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아모레퍼시픽]
[지호영 기자]
아모레퍼시픽그룹이 1956년 그룹의 모태가 된 서울 용산 본사 터에 새로 지은 사옥은 요즘 유행하는 초고층빌딩이 아니다. 지하 7층, 지상 22층으로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큼의 높이는 안 된다. 하지만 덩치는 제법 크다. 대지면적 1만4525㎡(약 4400평), 건축면적 8689㎡(약 2630평)로 25층 높이인 서울 강남 교보타워보다 대지면적은 2배 이상, 건축면적은 3배 가까이 넓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키 큰 농구선수 스타일이 아니라 탄탄한 체구의 축구선수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탄탄해 보이는 건축이 정작 속은 비어 있다. 사무공간과 엘리베이터는 사방 벽 쪽에 붙어 있고 가운데는 뚫린 보이드(void) 공간 건축이기 때문이다. 땅값 비싼 용산 한복판에 새 빌딩을 지으면서 왜 복판을 비워뒀을까.
1985년 홍콩상하이은행 사옥(노먼 포스터 설계)과 1986년 런던 로이드해상보험 사옥(리처드 로저스 설계)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런 건축은 권위주의적인 조직문화를 해체하고 사원 간 소통과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한 건축적 포석이다. 맞은편 직원은 물론, 서로 다른 층에 있는 직원들과도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빌딩 맨 꼭대기에 경영진이 포진해 있을 경우 제러미 벤담이 이상적 감옥구조로 구상한 팬옵티콘(중앙 감시탑에서 원형 벽을 따라 설치된 감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의 변형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이 사옥 22층 꼭대기엔 임원실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런 역효과를 막기 위한 2가지 장치가 오히려 이 건축의 독창적 공간을 창출했다. 하나는 가운데를 완전히 비우지 않고 5, 11, 17층 3개 층에 ‘루프 가든’이라는 일종의 공중정원을 조성한 점이다.
공중정원과 커튼 월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외부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5층 정원은 1~3층에서 그 바닥을 볼 수 있는 얕은 연못을 만든 뒤 그 주변으로 흙을 깔고 청단풍나무를 심어 작은 숲을 조성했다. 이곳에선 용산가족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5층 정원 주변을 둘러싼 나머지 공간엔 직원식당, 카페, 피트니스센터, 마사지룸 등 직원 복지시설이 들어섰다. 점심식사 후나 휴게시간에 외부 공기와 햇빛, 자연을 한껏 만끽할 수 있다.
그 4분의 1 규모로 청단풍나무숲만 조성한 11, 17층의 루프 가든에선 각각 한강과 남산을 조망할 수 있다. 빌딩 한복판에 조성된 이들 정원에서 직원들이 조망을 즐긴다면, 지역 주민들에겐 빌딩 한복판을 관통하는 숲이라는 독특한 전망을 제공한다. 또 정원에서 내려다보는 사원들과 이를 올려다보는 주민 사이에도 자연스러운 시선 소통이 이뤄진다.
또 다른 장치는 건축 피부에 해당하는 외벽을 대부분 유리창 구조로 만들어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사생활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건물 전체에 발을 늘어뜨린 효과를 부여한 점이다. 유리창마다 길고 가는 알루미늄 핀으로 일종의 수직 루버(louver·격자형 차광장치)를 설치한 것이다. 이를 통해 자연채광이 가능한 것은 물론, 동료의 실루엣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반투명성을 제공하면서 직사광선으로 인한 눈부심과 누군가의 눈길 의식을 적당히 차단하는 효과를 동시에 제공한다. 한마디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사진 제공·아모레퍼시픽]
‘커튼 월’로 불리는 건축 미학적 효과도 겨냥했다. 이를 설계한 영국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65)는 조선백자의 정점인 달항아리(moon-jar)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1980년대 후반 한국을 찾았다 발견한 달항아리의 흰 유약 빛깔을 이 건물 전체에 부여했다. 이는 층마다 설치된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통해 달덩이처럼 환하게 비치는 야경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어떤 이들은 정방형의 이 건축에서 어떻게 곡선미를 자랑하는 달항아리를 연상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치퍼필드가 달항아리에서 끌고 온 것은 첫째, 속이 비어 있고 둘째, 내부와 외부가 동일한 표면으로 이뤄져 있으며 셋째, 한민족을 상징하는 흰빛의 향연을 펼쳐내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가운데가 빈 건축이고, 건축 내부와 외부가 유리창과 알루미늄 핀으로 동질한 피부를 이루며, 눈부신 흰빛을 뿜어낸다.
그렇다고 ‘달항아리의 건축적 변용’이라는 화두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치퍼필드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퍼필드는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적자로 불리는 건축가답게 실용적이면서도 기념비적 건축을 많이 지어왔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독일 베를린신박물관과 현대문학박물관, 스페인 아메리카 컵 빌딩과 바르셀로나 법무부청사는 기념비적 건축임엔 틀림없으나 예술적 스타일보다 건축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작품들이다.
기념비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사진 제공·아모레퍼시픽]
[사진 제공·아모레퍼시픽]
그는 독창성을 중시하는 영국건축협회건축학교(AA) 출신이긴 하지만 렘 콜하스나 자하 하디드와 달리 독자적 스타일보다 건축주의 요구에 충실한 건축을 지향한다. 또 필요하다면 다른 건축가의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변용해왔다. 그가 자신의 건축사무실을 열기 전 리처드 로저스와 노먼 포스터의 건축사무소에서 근무했다는 점을 알면 아모레퍼시픽 사옥에서 구현한 보이드 건축의 뿌리가 반드시 백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빌딩 안에 정원이 설치된 작품 역시 유럽에서는 아주 이례적 작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모레퍼시픽 사옥 건축이 주는 사회적 메시지는 뚜렷하다. 중견기업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으로 발돋움 중인 기업이 서울 심장부에 새 사옥을 지으면서도 ‘거대건축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원은 물론, 지역 주민과 소통 및 연대를 건축 키워드로 설정한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지하 1~지상 3층을 미술관(아모레퍼시픽미술관)과 미술전시도록 전문도서관(apLAP), 카페, 유치원 같은 개방형 공유 공간으로 삼은 점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발상의 전환이다.
하지만 그런 전환이 절반에 머문 점은 아쉽다. 3개 공중정원을 사원들만 접근할 수 있는 폐쇄적 공간으로 묶어 ‘그림의 떡’으로 만든 점, 임원실을 가장 높은 최고층에 배치한 점, 사방팔방이 트인 1층에 카페를 제외하곤 일반 상점을 배치하지 않은 점은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5층 정원으로 연결되는 외부 계단을 설치해 주말이라도 시민들에게 개방한다면 개방과 소통을 강조한 건축정신에 더 부합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