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강정민 당시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이 질의를 듣고 있다. [뉴시스]
독일과 대만은 관련 법을 만들어놓고 탈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탈핵을 위한 법제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지난해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를 놓고 벌인 공론화에서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이후 문재인 정부는 ‘안전’과 ‘해체’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기존 원전에 대해서는 안전 운영을 이유로 규제를 강화하고, 설계수명이 다한 원전은 연장 사용하지 말고 해체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양날의 검’이 된 원안위 설치법 제10조
문재인 정부는 계속운전 준비를 마친 월성 1호기 해체를 결정하고, 안전 점검을 이유로 절반 가까운 원전의 가동을 정지시켰다 사상 초유의 폭염으로 전력 소비가 폭증하자 급히 돌리는 사태를 겪었다. 이런 탈핵정책을 법제화 없이 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새로 짓는 원전의 설계수명은 60년이고 문재인 정부의 임기는 5년이니, 탈핵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는 이 방침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이사회와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를 통해 관철해왔다.한수원은 정재훈 사장 부임 이후 탈핵운동을 해온 김해창 씨가 이사회로 들어왔다. 한수원 이사회는 6월 15일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와 천지·대진 원전 등 신규 원전 4기 백지화를 결정했다.
원안위의 경우 위원들이 법으로 신분이 보장돼 있어 함부로 교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안위원은 최근 3년 이내 원자력 연구과제에 참여한 적이 없어야 한다’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원안위 설치법) 제10조 1항의 5호를 꺼내 들었다. 감사원이 각 연구과제를 발주하는 기관으로부터 나온 자료를 들이밀자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됐던 원안위원 3명이 지난여름 사퇴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반년 만인 지난해 말 원안위원장으로 강정민 씨를 임명했다.
강씨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학사 및 석사 출신으로, 공학을 하지 않고 핵 비확산 등 원자력과 관련된 국제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한국 원전을 없애야 한다는 평화네트워크 등에 관여하며 반핵운동을 펼쳤다. 그는 KAIST(한국과학기술원)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초빙교수(2011~2015)를 지내기도 했다.
次惡이냐, 最惡이냐
강정민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과 일전을 벌여 결국 낙마시킨 자유한국당 최연혜 의원. [뉴스1]
그때 자유한국당 최연혜 의원이 추적에 나섰다. 최 의원은 한국철도대 총장을 지냈기에 대학교수들의 연구과제 수탁에 밝다. 그는 강씨도 이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고 원안위와 KAIST, 그리고 원자력 과제를 많이 발주하는 한국원자력연구원(원연)을 대상으로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그런데 원안위에서 보내온 자료에는 강씨가 3년 이내 연구과제에 참여한 기록이 없었다. 그러나 KAIST와 원연에서는 강씨가 참여했던 연구과제가 나왔다.
그 연구과제의 주제는 ‘미래 원전 개발’이었다. 이에 대해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2015년 그는 미국에서 열리는 비확산 회의에 참석하려 했다. 그래서 원연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던 교수에게 부탁해 연구팀의 일원이 됐다. 그 연구팀으로부터 회의에 다녀올 여비 등을 지원받은 것이다. 이 연구는 플루토늄 전용 우려가 없는 원자로를 개발하는 것이어서 그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당시 강씨는 이런 해명을 하지 않고 완강히 부인했다. 10월 12일자 국회 속기록 등을 보면 최 의원이 누차 캐물었는데도 강씨가 계속 부인하자, 출장 후 그가 정산한 자료 등을 증거로 내놓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해 강씨는 “대학에서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다른 교수의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국회 국정감사 마감을 하루 앞둔 날 최 의원이 모친상을 당하자 강씨가 빈소를 찾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 강씨가 돌연 사표를 냈고 문재인 대통령은 즉각 수리했다. 원안위원들이 사퇴한 이유와 같은 이유로 물러난 것이다. 최 의원 모친의 빈소까지 찾아갔던 강씨가 갑자기 사표를 내고 바로 수리된 데는 정부 쪽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문재인 정부는 후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자력계에서는 탈핵 인사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력계 이외의 인사를 임명하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재 원안위원 중에는 원자력 전공자가 1명도 없다. 탈핵운동가인 김혜정 씨, 김호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 화공을 전공한 한은미 전남대 부총장, 김재영 계명대 의대 교수, 장찬동 충남대 지질환경학과 교수로만 구성된 것이다.
이는 한수원 사외이사를 이상직 전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서정해 경북대 경상대학 교수, 권해상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공사, 반핵운동가인 김해창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강래구 더불어민주당 원외위원장 협의회 의장처럼 전원 비원자력계 인사로 채운 것과 비슷하다.
한 인사는 “의료계에 문제가 있다고 비(非)의사에게 의사 일을 맡기는 것과 뭐가 다른가”라고 비판했다.
“원안위는 非원자력인 과외시키는 곳 아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9월 28일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APR-1400’ 설계의 표준설계승인서(SDA)를 받았다. 이날 안대근(왼쪽에서 네 번째) 한수원 워싱턴DC센터장과 프레더릭 브라운(왼쪽에서 세 번째) NRC 신형원자로국장 등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위). APR-1400 조감도. [뉴시스, 사진 제공 · 한국수력원자력]
원연이 경제적이고 앞서가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국 원전은 세계 선두를 유지할 수 있다. 원연의 연구 덕에 한국이 개발한 APR-1400 원전은 미국으로부터 미국에 수출해도 좋다는 인증을 제일 먼저 받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기술개발보다 안전과 해체를 위한 연구를 종용했다. 또 6월 탈핵운동을 해온 서토덕 씨를 원연 감사로 임명했다.
곳곳에 박아놓은 탈핵 인사
자유한국당 최연혜 의원(가운데)이 10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후속 인사 관련 기자회견’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6월 경북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탈핵을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 (왼쪽) 하재주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이 10월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 제공 · 청와대사진기자단, 뉴시스]
이러한 임명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이 공론화위원회에서 20%p 차이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뒤 이뤄졌다. 11월 한국원자력학회와 에너지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는 ‘2018 원자력발전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원전을 늘려야 한다’는 응답은 67.9%, ‘원전을 줄여야 한다’는 응답은 28.5%로 나타났다. 친핵 대 반핵의 차이는 40%p에 가깝다. 지금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50%대인데, 원전을 늘려야 한다는 응답자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