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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대회 스타들의 인생역전

페이스메이커 황영조의 깜짝 우승, ‘코리안 특급’ 박찬호 탄생 신화를 쓰다

  • 김도헌 스포츠동아 기자 dhoney@donga.com

U대회 스타들의 인생역전

U대회 스타들의 인생역전
2015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광주U대회·7월 3~14일)는 1997 무주동계U대회, 2003 대구하계U대회 이후 한국에서 개최되는 세 번째 세계 대학생들의 축제다. 2년마다 열리는 U대회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스포츠 경연장이자 모든 선수의 꿈인 올림픽 무대로 가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 통계에 따르면 2012 런던올림픽 메달리스트의 48%(110명)가 U대회와 세계대학선수권대회 메달리스트 출신이다. U대회 메달이 올림픽 메달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한국 스포츠 역사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예를 봤을 때도 U대회는 세계적인 스타를 배출하는 등용문이 됐다. 1회였던 1959 이탈리아 토리노U대회 이후 루마니아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미국 수영 신예 컬런 존스 등 해외 스타들을 비롯해 한국 마라톤 영웅 황영조,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 박찬호 등 많은 선수가 U대회를 발판 삼아 ‘월드스타’로 발돋움했다.

셰필드U대회 무명의 황영조 날다

1991년 영국에서 개최된 셰필드U대회에선 한국의 무명 마라토너 황영조가 금메달을 거머쥐며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훗날 ‘몬주이크의 영웅’으로 불린 황영조는 셰필드에서 시상대 맨 위에 서기 전까지 이름 없는 페이스메이커에 불과했다. 동료 선수들의 기록을 끌어 올리기 위한 보조 선수였기에 별도의 훈련조차 하지 않았지만, 당시 U대회 최고기록인 2시간12분40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듬해인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는 몬주이크 언덕을 달려 한국에 올림픽 사상 첫 마라톤 금메달을 안기며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고, 2년 뒤인 1994년에는 히로시마아시아경기대회까지 제패했다.

버펄로U대회 운 좋은 남자 박찬호



U대회 스타들의 인생역전
셰필드U대회에서 황영조의 금메달에 환호성을 울릴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한미일 친선 고교야구대회에선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시속 150km 직구를 던지는 한국인 고교 3학년 선수에 주목하고 있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였다.

하지만 1991년 인상적인 모습에도 박찬호는 국내에서조차 동기생인 임선동, 조성민에 밀린 ‘넘버3’에 머물렀다. LG 트윈스와 두산(당시 OB) 베어스가 임선동과 조성민에게 각각 2억~3억 원대 계약금을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돌 때, 연고지역팀인 한화(당시 빙그레) 이글스가 박찬호에게 제시한 계약금은 3000만 원대였다. 결국 박찬호는 프로 진출을 포기하고 한양대에 진학했고, 대학생 신분으로 참가한 1993 버펄로U대회를 통해 ‘인생역전’을 일궈냈다.

당초 버펄로U대회 국가대표 1차 명단에는 박찬호의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타자 강혁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투수 박찬호가 대신 기회를 잡았다. 운 좋게 엔트리에 포함된 박찬호는 대회에서 팀이 4승을 거두는 동안 1승3세이브를 기록하며 한국을 당당히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박찬호를 예의주시하던 빅리그 스카우터들은 156km 강속구에 매료됐고, 결국 LA 다저스가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30만 달러(당시 약 10억5000만 원)를 제시하면서 박찬호는 태평양을 건너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14년간 빅리그를 누비며 동양인 투수 메이저리그 최다승 등 숱한 기록을 만들어낸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신화도 U대회에서 시작됐다. 박찬호는 ‘도마의 신’ 양학선(체조)과 함께 7월 3일 광주유니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열린 광주U대회 성화 최종 점화자로 나서 그와 U대회의 인연이 새삼 주목받기도 했다.

베이징U대회 통해 NBA 진출한 야오밍

2001 베이징U대회 남자농구 준결승전. 경기 종료 0.2초를 남겨두고 중국의 229cm 장신 센터 야오밍이 미국 로니 백스터의 점프슛을 쳐냈다. 결국 중국은 83-82, 한 점 차 승리를 거두는 기적을 연출했다.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중국은 독일을 78-77로 꺾은 유고슬라비아와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인간 만리장성’으로 불린 야오밍의 힘이었다. U대회를 통해 가치를 입증한 야오밍은 1년 뒤 미국프로농구(NBA) 휴스턴 로키츠에 스카우트되면서 농구 본고장에 진출했고, 이후 세계적인 NBA 슈퍼스타로 거듭났다.

최초의 흑인 수영 금메달리스트 컬런 존스

‘흑인은 수영에 약하다’는 편견을 깬 선수가 있다. 미국 컬런 존스다. 존스는 2008 베이징올림픽 수영 남자 400m 계영에서 마이클 펠프스, 개릿 웨버게일, 제이슨 리잭과 함께 3분8초24 세계기록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도 400m 혼계영 금메달, 50m 자유형 은메달을 차지했다. 존스가 세계 수영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것도 U대회였다. 2005 터키 이즈미르U대회 50m 자유형에 출전해 U대회 수영 종목에서 흑인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했고, 이를 밑바탕 삼아 올림픽까지 제패하며 세계 수영 역사를 새롭게 썼다.

부쿠레슈티U대회 코마네치의 부활 무대

U대회는 등용문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때론 좌절을 맛본 스타의 재기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76 몬트리올올림픽 이단평행봉에서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았던 ‘체조 레전드’ 나디아 코마네치, 그는 당시 14세였다. 역대 올림픽 최연소 금메달리스트였다.

이후 코마네치는 6번이나 더 10점 만점을 받아 총 7번 10점 만점을 기록했다.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개인종합, 평균대, 이단평행봉 등 금메달 3개를 차지했고, 마루 동메달과 단체전 은메달까지 한 대회에서 5개 메달을 획득했다, 세계는 루마니아에서 날아온 14세 작은 소녀가 보여준 초인적인 연기에 열광했다.

그러나 역대 올림픽 사상 최고의 ‘신데렐라’로 평가되던 코마네치의 삶은 이후 파란만장했다. 당시 공산국가였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은 그를 국민영웅으로 내세워 정부의 선전도구로 활용했고, 스승 벨라 카롤리와 결별한 뒤 슬럼프까지 겹친 그는 더는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뒤늦게 스승 카롤리와 재회했지만 1980 모스크바올림픽에서 4년 전과 같은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세계무대에서 코마네치라는 이름을 다시 살려낸 것은 다음 해인 1981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U대회였다. 코마네치는 리듬체조 5관왕을 차지하며 다시 한 번 국민요정의 명성과 인기를 회복했다. U대회에서 재기에 성공한 그는 다시 루마니아의 ‘보물’이 됐고, 부쿠레슈티U대회는 1970년대 최고의 체조요정 코마네치가 명예 회복에 성공한 재기 무대로 역사에 남았다.



주간동아 2015.07.13 996호 (p64~65)

김도헌 스포츠동아 기자 dhon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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