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7

2017.07.19

인터뷰 | 등단 47년, 우리 시대 소설가 김주영

“나이 일흔아홉에 깨달았다. 독자를 위로하는 게 작가의 임무라는 것을…”

나를 키운 8할은 가난과 호기심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7-07-18 14: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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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이가 어느새 일흔하고도 아홉인데, 이제 비로소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깨달았어요. 글 방향도 정했으니 단편소설 10편 정도 써보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시간이 금쪽같아요.”

    지난겨울 경북 청송의 ‘문디 바람’이 객주문학관 창을 때릴 때, 소설가 김주영(사진)은 장편소설 ‘뜻밖의 生’을 썼다.

    ‘뜻밖의 生’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한 인터넷 카페에 매일 연재한 작품을 정리해 5월 출간한 소설. 도박판에 목숨을 거는 타짜 아버지와 무당을 신봉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따뜻한 손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한 노인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행복하게 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삶과 행복의 본질을 묻는다. 소설을 쓰면서도 그는 ‘쓸쓸한’ 문학관에서 부질없이 불어대는 산바람과 대화하며 80년 인생과 47년 문학세계를 되돌아봤다고 했다. 청송의 산바람은 고단한 노장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대접 못 받는 사람,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는 글을 써보자. 문학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줄 수 있는 건 위로이고, 작가의 임무는 독자가 위로받도록 하는 거니까.”

    7월 1일 오후 키를 맞춘 향나무들이 줄을 선 서울 충정로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요즘 건강은 어떤가요.
    “늙어서 건강은 ‘보장받지 못한 건강’이라고 생각해요. 젊어서는 약을 안 먹어도 건강하지만 우리 나이가 되면 약으로 (건강을) ‘땜질’하는 거니까요. 소위 성인병이라고 하는 고혈압과 당뇨도 있고, 관절도 안 좋아 하루 종일 약을 먹어요(웃음). 어떨 땐 한심하기도 하고…. 이젠 허투루 시간을 보내선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노인이 바둑을 두거나 화투를 치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데, 저는 소설 구상하느라 매일 머리를 쓰니까 치매 걱정은 안 해요(웃음).”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호구

    4년 만에 장편소설 ‘뜻밖의 生’을 출간했는데, 반응은 어떤가요.
    “작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 글을 쓴 사람 아닌가요? 내가 읽어보면 아주 재밌는데, 잘 안 팔리더라고(웃음). 요즘 젊은이들은 바보 같은 사람을 ‘호구’라고 하는데, 책에 나오는 주인공 박호구가 그런 인물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캐릭터죠. 객주문학관에서 이 글을 쓰면서 제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지 알게 됐어요. 객주문학관은 겨울엔 텅 비어 외롭고 쓸쓸해요. 바람 소리 들으며 소설을 썼죠.”

    등단 47년 만에 작품 방향을 알았다는 건….
    “그동안 어머니 얘기며, 사회 문제며 수십 편의 소설을 중구난방 써왔는데 이제는 대접 못 받는 사람,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뜻밖의 生’을 썼죠. 문학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줄 수 있는 건 위로이고, 작가의 임무는 독자가 책을 읽으며 위로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흔아홉이 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평소 ‘모든 글은 작가의 자서전이자 반성문’이라고 했는데요.   
    “맞아요. 경험이죠. 저는 태어나서 초등 6학년 때까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편모 밑에서 자랐어요. 지독한 가난과 싸우며 수없이 방황했죠. 월사금(수업료) 못 내고, 교과서도 없이 학교에 다녔죠.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없다 보니 제 소설에서는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하나도 안 나와요. 좀 더 커서 아버지 집에 찾아갔더니 나를 엄하게 대해 다시 어머니한테로 도망치기 일쑤였죠. 그때부터 내가 도망은 좀 쳐요(웃음). 그런데 나이 마흔쯤 되니 가난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아마 소설가가 안 됐을 겁니다.”

    ▼집안은 어머니가 꾸려갔겠네요.

    “네. 어머니가 삯바느질하고 농사짓고 품앗이도 하면서…. 저는 외동으로 자랐는데 나중에 어머니가 재가(再嫁)하면서 성(姓)이 다른 동생 두 명이 생겼어요.”

    감추고 싶었을 가족사를 털어내는 그에게 기자는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소설 ‘잘 가요 엄마’(2012)를 쓴 이유를 밝힌 적이 있다.  

    “어머니는 제게 감옥 같은 존재였습니다.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버림받은 어머니, 평생 글자도 숫자도 볼 줄 몰랐고, 오로지 품팔이만 하며 사신 분이죠. 그런 어머니의 누더기 같은 삶을 다 털어놓지 않고서는 감옥 같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오랜 세월 어머니의 과거가 부끄러워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잘 안 했습니다. 지독한 열등감이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나이 일흔을 넘기고 난 후부터 그런 거짓된 것에 대한 참회와 후회가 생겼습니다. 어머니를 용서하고, 저 자신을 용서하고, 또 제 주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용서할 수 있는 길, 그리고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머니와 제 관계를 철저히 털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관계는 어땠나요.

    “농고(대구농림고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교)를 졸업하니 아버지가 경북대 농대를 가라고 하더군요. 아버지로서는 합리적인 제안을 한 거였지만, 저를 심층적으로 살펴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어요. 그때 이미 저는 글 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서울로 ‘도망’쳤어요(웃음).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장학생 시험을 쳤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 영영 헤어지게 됐죠. 외삼촌이 대학 입학금을 대줬지만 자취할 돈이 없어 반 학기 다니다 군대에 자원입대했어요. 제대 후에도 별반 생활이 달라진 건 없었죠.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때는 오전 10시에 한 번, 오후 5시에 한 번 하루에 두 끼를 라면으로 때웠는데, 라면에 든 색소 때문인지 신기하게 몸이 노랗게 변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성인병에 걸렸나(웃음). 어쩌겠어요.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의 매질에 깨달은 ‘인생 모순’

    ▼지독한 가난이 김 작가를 우리 시대 소설가로 만들었군요.
    “맞아요. 교과서도 없고, 선생님도 저를 달가워하지 않으니까 장날이면 장터에 갔어요. 평소 보지 못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는 거야(그는 어린 시절이 떠올랐는지 잠시 허공에 대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날렸다). 제가 공부는 못했어도 호기심은 아주 강했어요. 결석한 다음 날 선생님에게 ‘배가 아팠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얼마 지나서는 장날만 되면 진짜 배가 아픈 거예요.

    아, 그런데 선생님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때리더군요. 배가 안 아플 땐 거짓말해도 때리지 않았는데, 진짜 아파서 결석하니 때리는 거예요. 그때 ‘인생은 모순’이란 걸 깨달았죠. 글을 쓰려고 일찍 인생의 모순을 겪은 게 아닌가 싶어요. 미당 서정주 선생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저는 ‘김주영을 키운 8할은 가난과 호기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호기심….”

    커피 잔을 내려놓은 그가 오른손을 배에 대고는 한참을 웃었다. 영문 모르는 기자도 따라 웃었다.
    “이제 보니 글을 쓰려고 일찍부터 인생의 모순을 겪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아는 형이랑 초등학교 때 처음 대구 시내에 갔는데, 예쁜 여자가 유리관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기에 주인에게 ‘저 여자는 언제 움직이냐’고 물어봤더니, 형이 ‘촌놈이라 부끄럽다’며 막 팔을 잡아끌더군요(웃음). 도시에서 살았으면 마네킹이란 걸 알았겠지만, 시골에서 자라다 보니 호기심을 갖고 별의별 상상을 다 하는 거죠. 제가 도시에서 자랐다면 호기심도, 상상력도 발휘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자란 것은 축복이었어요.”

    ▼어릴 적 시골 장터 경험이 그 유명한 대하소설 ‘객주’를 낳았군요. ‘객주’의 주인공 천봉삼도 독자에게 위로를 줬는데요. 거상(巨商) 육의전 대행수 신석주에게 맞서고, 돈의 노예가 된 길소개와 대적하는 정의의 사도였으니….

    “천봉삼이도 그랬죠. 맞아요. 대표작인 ‘객주’와 ‘홍어’는 40여 년 전 쓴 소설인데 아직도 잘나가는, 제게는 ‘효자 작품’입니다(웃음). ‘객주’는 제 자서전이기도 해요. 가방끈이 짧아 배운 게 없는데도 덜컥 ‘객주’를 쓰기 시작했는데, 척박한 시골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글은 못 썼을 겁니다(‘객주’는 1979년 6월부터 82년 2월까지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 등단 이후 장터를 주제로 한 소설을 써보자고 마음먹고 몇 군데 답사해보니, 그 시대에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보부상 관련 자료가 거의 없더라고요.”



    내 눈과 가슴에 축적되려면...

    ▼왜 없을까요?
    “자손들이 조상이 보부상이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자료나 관련 물품 등을 남기지 않은 거죠. 과거에는 상공인(商工人)이나 장사 일을 천시한 탓이죠.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신분제가 철폐됐어도, 가난한 양반은 신분을 감춘 채 장사를 했으니까요. 보부상의 자손들을 만나 취재하고, 고(故) 박원선 연세대 교수가 보부상을 주제로 쓴 논문을 들여다보고, 여기에 제 발품과 상상력을 더해 ‘객주’ 10권을 완성했죠. 발, 땀, 상상력으로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길 위의 작가’라는 별명도 얻었는데요(‘객주’를 연재할 당시 한 달에 20일은 시골 장터를 돌며 취재하고 여인숙에서 소설을 썼다).
    “답사는 늘 합니다.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면서 받은 원고료는 여행 답사하는 데 다 썼어요. 지금도 돈만 생기면 여행을 떠나요.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이 눈과 가슴에 축적되면 자연스레 소설에 표출돼요. 발품 파는 열정이 있어야 작가로서 이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단편소설 ‘쇠둘레를 찾아서’는 분량이 원고지 80매 정도밖에 안 되는데, 그 짧은 소설을 쓰기 위해 (강원) 철원을 세 번 다녀왔어요. 예전엔 답사 가면 ‘경찰 신세’를 졌는데….”

    ▼경찰 신세요?

    “카메라 가방을 든 시커먼 남자가 사람들에게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느냐’고 자꾸 물으니까 사람들이 (간첩이라고) 신고한 거죠. 경찰이 신문사로 전화해 신원을 확인한 적도 많았어요.”

    ▼그렇군요. ‘뜻밖의 生’을 쓴 객주문학관은 어느새 청송의 명물이 됐던데요.

    “문학관을 개관한 지 3년 됐어요. 폐교를 활용해 창작관, 소설도서관, 연수시설, 전시관 등을 갖췄고, 제 방은 꼭대기 교실을 개조했죠. 창작관에는 젊은 작가들이 글을 쓰면서 지낼 수 있는 숙소와 세미나실도 있어요. 4월이면 문학관 운영위원회 심사를 거쳐 젊은 작가 5~6명이 들어오는데, 객주문학관이 마을에서 떨어져 있어 신예 작가들이 음식을 사 먹을 데가 없어요.

    그래서 문학관 가운데 유일하게 휴일 없이 일주일 내내 식사를 제공해요. 지원 비용은 예술단체에서 보조해주고, 일부는 제가 보탭니다. 지금 문학관 인근에 객주마을을 만들고 있는데, 기와집 20채를 조성해 민속촌처럼 꾸밀 겁니다. 잘 만들면 관광객이 많이 찾아올 거예요. 이제는 문화가 돈을 벌어들이는 시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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