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이 국내 화장품업계 서열에도 영향을 끼쳤다. 국내 화장품업계 1위인 아모레퍼시픽이 LG생활건강에 선두자리를 내준 것. 최근 발표된 각 사의 이사분기 경영 실적을 보면 아모레퍼시픽은 영업이익이 반 토막 난 반면, LG생활건강은 분기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이사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은 1조413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7.8%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57.9% 급감한 1304억 원이었다(그래프 참조). 일사분기까지도 3000억 원 넘는 영업이익을 올리며 ‘건재함’을 알렸지만, 중국 국가여유국이 자국 여행사를 통한 한국행 여행상품 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금한령(禁韓令)’이 전방위로 확산된 3월 중순 이후 실적이 급격히 떨어졌다.
반면 LG생활건강의 화장품 부문 이사분기 연결 기준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7% 감소한 7812억 원, 영업이익은 2.7% 감소한 1487억 원에 달했다.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이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반면, LG생활건강은 화장품 비중이 51%(생활용품 24%, 음료 25%)밖에 되지 않아 매출만 보면 아모레퍼시픽이 월등히 앞서지만 영업이익 면에서 LG생활건강이 아모레퍼시픽을 앞섰다.
상반기 전체 매출로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뚜렷하다. LG생활건강의 상반기 매출은 3조1308억 원, 영업이익은 4924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각각 1.9%, 7.3%씩 증가했다. 반면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상반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3% 줄어든 2조7740억 원, 영업이익은 27.7% 감소한 4184억 원이다. 이처럼 아모레퍼시픽그룹의 매출액이 LG생활건강에 뒤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영업이익도 지난해 3, 4분기 연속 LG생활건강에 밀렸다 올해 일사분기에 잠깐 회복됐지만 한 분기 만에 다시 1위 자리를 내줬다.
매출 따돌리고 시가총액도 맹추격, LG생건
양사 실적이 엇갈림에 따라 주식시장에서 위상도 달라지고 있다. 8월 14일 기준 아모레퍼시픽 주가는 28만 원, LG생활건강은 96만9000원에 장을 마쳤다. 시가총액은 각각 16조3684억 원, 15조1340억 원으로 LG생활건강이 아모레퍼시픽의 92.4% 수준까지 쫓아왔다. 1월까지만 해도 LG생활건강의 시가총액은 아모레퍼시픽의 70%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추월’을 목전에 두고 있다.아모레퍼시픽은 2015년 주식을 10분의 1로 액면분할하기 전 삼성전자도 경험하지 못한 400만 원대 주가를 기록했지만, 중국의 사드 보복과 함께 1년여 만에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내수 부진 악재까지 겹쳐 추락 속도가 더욱 빨라지면서 3월에는 주가가 24만 원대까지 고꾸라졌다. 그에 비해 LG생활건강은 지난해 7월 119만 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70만 원대까지 하락했다 다시금 상승세를 타고 있다.
업계에서는 양사의 명함이 엇갈린 결정적 원인으로 사업 구성의 차이를 꼽는다. LG생활건강은 오래전부터 화장품·생활용품·음료 등 균형 잡힌 3대 사업부를 확보한 반면,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아모레퍼시픽, 이니스프리, 에뛰드하우스 등 연결 대상 종속기업의 화장품사업 비중이 월등히 높다. 이 때문에 사드 같은 외부 충격에 대한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다. 아모레퍼시픽 사업 부문은 뷰티계열사와 비(非)뷰티계열사로 나뉘는데, 화장품 브랜드를 운영하는 뷰티계열사의 비중이 90%에 이를 만큼 치중돼 있다.
이사분기 실적에서 LG생활건강 사업부 가운데 화장품과 생활용품 부문은 매출액이 모두 감소한 반면, 음료 부문은 4.3% 증가했다. 영업손익 역시 생활용품 부문은 374억 원에서 378억 원으로 3.5% 증가했고, 음료 부문 영업이익도 352억 원에서 451억 원으로 28.1% 증가했다.
리스크 줄이려면 시장 다변화 필수
이에 대해 LG생활건강 측은 “화장품사업을 주력으로 하면서도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위험을 분산한 덕에 의미 있는 실적을 거뒀다”고 자평했다. 반면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사업으로 시작한 뷰티 기업이고, LG생활건강과 비교해 두 기업이 완벽하게 동일한 업계라고 볼 수 없다. 화장품사업 비중이 큰 업체일수록 중국의 사드 보복 타격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아모레퍼시픽 주요 계열사인 설화수, 헤라, 라네즈, 아이오페, 마몽드, 려 등은 물론이고 큰 폭으로 성장세를 이어오던 이니스프리도 이사분기 매출과 영업이익 면에서 모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니스프리 이사분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8.1.% 감소한 1535억 원, 영업이익은 64.6%나 줄어든 222억 원이었다. 에뛰드하우스 매출도 30.7% 줄어든 586억 원에 그친 데다 5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으며, 에스쁘아는 적자로 전환됐다.
화장품 매출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곳은 면세점이다. 중국 관광객이 급감한 탓이다. LG생활건강 역시 이사분기 국내 면세점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26% 감소하는 등 타격을 입었지만 중국 현지에서 판매하는 고가 브랜드 ‘더 히스토리 오브 후’(후)와 ‘숨37도’ 등 화장품 매출이 늘어나 오히려 상승세를 타고 있다. 후와 숨37도는 중국에서 이사분기에만 648억 원, 상반기 총 1233억 원 매출을 기록했다. 지난해 이사분기 370억 원, 상반기 719억 원 실적과 비교하면 70% 넘는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후와 숨37도가 중국 최고급 백화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매장 수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사분기 말 각각 172개, 31개 매장을 운영 중인데 지난해에 비해 32개, 29개씩 늘어난 것이다. 국내에서도 럭셔리 화장품 채널인 백화점과 방문판매에서 일사분기에 이어 이사분기에도 꾸준한 매출 성장을 이어왔다”고 밝혔다.
이번 실적 발표는 아모레퍼시픽 내부에도 적잖은 충격을 안긴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아모레퍼시픽 한 직원은 “중국의 사드 보복에 따른 피해가 큰 건 사실이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LG생활건강이 화장품 부문에서 좋은 성적을 낸 만큼 실적 하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유통업체, 중저가 브랜드 등 숱한 기업이 화장품사업에 뛰어드는 상황에서 아모레퍼시픽이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려면 또 한 번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업계에서는 사드 배치에 따른 한중 외교 갈등이 해소되면 화장품업체들의 실적도 회복될 것으로 예상한다. 또한 아모레퍼시픽이 LG생활건강으로부터 1위 자리를 되찾아올 가능성도 농후하다. 업계에서는 양사 모두 중국시장 의존도를 줄이고 새로운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처럼 외교적 문제로 기업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기업의 새로운 시장 확보는 매우 절실하다”고 말했다.
고무적인 것은 아모레퍼시픽의 해외 사업 매출이 증가세에 있다는 점이다. 이사분기 해외 사업 매출은 8855억 원으로 전년 대비 7.3% 증가했다. 이 중 아시아 사업 매출은 9.7% 증가한 8470억 원을 달성했다. 중국, 홍콩 등 중화권 성장세가 둔화됐지만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고성장을 이뤘다.
신세계, 드디어 뷰티사업 빛 보나
또한 아모레퍼시픽은 9월 화장품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의 라파예트백화점에 설화수 단독 매장을 낸다. 오프라인 매장은 물론, 라파예트백화점 온라인몰에도 입점할 예정이다. 같은 기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도 이니스프리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한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2000년대 중반 미국시장에 진출해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고군분투했고 이제는 ‘규모의 성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올해를 기점으로 해외시장에서 또 다른 도약의 시기를 맞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이 밖에도 아모레퍼시픽은 2020년 완공을 목표로 말레이시아에 생산기지를 건립하고 있다. 중화권에 이어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유럽, 미주시장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간다는 계획이다. LG생활건강 역시 동남아, 북미 등 다양한 문화권으로 사업을 확장해가고 있다.
유통업계의 화장품사업 실적도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신세계백화점의 화장품 편집숍 ‘시코르(CHICOR)’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동안 신세계는 정유경 신세계 백화점부문 총괄사장의 진두지휘 아래 뷰티와 패션 관련 사업에 공을 들였다.
시코르는 론칭 초부터 '코덕(코스메틱 덕후)' 사이에서 '프랑스 화장품 편집숍 '세포라' 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는 평을 들으며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Chic or Nothing’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시코르는 ‘스마트’한 소비를 지향하는 젊은 고객을 위한 차별화된 뷰티숍을 지향한다. 지난해 12월 신세계백화점 대구점 1층에 1호점을 연 것을 시작으로 5월 서울 강남점, 6월 부산 센텀시티점을 오픈했다. 8월 24일에는 경기 고양시 스타필드 고양점에도 입점할 예정이다. 시코르 1호점은 오픈 100일 만에 목표 대비 150% 매출을 달성했다.
시코르에는 메이크업포에버, 어딕션, 베네피트, 잉글롯 등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는 물론 립스틱퀸, 바이테리, 퍼스트에이드뷰티, 그로운 알케미스트 등 해외 백화점이나 해외직구를 통해서만 구매할 수 있던 뷰티 전문숍 인기 브랜드를 국내에 단독으로 들여왔다. 또한 코스메틱 마니아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는 뷰티 유튜버의 브랜드도 다양하게 입점해 유튜버 개코의 ‘롬앤’, 포니의 ‘포니이펙트’ 외에도 ‘아임미미’ ‘3CE’ ‘그라운드플랜’ ‘닥터자르트’ ‘에이프릴스킨’ ‘라곰’ ‘러슬리’ 등 50여 개 케이뷰티(K-beauty)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시코르 강남점을 자주 방문한다는 직장인 이모(32) 씨는 “매장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그동안 유튜브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눈으로만 구경하던 제품들을 직접 발라보고 구매도 가능해 일반 화장품 매장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특별함’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뷰티 편집숍은 제조사가 중심인 반면, 시코르는 유통업체가 키를 쥐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뷰티 편집숍의 판도 변화를 예고한다. 현재 국내 뷰티 편집숍은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이 두 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각 사에서 생산하는 제품들만 판매해 선택의 폭이 좁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돼왔다.
아모레퍼시픽의 뷰티 편집숍 ‘아리따움’의 지난해 매출은 4440억 원으로 2007년 이후 역성장 중이다. LG생활건강의 뷰티 편집숍 ‘네이처컬렉션’도 4월 100호점을 돌파한 후 지금까지 130호점까지 매장을 늘렸지만 매출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화장품업계 한 관계자는 “그동안 뷰티 편집숍은 ‘원 브랜드’ 판매에 그치다 보니 고객의 트렌드를 미처 좇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제 코스메틱은 다양성과 제품력, 고급스러움으로 승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시코르의 공격적인 확장은 화장품사업에 힘을 쏟고 있는 정유경 총괄사장의 주문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2012년 이경민 메이크업 아티스트로부터 인수한 화장품 브랜드 ‘비디비치’도 5년 만에 드디어 ‘칭찬받을 만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최근 비디비치는 ‘면세점 부문 매출 전년 대비 10배 상승’이라는 놀라운 실적을 발표했다. 1월부터 7월까지 면세점 매출이 70억 원을 기록한 것. 신규 면세점 증가로 매장 수가 지난해보다 2배 늘어 신세계면세점 명동본점, 롯데면세점 소공점, 신라면세점 서울점 등 주요 매장에 입점하면서 매출이 크게 늘었다는 분석이다.
이마트 쿠션팩트 출시
특히 5월 한류스타 송지효를 전속모델로 내세우면서 6~7월 면세점 매출이 4~5월 대비 2배 가까이 증가하며 급격한 상승기류를 탔다. 신세계인터내셔날 비디비치 관계자는 “송지효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에서 인기가 높아 한국을 찾은 관광객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이 났다. ‘지효세트’ ‘여신세트’ ‘지효 립스틱’ 등 모델을 활용한 세트 제품이 많이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송지효 효과로 면세점 매출이 크게 오르자 비디비치는 8월부터 관광객을 위한 면세점 전용 제품을 개발, 판매하고 있다. 비디비치 브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킨일루미네이션’과 ‘퍼펙트 브이핏 쿠션’을 결합한 ‘스키 브라이터 마블 팩트’가 그것. 제품력에 대한 입소문도 매출 상승을 견인하고 있다.
비디비치 관계자는 “처음 비디비치를 인수할 때도 제품력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비디비치를 동양인에게 가장 잘 맞는 브랜드로 키워 아시아시장, 나아가 전 세계 뷰티시장으로 진출하겠다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스타블로거인 ‘왕훙’으로부터 제품을 판매하고 싶다는 문의를 받았다”고 밝혔다.
한편 정유경 총괄사장의 오빠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화장품사업에 슬슬 시동을 걸고 있다. 이마트의 자체상표(PL) 브랜드 ‘노브랜드’가 8월 초 미백·주름 개선·자외선 차단 3중 기능성을 갖춘 쿠션팩트 ‘수분가득 촉촉하게 스마트쿠션’(스마트쿠션)을 출시하며 시장에 진출한 것. 스마트쿠션 제품은 ODM(제조업자개발생산),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전문기업 코스맥스와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노브랜드는 앞서 한국콜마와 손잡고 선크림, 스킨로션, 클렌징워터, 폼클렌징, 토너 등을 출시, 판매해왔다. 이마트 노브랜드 같은 자체상표 브랜드는 중간 유통 과정을 간소화해 저렴한 가격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쟁력을 갖는다. 또한 해당 유통채널에서만 구매할 수 있어 고객 충성도도 높은 편이다.
화장품업계에서는 유통기업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잇따라 화장품사업에 진출하는 것을 두고 ‘출혈경쟁’을 우려하기도 한다. 화장품사업은 다른 제조업에 비해 시장 진출이 쉽고 품질을 일정 수준까지 올리는 데 큰 무리가 없어 자칫 ‘레드오션’으로 변할 수 있다. 이미 화장품사업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의견도 나온다.
화장품업계 한 관계자는 “화장품은 진입 자체는 쉽지만 브랜드 인지도를 쌓기 어려워 결코 호락호락한 시장이 아니다. 또 기업들이 가격 경쟁에 너무 치우치다 보면 케이뷰티의 장점인 품질과 기술력이 저해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