을 제시해줬다. 비회원국의 경우엔 회원국 원기의 무게에 자신들 국가의 질량눈금을 맞춰서라도 이를 준수해야 했다.
키블저울과 실리콘 공
1899~1960년 ‘길이’의 권좌를 지켰던 ‘메트르 드 아쉬브’(국제미터원기). 뒤틀림 현상 방지를 위해 양 끝을 독특한 X자 형태로 마감했다. [위키피디아 커먼스]
1034분의 1이라는 수치는 인간의 십진법 단위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작다. 일상생활에선 아무 의미 없는 숫자란 소리다. 하지만 소립자 세계인 양자역학에선 매우 중요하다.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양의 에너지 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kg을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우주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수치화했다는 뜻이 된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키블저울’이란 특수저울을 이용하면 된다. 1975년 브라이언 키블(1938~2016) 영국 국립표준연구소 박사가 제안한 원리를 적용해 만든 저울이다. 그 원리는 기계적 일률과 전기적 일률이 서로 같고, 전기적 일률은 플랑크상수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먼저 양팔저울 한쪽에 국제킬로그램원기를, 다른 쪽에는 전자기력을 발생시키는 코일을 설치한다. 코일에 전류를 흘려보내 생성된 전자기력이 바닥 방향으로 작용하도록 유도하면 저울이 점차 올라와 어느 순간 균형을 이룬다. 저울이 완전히 평형을 이뤘을 때 코일에 흐른 전자기력의 세기는 플랑크상수를 매개로 수치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 수치만 안다면 우주 어디에서나 kg 단위는 동일해진다.
아보가드로상수(NA)라는 또 다른 물리상수에 기초한 방법도 있다. 이탈리아 물리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1776~1856)가 발견한 법칙에서 도출된이 상수는 어떤 물질 1몰(mol)에 포함된 원자 개수를 말한다. 과거 정의에 따르면 1몰(이란 원자량이 12인 탄소의 동위원소 12g에 들어가 있는 탄소의 원자 개수로 규정되는데 대략 6.022×1023이다. 플랑크상수와 정반대로 어마어마하게 큰 수다. 따라서 고도로 정밀하게 측정하지 않으면 역시 무의미해진다.
독일 연방물리기술원(PTB)은 1960년대부터 반도체 소재로 쓰이는 규소(실리콘) 가운데 원자량 28인 동위원소가 농축된 정밀한 공을 만드는 일에 도전해왔다. 국제킬로그램원기 무게와 일치할 만큼 고정밀의 실리콘 공을 만들어 그 안의 규소 원자 숫자를 아보가드로상수로 표현하게 되면 역시 우주 보편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키블저울로 도출돼 플랑크상수로 표현한 1kg과 실리콘 공을 통해 도출돼 아보가드로상수로 표현한 1kg의 오차가 CGPM이 용인한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 데 있었다. CGPM 자문기구인 ‘질량 및 관련량 자문위원회(CCM)’는 새로운 kg이 표준이 되기 위해선 2개의 독립된 실측 결과의 불확도(측정오차)가 5×10-8 수준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권고안을 내놨다.
5×10-8이란 마의 숫자
‘르 그랑 K’의 72번 사본. 한국의 킬로그램국가원기다. [사진 제공·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원래 kg을 플랑크상수에 입각해 재정의하자는 움직임은 2005년부터 있었다. 하지만 2014년 열린 제25차 CGPM에서도 5×10-8 불확도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르 그랑 K’가 계속 왕좌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르 그랑 K’와 6개의 국가원기 사이에 약 50마이크로그램(㎍), 즉 5×10-8kg의 오차가 발생했다는 조사 결과는 이미 1988년에 나왔다. 하지만 그를 대체할 키블저울과 실리콘 공을 통한 kg 국제표준 확립을 위한 기술발전은 예상외로 매우 더디게 진행됐다.
미국, 독일, 캐나다 3개국의 키블저울을 통해 도출된 수치가 소수점 아래 여덟 번째 자리까지 일치하게 됐음이 발표된 것이 지난해 7월. 무려 12년을 기다린 결과였기에 일사천리로 절차가 진행돼 ‘킬로그램은 플랑크상수(h)를 Js단위로 나타낼 때 6.62607015×10-34이 되도록 정의된다’로 바뀌었다.
몰(mol)의 정의도 아보가드로상수에 기반하도록 바뀌었다. 과거 몰은 ‘원자량이 12인 탄소의 동위원소 0.012kg에 있는 원자의 개수와 같은 수의 구성요소를 포함한 어떤 계의 물질량’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실리콘 공 실험 결과에 입각해 탄소라는 특정 원소가 제외되고 ‘1몰은 6.02214076×1023개의 구성요소를 포함하며 이때 구성요소들이란 원자, 분자, 이온, 전자, 그 외의 입자 또는 그런 입자들의 특정한 집합체가 될 수 있다’로 바뀌었다.
이와 더불어 전류 기본단위 암페어(A)는 기본 전하 e(1개 전자가 가지고 있는 전하로 전하를 띤 모든 입자의 전하량을 세는 기본단위)를 기반으로, 온도 기본단위 K는 볼츠만상수(이상기체를 압력과 부피, 온도의 함수로 다룰 때 사용하는 보편상수·k)를 기반으로 재정의됐다. 4개 단위가 모두 불변의 기본상수를 통해 규정된 것이다.
이렇게 바뀐 새 기준은 세계측정의 날인 내년 5월 20일부터 적용된다. 하지만 이광철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책임연구원의 설명에 따르면 국제킬로그램원기를 대신할 5×10-8의 불확도를 지닌 키블저울을 개발한 나라는 미국, 캐나다, 독일 3개국이고, 그것에 필적하는 고정밀도의 실리콘 공을 개발한 나라도 독일과 일본 2개국뿐이라고 한다.
한국은 키블저울을 보유한 6개국 가운데 하나로, 한국이 개발 중인 키블저울의 불확도는 현재 10-7 정도이며 3년 내 10-8 수준을 달성해 2차 키블저울 국제비교에 참가하는 것이 목표다. 이 국제비교를 통해 좀 더 정밀한 수치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각국의 국가원기를 포함한 사본들이 ‘2차 표준기’로 활용될 예정이다. 현재 국내에는 ‘르 그랑 K’의 39번, 72번, 84번, 111번 사본 4개가 도입돼 있다. 이 중 1992년 도입된 72번이 국가원기로 쓰이고, 나머지 3개는 보조원기로 사용되고 있는데, 내년 5월 이후 이들 4개는 모두 2차 표준기가 된다. 한국은 키블저울의 불확도가 국제규격을 충족하면 2차 표준기의 수를 10개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