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세르지오 피로네]
•설계 조병수건축연구소(조병수)
건축은 풍경일까 공간일까.
사람은 대개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건축을 선호한다. 그렇지만 진짜 좋은 건축은 예쁜 풍경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외형적 조형미를 넘어 의미 있는 공간 연출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울 강남은 아파트공화국으로 불렸다. 그러다 1990년대 이후 개성 넘치는 건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형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풍경과 조화를 넘어 스스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건축은 드물다.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주변은 그렇게 ‘강남스러운’ 예쁜 건축물이 많은 곳이다. 비싼 땅값 때문일까. 외형은 저마다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박스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 2000년대 들어 유행한 노출콘크리트가 외벽을 장식한다. ‘퀸마마마켓’ 역시 외부에서 볼 땐 크게 다르지 않다(부분적으로 이는 착각의 산물이었다!). 차별점이라면 박스형 콘크리트 건축 상층부에 옥탑방처럼 생긴 박공지붕 목조건축이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볼 여유가 있을 때나 구별 가능한 특징이다.
기둥 없이 높고 넓은 공간
1 퀸마마마켓 현관 진입로. 통나무 데크가 깔려 짧은 오솔길을 연상케 한다.
2 퀸마마마켓 4층 카페 공간. 외부에서 봤을 때 박공지붕 목조건축의 내부에 해당한다.
오전 시간대에는 유리와 강철로 구성된 천장에서 햇살이 쏟아진다.
3 퀸마마마켓 1층과 M층(중간 2층)에 들어선 ‘퀸마마 팝업마켓’. 4월부터 건축가 장영철의 디자인업체
‘가라지(GARAGE)가게’와 공동 기획한 생활용품 기획전 ‘YES!’가 열리고 있다.
4 퀸마마마켓 M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 위쪽으로 보이는 목조박스에 친환경제품 전문매장
‘오보이!(OhBoy!)’가 들어서 있다. 벽 속에 숨겨진 금속파이프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구조다.
이 건축의 진가는 내부에 진입해야 비로소 드러난다. 아니, 1층 현관을 찾을 때부터 시작된다. 차량 2대가 겨우 오갈 수 있는 좁은 아스팔트 골목길에서 현관 진입로를 찾아 발걸음을 떼는 순간 좌우 수풀이 우거진 사이로 통나무 데크가 길게 깔린 오솔길을 만나게 된다. 그 끝에는 거대한 목조 대문이 기다리고 있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집을 발견했을 때 감회를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다.
미닫이로 된 대문을 밀고 내부로 들어서면 기둥 하나 없이 웬만한 건물 2층 높이의 천장을 가진 시원한 공간이 펼쳐진다. 1층과 그 4분의 1 공간을 복층화한 M층으로 이뤄진 프로젝트 매장 ‘퀸마마 팝업마켓’이다. 건축주이자 패션디자이너 커플로 유명한 강진영-윤한희 부부가 엄선한 라이프스타일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공간이다. 3개월에 한 번씩 원예용품과 천연향료, 도예품 중심의 기획 판매가 이뤄진다.
퀸마마 팝업마켓 공간의 특징은 쇼핑공간답지 않은 넉넉함에 있다. 성당에 들어섰을 때처럼 높고 넓은 공간미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거기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성당의 풍성한 공간감은 기둥과 아치를 통해 빚어진다. 반면 퀸마마 팝업마켓은 기둥과 아치 없이 이를 구현해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2층 공간이 목조로 감싸인 채 노출돼 있다. 친환경 제품 전문매장 ‘오보이!(OhBoy!)’가 들어선 공간이다. 콘크리트 박스형 건축물 위에 박공지붕으로 된 목조건축이 얹힌 전체 구조와 닮은꼴이다.
그런데 떠받치는 기둥도 없이 어떻게 2층 공간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이 건축의 비밀이 숨어 있다. 콘크리트 내벽에 감춰진 금속파이프들을 통해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를 설계한 조병수건축연구소의 조병수 소장은 “금속파이프로 당기는 힘이 기둥으로 떠받치는 힘보다 30배가량 세다”며 “지진과 태풍을 견디면서도 풍성한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상품 진열 공간을 절반가량으로 줄이고 나머지 절반은 비워두거나 관상용 식물로 채워넣은 넉넉한 공간 구성도 이런 공간적 풍성함을 뒷받침한다.
이런 공간의 확장은 박공지붕 형태의 4층 목조건물에 들어선 커피전문점 ‘매뉴팩트커피’에서도 확인된다. 높은 박공지붕 아래 매장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30인석 탁자 이외 공간은 대부분 비워놓았다. 저마다 고립된 외로운 섬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 어울리는 사랑방 공간을 지향하는 공간 구성이라고 한다. 그 대신 도산공원 방향 남쪽 통유리 창가에 2인석 테이블을 4개가량 비치해 공원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도심 방향 북쪽엔 야외 테라스를 설치해 도회적 느낌을 물씬 살렸다. 옥탑방처럼 생긴 이 목조건물이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것도 도로와 살짝 엇각을 이루게 하려는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다. 조 소장은 “도시풍경의 경우 도로와 살짝 엇각을 이룰 때 낭만적으로 비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주변 풍광을 건축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는 특히 상층부에서 빛을 발한다. 2, 3층은 테라스가 반대로 남쪽 도산공원 쪽으로 나 있는데, 공원의 푸르른 신록이 빚어내는 풍경이 일품이다. 특히 3층에 자리한 서점 ‘파크(PARRK)’에서 책을 읽다 테라스 방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의 피로가 확 풀린다. PARRK는 각각 예술서적과 해외서적 큐레이션으로 유명한 독립서점 땡스북스와 포스트 포에틱스가 공동운영하는 서점인데, 이런 이유로 애서가들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
1 퀸마마마켓 2층에 위치한 친환경제품 전문매장 ‘OhBoy!’.
2 ‘OhBoy!’ 매장의 내부 풍경. 남쪽으로 낸 테라스로 도산공원의 신록이 한눈에 들어온다.
3 도산공원을 접하고 있어 작은 숲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퀸마마마켓의 전경.
4 퀸마마마켓 3층에 자리한 독립서점 ‘파크(PARRK)’.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 남쪽 테라스를 바라보면
‘살아 있는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5 PARRK의 테라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앉아서 느긋이 읽을 수 있다.
빛, 바람, 신록이 빚은 공간
그 정점 역시 4층 박공지붕을 통해 구현된다. 밖에서 보면 목조지만 안에서 보면 강철과 유리로 구성된 박공지붕이 일종의 채광창 역할을 해 눈부신 빛을 쏟아낸다. 빛만 부서져 내리는 게 아니다. 공원 나무들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머금은 바람도 솔솔 불어온다. 이 점에서 퀸마마마켓은 아주 특별한 공간 체험을 안겨준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상업공간이면서 햇빛과 바람, 신록의 샤워를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건축이 과연 얼마나 될까.퀸마마마켓에는 한 가지 비밀이 더 숨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언뜻 노출콘크리트로 보이는 외벽이 실제론 최장 1m 길이의 시멘트벽돌을 톱으로 길게 썬 뒤 시루떡 앉히듯 차곡차곡 쌓은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 기자도 실내 내벽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서야 그 차이를 깨달았다. 조 소장은 “강남의 흔한 예쁜 건축물과 차별화를 위해 투박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이 밀도 있게 적층된 효과를 내고자 고안해냈고 실용신안특허까지 받은 기술”이라고 밝혔다.
이런 퀸마마마켓만의 독특한 공간 연출을 음미하려면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이용할 것을 권한다. 밖에서 보기엔 비슷한 박스형 건물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층마다 차별화된 공간 체험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전체 구조를 그리며 천천히 비교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