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파멸적인 작품이다. 가장 동정받지 못할 주인공도 바로 맥베스일 것이다. 적어도 햄릿은 복수를 꿈꾸는 데 정당함을 가졌고, 리어는 나이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으며, 오셀로는 이아고라는 간계한 동료의 술책에 넘어간 면이 있다. 그런데 맥베스는 오직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그 욕망을 수습하고자 또 다른 살인을 범한다. 그의 비극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자기 자신의 욕심이다. 그러니 파국으로 끝나는 작품 중에서도 맥베스야말로 가장 파멸적인 인물이 아닐까.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종종 영화화되곤 했다. 특히 ‘햄릿’은 연극계에서나 영화계에서 영어권 연기자라면 한 번쯤 탐낼 만한 배역으로 여겨지곤 했다. ‘맥베스’는 지금까지 모두 7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패러디를 하거나 각색한 작품 빼고, 고스란히 셰익스피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만 따져서 말이다. 오슨 웰스, 로만 폴란스키 같은 문제적 감독들도 ‘맥베스’에 관심을 가졌다. 우디 앨런은 친구의 작품을 빼앗는 작가 이야기로 ‘맥베스’를 그럴듯하게 재창조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맥베스’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자멸하는 주인공에 있다. 던컨 왕을 살해한 맥베스를 괴롭히는 건 자신을 의심하는 주변의 눈초리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 왕의 몸에 칼을 박았던 스스로에 대한 기억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죄책감이 어떤 형상을 지닌 채 일상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죄책감을 내면적으로 앓는 게 아니라 걸어 다니는 유령으로 경험하고 불면의 밤으로 체험한다. 욕망이라는 질병이 만들어낸 죄책감이라는 부산물이 끊임없이 덧나는 것이다.
이 내용을 다룬 수많은 작품 가운데 2015년 ‘맥베스’가 훗날까지 기억된다면, 이는 다름 아닌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 때문일 것이다. ‘헝거’ ‘셰임’ ‘노예 12년’ 같은 작품 속에서 패스벤더는 왜곡된 마음을 신체적 증상으로 앓는 인물을 연기해왔다. 그는 외부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를 자신의 육체와 눈빛 신호로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맥베스처럼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맥베스 그 자체로 스크린을 배회한다. 맥베스가 허공의 유령을 볼 때, 예언이 저주가 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릴 때, 이 추상적 감정은 패스밴더를 통해 구체적인 표정을 얻는다.
이 영화에서 ‘맥베스’의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마녀들의 예언은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으로 연출돼 있다. 마녀들은 갑자기 나타나 맥베스가 영주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하고는, 곧 왕이 되리라고도 말한다. 마녀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맥베스였지만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순간 왕이 자신을 영주로 임명했음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예언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후 그는 남은 예언을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바꾸고자 한다. 영주가 됐으니 왕도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맥베스’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있다. 우리는 어떤 예언의 세계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하고 오해하곤 한다. 마녀들이 행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숨겨둔 욕망을 발견한 것에 가깝다. 맥베스의 야망은 마녀들이 준 외재적 선물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것이었다. 마녀들은 그의 야망을 확인케 하는 거울 구실을 했을 뿐.
매혹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한 마리옹 코티야르는 연약한 듯 강인하고 잔혹한 모습을 선보인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연출하는 파멸의 이인삼각, 고전에는 역시 세월을 무디게 하는 힘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종종 영화화되곤 했다. 특히 ‘햄릿’은 연극계에서나 영화계에서 영어권 연기자라면 한 번쯤 탐낼 만한 배역으로 여겨지곤 했다. ‘맥베스’는 지금까지 모두 7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패러디를 하거나 각색한 작품 빼고, 고스란히 셰익스피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만 따져서 말이다. 오슨 웰스, 로만 폴란스키 같은 문제적 감독들도 ‘맥베스’에 관심을 가졌다. 우디 앨런은 친구의 작품을 빼앗는 작가 이야기로 ‘맥베스’를 그럴듯하게 재창조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맥베스’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자멸하는 주인공에 있다. 던컨 왕을 살해한 맥베스를 괴롭히는 건 자신을 의심하는 주변의 눈초리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 왕의 몸에 칼을 박았던 스스로에 대한 기억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죄책감이 어떤 형상을 지닌 채 일상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죄책감을 내면적으로 앓는 게 아니라 걸어 다니는 유령으로 경험하고 불면의 밤으로 체험한다. 욕망이라는 질병이 만들어낸 죄책감이라는 부산물이 끊임없이 덧나는 것이다.
이 내용을 다룬 수많은 작품 가운데 2015년 ‘맥베스’가 훗날까지 기억된다면, 이는 다름 아닌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 때문일 것이다. ‘헝거’ ‘셰임’ ‘노예 12년’ 같은 작품 속에서 패스벤더는 왜곡된 마음을 신체적 증상으로 앓는 인물을 연기해왔다. 그는 외부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를 자신의 육체와 눈빛 신호로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맥베스처럼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맥베스 그 자체로 스크린을 배회한다. 맥베스가 허공의 유령을 볼 때, 예언이 저주가 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릴 때, 이 추상적 감정은 패스밴더를 통해 구체적인 표정을 얻는다.
이 영화에서 ‘맥베스’의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마녀들의 예언은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으로 연출돼 있다. 마녀들은 갑자기 나타나 맥베스가 영주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하고는, 곧 왕이 되리라고도 말한다. 마녀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맥베스였지만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순간 왕이 자신을 영주로 임명했음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예언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후 그는 남은 예언을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바꾸고자 한다. 영주가 됐으니 왕도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맥베스’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있다. 우리는 어떤 예언의 세계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하고 오해하곤 한다. 마녀들이 행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숨겨둔 욕망을 발견한 것에 가깝다. 맥베스의 야망은 마녀들이 준 외재적 선물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것이었다. 마녀들은 그의 야망을 확인케 하는 거울 구실을 했을 뿐.
매혹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한 마리옹 코티야르는 연약한 듯 강인하고 잔혹한 모습을 선보인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연출하는 파멸의 이인삼각, 고전에는 역시 세월을 무디게 하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