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4

2015.09.07

“日 언론 ‘조선인 폭동’ 대서특필 지금도 ‘학살 없었다’ 주장”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례 기록한 일본 작가 가토 나오키

  • 장원재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입력2015-09-07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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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언론 ‘조선인 폭동’ 대서특필 지금도 ‘학살 없었다’ 주장”

    9월 1일 일본 도쿄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에서 열린 간토 대지진 92주년 희생자 추모식(오른쪽)과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설명하는 일본인 작가 가토 나오키 씨.

    9월 1일 낮 12시 45분 일본 도쿄 미나토구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중앙본부 8층 민단홀. 붉은 계열의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40대 중순의 일본인 남성이 연단으로 올라왔다. 그는 “92년 전 도쿄 곳곳에서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 그 현장을 돌면서 되도록 희생자들의 모습이 보일 수 있게 증언 등을 정리해 책을 만들었다”고 설명을 시작했다.

    경찰이 앞장서 루머 전파, 학살 불러

    연단에 선 이는 프리랜서 작가인 가토 나오키(加藤直樹) 씨. 지난해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파헤친 책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를 출간했다. 무거운 주제에도 1만 부 이상 팔렸고, 일본 대형서점이 주최한 ‘2015년 기노쿠니야 인문대상’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목격자들의 증언 및 시간대별 상황과 함께 학살이 있었던 장소를 소개해 사건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날 행사는 간토 대지진 92주년을 맞아 열린 희생자 추모식에 이어 열렸다. 가토 씨는 자신이 조선인 학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2000년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의 ‘삼국인’ 발언을 꼽았다. 일본의 대표적 우익 인사인 이시하라 전 지사는 재직 시절이던 2000년 육상자위대 앞에서 “불법이민이 많은 삼국인(한국·대만·중국인)이 흉악범죄를 되풀이하고 있다. 큰 재해가 일어날 때 소요가 예상되는데 경찰력으로는 한계가 있어 여러분의 출동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삼국인’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통치하에 있던 재일조선인과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어서 논란이 됐다.

    하지만 가토 씨는 단어보다 내용에 주목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학살로 이어졌는데, 이시하라 전 지사의 발언 역시 유사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 바로 ‘대재해가 닥쳤을 때 소수집단이 위험세력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토 씨는 역사 자료를 수집하면서 실제로는 재해 때 소수집단이 폭동을 일으켰던 예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다만 재해가 일어났을 때 소수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유언비어가 나오기 쉽다. 그런 만큼 정부가 해명을 해야 하는데 대지진 때는 정부가 나서서 루머를 확산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경찰관들은 메가폰을 들고 “조선인이 습격해온다”는 루머를 앞장서 전파했다는 것.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폭탄테러를 시도했다’는 등 유언비어가 경찰 내부 정보망을 타고 퍼져 나갔다. 경찰 수뇌부는 지진 직후 대혼란 상황에서 검증 없이 이를 언론에 알렸고, 조선인은 즉각 타깃이 됐다.

    가토 씨는 “학살의 진상을 다룬 자료를 모으다 2013년 시작된 혐한시위를 보고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마침 그는 한류(韓流) 발원지이자 혐한시위가 시작된 오쿠보(大久保) 출신이었다.

    “학창시절 반에는 꼭 1~2명씩 한국식 성을 쓰는 친구가 있었다. 일본식 이름을 쓰는 친구까지 합치면 몇 배는 된다. 이처럼 모든 이들의 장소인 오쿠보에서 헤이트스피치(혐한시위)가 일어나다니…. 분노를 느끼고 반대시위를 조직해 행동에 나섰다. 그러다 헤이트스피치 시위대의 플래카드에서 90년 전 학살 때 사용했던 ‘불령선인’(不逞鮮人·불순한 사상을 가진 조선인)이라는 문구를 봤다. 문득 이러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절박감이 들었다.”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에 선동된 일본인들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도쿄 곳곳에서 자경단이 조직돼 눈에 불을 켜고 조선인을 찾아 나섰다. 조선인으로 의심되면 어려운 발음을 시키거나 교육칙어를 외우라고 시킨 뒤 못 하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경찰이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을 쫓기도 했다.

    “조선인 죽이는 게 애국”

    “日 언론 ‘조선인 폭동’ 대서특필 지금도 ‘학살 없었다’ 주장”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자료사진. 일본 자경단과 경찰이 살해된 조선인의 시신을 막대기로 헤쳐보고 있다.

    지진 당일 경찰의 요청으로 동원된 군은 하루 뒤 계엄령이 내리자 실탄과 장검을 들고 본격적인 조선인 학살을 시작했다. ‘수상한 조선인은 적당히 처분하라’는 것이 정부의 공식 명령이었다. 당시 한 군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병사들 사이에는 조선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는 게 애국하는 길이고 훈장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가토 씨는 강연 중반 스크린에 사진을 띄웠다.

    “이곳은 지금 인터넷 카페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가메이도(龜戶) 경찰서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곳에 수용돼 있던 조선인 50~60명이 군에 의해 학살됐습니다.”

    굳은 표정의 청중 사이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의 책에는 한국인이 보기에 몸서리쳐지는 대목이 많다. 일본인 부인 앞에서 조선인 남편을 죽이던 자경단, 집에 있던 일본도를 들고 나와 조선인의 몸을 베며 의기양양해하는 모습,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강에 던지거나 태우는 광경…. 당시 희생된 조선인은 6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왜 일본인들은 유언비어만 믿고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을까. 가토 씨는 평범한 일본인들이 학살에 가담했던 배경으로 ‘두려움’을 꼽았다. 3·1운동 이후 조선인들의 반발을 두려워하던 일본인들의 공포 심리가 배경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날 가토 씨와 대담을 가진 재일사학자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도 “한마디로 당하기 전 죽이자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언론의 책임도 컸다. 당시 언론들은 경찰의 발표만 믿고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가토 씨는 “‘산케이신문’은 재해 직후 루머를 보도하던 신문을 근거로 지금도 학살이 없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며 “이는 지금까지 연구 및 조사 결과를 모두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강의를 끝낸 가토 씨는 기자와 만나 “최근 헤이트스피치나 혐한서적이 다소 줄기는 했지만 수면 아래에는 역사수정주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면서 “헤이트스피치를 금지하는 법이 국회에서 논의 중인데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날을 ‘방재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9월 1일에도 아베 신조 총리 등 주요 인사가 참가한 가운데 방재훈련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고 많은 언론이 이를 보도했지만, 조선인 학살과 관련한 행사나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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