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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 연세-SERI EU센터&주간동아 공동기획

경제 살리기 시동 건 EU 유럽을 흔드는 ‘시장화’ 바람

금융·디지털·에너지 통합 ‘융커 플랜’, 그러나 갈 길이 멀다

  • 연세-SERI EU센터 연구팀 브뤼셀=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경제 살리기 시동 건 EU 유럽을 흔드는 ‘시장화’ 바람

경제 살리기 시동 건 EU 유럽을 흔드는 ‘시장화’ 바람

벨기에 브뤼셀 유러피언쿼터에 자리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주청사 베를레이몬트 빌딩.

‘팀 융커(Team Juncker).’ 벨기에 브뤼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집행위) 청사에 내걸린 대형 현수막 구호다. 2014년 11월 취임한 장클로드 융커 위원장이 이끄는 집행위 주요 멤버를 일컫는 이 말은 최근 EU의 공문서에서조차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용어기도 하다.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Team Avengers)랑 느낌이 비슷하죠? 초능력 영웅들이 뭉쳐 지구를 구하는 영화 내용처럼 유럽을 구하겠다는 각오랄까요.” 바네사 목 집행위 대변인이 멋쩍게 웃었다. EU 집행위 수뇌부가 이렇듯 대중친화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하는 것은 전임자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다.

지구촌 모든 지역이 마찬가지였지만, 지난 10년은 특히 유럽에 가혹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어진 재정위기로 이 지역 전체의 경제성장률은 답보와 마이너스를 거듭했다. 자국민이 낸 막대한 세금이 남유럽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 투입되는 걸 지켜보던 영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EU 무용론과 탈퇴론이 줄을 이었다. 통합이라는 대의의 구심력과 각 회원국 이익이라는 원심력이 팽팽하게 맞부딪힌 10년. 이는 곧 국민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를 향해 진군하던 ‘인류 최초의 실험’ EU가 맞이한 최악의 위기이기도 했다.

그 결과는 ‘경제 살리기’를 승부수로 띄우고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투자계획을 선거 공약으로 내건 융커 위원장의 지명이었다. 취임 6개월을 맞은 융커 집행위의 행보에 전 세계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융커 플랜’으로 통칭되는 최근 EU의 움직임은 인구 5억이 넘는 고급 소비시장에서 기회를 엿보는 한국 등 다른 수출국가들에게도 사활이 걸린 이슈다. 과연 유럽은 세계 3대 경제권이라는 위상에 걸맞은 활력을 되찾고 날아오를 수 있을까. 관료주의의 대명사로 손꼽혀온 EU는 이를 성공적으로 주도할 수 있을까.

28개 회원국이 모인 EU의 조직은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크게 보자면 각국 정상과 주요 각료가 모이는 이사회, 행정부 구실을 하는 집행위, 인구비례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유럽의회가 핵심 정치기구다. 이사회와 집행위는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가 있고, 유럽의회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와 브뤼셀에 나눠 있다. 각국 정상이 모이는 이사회가 나라별 이해관계라는 원심력이 가장 크게 작동하는 무대라면, 집행위는 공동 정책을 추진하는 구심력의 기관차다. 요컨대 브뤼셀은 유럽을 통틀어 이 두 개의 힘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는 도시인 셈. 목 대변인의 설명이다.

유럽 각국 증권거래소를 하나로, 자본시장동맹



은행 중심 간접시장을 미국형 초대형 시장으로 통합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연합(EU)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세 가지 화살(Three Arrows)’, 즉 금융완화, 재정 지출 확대, 구조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성공의 관건은 다름 아닌 금융시장의 기능. 정책당국이 의도한 대로 시중 자금이 기업과 가계에 원활히 공급돼야만 실물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문제는 유럽 은행들의 자금 중개 기능이 취약해 경기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 특히 중소기업은 은행으로부터 충분한 신용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EU는 대기업 중심의 미국과 달리 중소기업이 성장과 고용 창출을 주도해온 지역이다. 유럽 은행의 보유자산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4배에 달하는 반면, 미국은 GDP의 80%에 불과하다. 유럽 기업은 전체 자금의 70%를 은행에 의존하지만 미국 기업은 필요 자금의 30%만 은행에서 조달한다. 이 때문에 EU 자본시장은 미국, 일본은 물론 중국보다도 미흡하다. 2013년 GDP와 비교해보면 EU 자본시장은 236%, 미국은 349%다.

근본적 한계는 유럽 국가들의 자본시장 구조가 나라마다 상이하다는 점이다. 여러 개의 작은 회원국 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보니 각국 주식시장 시가총액과 채권시장 규모가 천차만별이다. 각 나라의 증권거래소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왔지만 여전히 주식시장은 쪼개져 있는 상태고, 이 때문에 유럽 전체의 주식시장 시가총액을 모두 합해도 미국의 3분의 1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벤처캐피털 시장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다. 2013년 유로존 중소기업의 35%는 은행에 신청한 신용자금 전액을 다 확보하지 못했다. 금융위기로 인한 타격이 큰 국가일수록 중소기업의 은행대출비용이 대기업보다 커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럽의 벤처캐피털 시장은 투자금액 기준으로 미국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2014년 11월 장클로드 융커 신임 EU 집행위원회(집행위) 위원장이 취임 일성으로 자본시장동맹(Capital Markets Union·CMU)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유럽 자본시장이 고용과 성장을 위한 자금 조달의 원천이 돼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회원국별로 쪼개진 자본시장을 진정한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한다는 게 이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다. 은행 위주의 간접금융에 의존해왔던 EU가 2019년까지 미국에 필적할 만한 자본시장을 만드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경제 살리기 시동 건 EU 유럽을 흔드는 ‘시장화’ 바람
올해 하반기까지 액션플랜 채택

이와 관련해 EU 집행위는 2월 18일 모든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해 향후 추진 과제를 담은 녹서(Green Paper)를 채택한 바 있다. 녹서에는 높은 수준의 증권화시장 통합은 물론, 사업설명서 지침(Prospectus Directive) 간소화 같은 단기 우선과제들도 포함돼 있다. 유럽 자본시장에 뿌리 깊게 박힌 각종 장벽을 제거하는 문제도 중기 과제로 다루고 있다.

녹서에 제시된 자본시장동맹의 목표는 △투자 국경을 폐지해 단일자본시장을 구축하고 △유럽 전역의 모든 기업이 자본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며 △자금 조달 방식의 다양화 및 자금 조달 비용을 감축하고 △자본시장의 혜택을 극대화해 경제 성장과 고용 창출을 지원하며 △중소기업의 자금 조달을 지원하고 △EU 지역에 대한 전 세계 자금의 투자 활성화 및 투자처로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EU 집행위는 유럽의회, 회원국 의회, 회원국 정부, 시민단체, 중소기업, 금융업계 등 다양한 부문에서 의견을 수렴해 올해 하반기까지 자본시장동맹을 위한 액션플랜을 채택할 계획이다. 이 액션플랜에는 향후 5년간 추진할 구체적인 행동 계획이 포함될 계획. EU는 먼저 분야별로 시장 활성화를 추진하고, 관련 법률과 기준을 표준화하는 작업을 진행한 다음, ‘EU 자본시장 단일규정’ 등 법제도를 통합해 단일감독기구 설립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 자본시장이 하나로 통합된다면 유럽 산업계, 특히 중소기업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자본 조달 루트가 다양화하고 확대되면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은 은행뿐 아니라 자본시장을 통해서도 저렴한 자금을 손쉽게 조달할 수 있다. 각 기업은 EU 전역에서 조성되는 다양한 자본 조달원에 접근할 수 있고, 투자자와 예금자들의 자금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시장 기반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EU 차원에서 추진하는 중·장기 유럽투자전략(Investment Plan for Europe)에 민간자본도 훨씬 쉽게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잖다. 자본시장동맹을 실현해야 할 당사자가 다름 아닌 유로존 각 회원국이라는 사실이 가장 우려스럽다. 유럽 자본시장을 통합하려던 유사한 시도가 회원국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이미 무산된 전례가 있기 때문. 28개 회원국의 세법과 회계 기준은 물론 증권거래법, 기업도산법 등을 대대적으로 정비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회원국 간 합의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유럽에서 자본시장이 가장 발달한 영국이 EU에 감독권을 넘겨줄 리는 사실상 만무하다.

런던의 금융거래 기득권을 지키려는 영국은 이미 자본시장동맹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로존 10개국이 2016년부터 독자적으로 도입할 예정인 금융거래세(Financial Transaction Tax·FTT)도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EU 집행위의 강한 의지에도 이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찮다. 과거 유사한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추진 동력을 잃고 용두사미로 끝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초의 선거, 친(親)시장 공약

“EU 집행위원장의 영문직함은 프레지던트(President)이고 호칭으로는 ‘미스터 프레지던트’를 사용합니다. 서구 언어감각으로는 ‘대통령’인 셈이죠. 아직은 EU 이사회의 발언권이 강력하지만, 통합 유럽을 대표하는 행정적 수장이 EU 집행위원장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욱이 지난해 이뤄진 신임 수뇌부 지명은 EU 이사회에서 각국 정상이 논의해 결정하던 그간의 방식에 더해 유럽의회의 의사가 반영된 최초의 ‘선거’였죠. EU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봐도 좋을 겁니다.”

룩셈부르크 총리 출신인 융커 후보는 선출 과정에서 10여 개 공약을 담은 야심만만한 정책자료집을 의회에 제출했다. 목표는 단 하나,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늘린다는 것. EU 집행위에 위임된 공적자금을 모두 쏟아붓고 가능한 정책 수단을 총동원해 경기를 부양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던 ‘섹시한’ 공약들은 취임 이후 엄청난 규모의 투자 계획과 분야별 프로젝트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 핵심이 유럽 각국의 자본시장과 디지털시장, 에너지시장을 하나로 묶어 활력과 경쟁력을 높인다는 공격적인 통합 계획이다. 물론 비판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다.

“3150억 유로(약 380조 원)에 달하는 전체 투자 규모는 일견 엄청나 보이지만, 실제로 투입되는 사업예산은 210억 유로(약 25조 원) 남짓입니다. 이 돈이 금융기관을 통해 민간자본을 끌어들이는 승수효과를 거쳐 3000억 유로를 넘는 규모에 이를 것이라는 ‘기대치’인 셈이죠. 디지털과 에너지 등 각 분야에서 공동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 프로그램에 투입될 돈을 모두 합치면 이 정도 규모가 될 거라는 겁니니다. 물론 민간자본이 기대만큼 흔쾌히 따라나서게 될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겠죠.”

윤성덕 경제공사를 비롯한 벨기에·유럽연합 주재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은 설명을 이어나가는 동안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로라는 단일통화로 묶인 지 16년, 주요 시장을 하나로 합치는 작업은 분명 의미심장하지만 계획대로 진행될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융커 플랜 자체가 경제 이슈인 까닭에 돈 문제가 얽힌 각국의 이해관계가 워낙 첨예하다는 이야기다.

경제 살리기 시동 건 EU 유럽을 흔드는 ‘시장화’ 바람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 본회의장(왼쪽)과 2014년 5월 구글 이용자들에게 ‘잊혀질 권리’가 있음을 판결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유럽사법재판소.

‘유럽 챔피언’ 만들기

먼저 지금 상황을 보자. 프랑스 벤처기업은 독일 은행으로부터 창업기금을 투자받기 어렵고, 국경 왕래는 자유롭지만 열차가 경계선을 통과하는 순간 휴대전화는 로밍 요금 폭탄을 피할 수 없다. 나라별로 천연 가스 등 에너지 수입 협상이 제각각 진행되다 보니 구매자인 서유럽이 판매자인 러시아에 끌려다니는 일도 반복돼왔다. 융커 플랜의 핵심은 이를 하나로 합쳐 비효율을 최소화하고 경쟁력을 끌어올리자는 아이디어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고용을 늘리고 경기를 살리겠다는 로드맵인 셈이다.

‘유럽 챔피언(European Champion).’ 디지털 단일시장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나탈리 반디슈타트 EU 집행위 공보관은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쪼개진 시장으로는 미국 구글이나 애플 같은 경쟁력 있는 디지털기업이 성장하기 어려우므로, 하나의 거대시장을 만들어 그 토대를 육성하겠다는 게 진짜 속내라는 뜻이다. 유럽 기업들도 실리콘밸리처럼 자유롭게 자금을 빌리고 자유롭게 영업함으로써 어느새 글로벌 시장을 점령한 미국 회사들을 능가할 수 있도록 키워내겠다는 것. 그는 이러한 지향점이 유럽사법재판소를 비롯한 규제기관이 구글 등에 취해온 반독점 규제 조치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를테면 적들을 꺾기 위해 적진과 유사한 비즈니스 환경을 만든다는 논리다.

문제는 하나의 단일시장이 곧 하나의 독점기업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 EU 회원국과 주요 기업마다 생각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독일 도이체텔레콤이나 프랑스 오랑주 같은 대형 통신망 사업자들에게는 동유럽 소국 구석구석까지 시장을 확장할 기회지만, 거꾸로 작은 나라들로선 자국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이다. 자유로운 디지털 콘텐츠 판매의 전제 조건인 저작권 규제 역시 조정이 쉽지 않은 이슈.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문화선진국은 동유럽 국가들의 낮은 스탠더드에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에 해당하는 경제단체인 비즈니스유럽(Business Europe) 관계자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잘라 말했다.

당초 융커 플랜의 핵심 프로젝트였던 에너지동맹의 주요 과제가 후퇴를 거듭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선출 과정에서 융커 후보는 각 회원국이 EU에 에너지 수입가격에 대한 대외 협상권을 위임하는 급진적인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EU가 회원국 전체에 대한 무역협정 체결권을 행사하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그러나 에너지 수입 구조나 전원(電源) 비율이 천차만별인 회원국 정부들의 반응은 차가웠고, 결국 취임 후 융커 위원장은 당초 공언했던 관련 어젠다의 상당 부분이 각국 정부 재량권임을 선언해야 했다. 이후 에너지동맹 프로젝트는 온실가스 감축이나 재생에너지 활용 같은 온건한 이슈로 비중을 옮겼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동전의 양면 같은 상황은 유럽에서 비즈니스를 펼치고자 하는 한국 등 주요 수출국에게도 꼭 같이 적용된다. 나라별로 다른 자본·통신 규제를 연구하고 적응하느라 따로 비용을 들일 필요가 줄어든다는 건 분명 긍정적 요소지만, 거꾸로 유럽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해 한국 기업의 점유율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예상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 “원래 유럽 소비자들은 외국 제품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높은 편입니다. 구글과 애플 등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정서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요. ‘유럽 챔피언’이 만들어진다면 한국 기업의 실적은 분명 타깃 중 하나가 될 겁니다.” 한 수출 대기업 현지사무소 관계자의 말이다.

유럽판 구글 만들자, 디지털 단일시장

ICT 산업 육성을 위한 공격적 로드맵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 경제의 회복세가 더딘 원인 중 하나는 뒤처진 산업 경쟁력이다. 2000년대 시작된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부상에 유럽 각국의 대응은 미미했고, 미국 기업과 맞서 경쟁할 수 있는 디지털 기업이 몇 개 남지 않았다. EU 집행위원회(집행위)는 지난 수년 간 구글 등 미국 대형 ICT 기업의 유럽 내 사업 활동을 규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집중했지만, 지난해 출범한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디지털 보호주의’라 부르는 수비적 임시방편을 넘어 유럽의 ICT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공격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2015년 5월 6일 EU 집행위가 발표한 디지털 단일시장 전략(Digital Single Market Strategy)이다. △유럽 전체 온라인 시장에 대한 소비자와 기업의 접근성 확대 △디지털 네트워크 및 서비스 발전을 위한 환경 마련 △유럽 디지털 경제 성장 잠재력 극대화라는 3개 축으로 구성된 이 전략은 미국 주도의 글로벌 ICT 산업을 따라잡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EU 집행위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단일시장을 통해 4150억 유로(약 502조 원)의 부가가치가 추가로 창출되고, 신생기업 성장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모든 산업, 모든 인력을 디지털로

첫 번째 축인 온라인 시장 접근성 확대는 회원국별로 분리된 시장 때문에 ICT 산업 발전이 늦어지고 있다는 원인 분석에서 출발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온라인 쇼핑으로, 현재 EU 회원국에서 온라인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EU 소비자는 15%에 불과하다. 이를 늘리고자 EU 집행위는 온라인 쇼핑에 관한 각 회원국의 계약 기준과 소비자 보호 장치의 조화를 꾀하는 법안을 제안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온라인 업체에 부과되는 부가가치세 제도를 간소화해 장벽을 낮춘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디지털 경제의 또 다른 성장동력인 콘텐츠 거래를 활성화하고자 회원국별로 상이한 디지털 콘텐츠 보호 장치를 조화시키는 작업도 포함돼 있다.

두 번째 축인 디지털 산업 발전을 위한 환경 마련에서 핵심 과제는 휴대전화 이동통신시장 개혁이다. 각국의 주파수 시장을 단일화하고 이동통신사업에 대한 국가별 규제 차이를 해소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고속인터넷 광대역 네트워크에 대한 투자도 장려할 계획이다.

지난 수년간 이어져온 주요 해외 사업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글로 대표되는 미국 검색엔진이나 스마트폰에 대해 진행해왔던 경쟁법 위반 공식조사가 앞으로는 소셜미디어, 전자상거래, 앱스토어, 가격 비교 웹사이트 등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주요 온라인 기업 측에 개인정보 수집이나 활용 방법의 투명성 강화를 요구하고, 시장지배적 지위에 있는 기업이 사용자의 이탈을 막으려고 배타적 계약을 체결하는지 여부에 대한 조사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 번째 축인 디지털 경제 성장잠재력 극대화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전 산업의 디지털화로 요약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디지털 경제에서 발생하는 총부가가치의 75%를 비(非)ICT 기업들이 창출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아직까지 유럽 기업들의 ICT 활용 수준은 매우 낮은 상황. EU 집행위는 정보 이동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과 데이터 저장 및 분석과 관련한 불필요한 규제들을 파악해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물인터넷(IoT)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디지털 헬스, 여행, 환경, 에너지 등 핵심 산업에서 기준을 수립하는 작업에도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 경제를 이끌어갈 인력을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향후 모든 교육과 훈련 관련 정책에 디지털 기술을 연계하겠다는 계획도 수립해놓았다.

EU 집행위는 디지털 단일시장 전략을 위한 정책 설계와 법안 제안을 2016년 말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이번 청사진을 통해 EU가 미래 성장동력을 디지털 경제에서 확보하려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셈. 외국 기업으로서는 앞으로 빠르게 성장할 유럽의 온라인 시장과 ICT 인프라 시장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IoT 기준 설정 과정에서 유럽 기업과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ICT 기업에 대한 견제도 더 심화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정보 보호, 조세, 독점, 산업 판도 변화 등 각 분야에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빨라야 18개월? 시간이 없다

경제 살리기 시동 건 EU 유럽을 흔드는 ‘시장화’ 바람

유럽연합(EU) 경제 부흥 프로젝트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인 이위르키 카타이넨 부집행위원장.

분명한 것은 EU의 이러한 움직임이 탈규제·친(親)기업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시장화 기조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간 어느 모로 보나 미국에 비해 보수적이던 유럽 규제기관들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자못 놀라울 정도다. 오랜 기간 외국 글로벌 기업에 휘둘려온 설움에 경기 부양에 대한 기대치가 뒤섞여 만들어낸 신자유주의 바람. 익명을 요청한 전직 EU 집행위 간부는 “유럽의회의 의사를 반영해 뽑힌 융커 집행위 특유의 포퓰리즘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경제를 살리는 게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분위기는 미국식 자유방임시장이 가진 위험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자본시장동맹 계획이 추진하는 주요 지향점 중 하나는 은행 대신 투자 회사(Investment Firms)의 기능을 강화하자는 것. 그러나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IB)이던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금융시장 중 하나였던 유럽의 장점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데도 충분히 근거가 있다.

EU 집행위 측은 탈규제 기조가 리스크 증가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은 유럽의회 일각에서도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행정부 격인 집행위가 투자 계획과 입법 권고안을 만든다고 해도 법률적 효력을 가지려면 입법부에 해당하는 유럽의회의 승인이 필수적이다. 당장 집행위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들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의회에 제출할 패키지를 만드는 작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융커 플랜과 유럽 경제 부흥 프로젝트의 운명은 스트라스부르 의회에서 각국 대표가 사활을 걸고 벌일 논쟁에 좌우되는 셈이다.

융커 집행위는 대략 2016년 말까지 주요 프로젝트 구성안을 완성해 유럽의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의회는 2년, 빠르면 18개월의 검토 기간을 거쳐 입법화한다. 의결을 통해 회원국 정부를 강제하는 법률로 만드는 것. 그러나 EU 집행위원장의 임기는 5년이고, 융커 위원장은 2019년 말이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지난한 과정에 비해 주어진 시간은 턱없이 짧다. 융커 플랜의 상당 부분이 개월 단위로 시장 판도가 변화하는 디지털과 금융시장에 관한 것임을 감안하면, 지금 만들어지는 제도가 수년 뒤에도 유효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전임 위원장들이 추진했던 경제 프로젝트가 줄줄이 좌초를 피할 수 없었던 배경도 다르지 않다.

그나마 회원국의 통화가 통합돼 있는 덕분에 상대적으로 진척 속도가 빠르다는 자본시장통합 계획도 한계는 마찬가지다. EU가 경기 부양에 투입하는 210억 유로를 종잣돈 삼아 전체 사업자금을 3150억 유로까지 부풀리려면 먼저 자본시장통합을 성사시켜 민간자본을 활성화함으로써 사업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재정 투입보다 시장 통합이 더 늦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가깝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집행위 관계자는 “그게 유럽 아니겠어요? 28개 나라가 모여 있잖아요”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목적지는 단일국가가 아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그간 우리는 심각한 위기를 겪어왔고, 이 계획이 실패하면 유럽의 운명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각국 정부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스트라스부르 의회에서 서둘러 계획을 제출해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이에요. 물론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지금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융커 플랜의 핵심 당사자인 이위르키 카타이넨 EU 집행위 부위원장의 말은 단호했다. 1971년생으로 2011년부터 핀란드 총리를 지내다 지난해 ‘팀 융커’에 합류한 젊은 정치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고용, 성장, 투자, 경쟁력.’ 그의 명함에 새겨진 담당 분야다. 수렁에 빠진 유럽 경제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각오가 금테 안경 너머로 뿜어져 나온다.

그에게 물었다. “10년 전만 해도 모두들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이 멀지 않았다고 했지만, 지금의 EU는 그러한 동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다들 탈퇴(exit)를 공공연히 거론하지 않는가.” 그가 답했다. 국민국가라는 원심력과 통합 유럽이라는 구심력 사이 어디선가 ‘새로운 최적화 균형’을 찾아내는 일이 자신들의 목표라는 설명이었다.

“EU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의 나라가 되는 게 아닙니다. 융커 플랜과 시장 통합을 그 중간과정으로 해석하는 것도 사실과 다르고요. 그런 식의 결정은 다양성이라는 우리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짓일 뿐이죠. 다만 국가를 뛰어넘는 틀을 통해 더 많은 이익과 안정을 조화롭게 만드는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탈퇴를 말하는 나라들 역시 실제로는 그게 더 훨씬 더 손해일뿐더러 돌아가려 해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초유의 실험이지만,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에너지동맹, 러시아로부터의 독립?

우크라이나 사태로 추진 가속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집행위)가 2월 25일 발표한 에너지동맹(Energy Union)은 유럽의 에너지 시장을 하나로 묶어 EU 소비자들에게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하며 합리적인 가격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세계 1위 에너지 수입 지역인 EU는 한 해 4000억 유로(약 484조 원) 안팎을 에너지 수입에 쓰고 있다. 이 중 상당량이 러시아산(産)으로 2013년에는 천연가스 수입의 39%, 석유 수입의 32%, 석탄 수입의 26%를 러시아로부터 충당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너지동맹에는 에너지 효율 증대와 수입선 다변화, 에너지 공급국과 협상에서의 공동대응을 통해 에너지 안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복안도 포함돼 있다. 재생에너지 비중과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설정해 기후변화에 공동 대응하며, 궁극적으로는 지속가능하고 경쟁력 있는 유럽 에너지 시장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EU는 이를 실현하는 데 앞으로 5년간 1조 유로(약 1210조 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한다.

사실 에너지 시장의 통합은 다른 분야에 비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가별로 에너지 산업구조와 소비구조가 다르고, 독과점 형태로 대형 수직계열화한 주요 에너지 기업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 예컨대 러시아 국영가스기업 가스프롬(Gazprom)은 유럽 에너지 기업들과 양자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자사의 전략적 판단에 근거해 수입국이나 구매 기업별로 다른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높은 협상력을 보유한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대형 가스기업은 동유럽국가 기업보다 좋은 조건으로 가스를 구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복된 계획, 거듭된 좌절

경제 살리기 시동 건 EU 유럽을 흔드는 ‘시장화’ 바람
각국 에너지 정책도 마찬가지다. 일본 후쿠시마 사태 이후 독일 등 서유럽 국가는 원자력 비중을 단계적으로 줄이려는 반면, 영국과 일부 동유럽 국가는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면서까지 신규 원자력발전소를 추진 중이다. 석탄이 풍부해 전원(電源) 구성에서 50% 이상을 차자하는 폴란드는 최근 EU의 야심 찬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정책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난맥상을 해결하고자 EU 집행위는 그간 수차례 에너지 시장 통합을 추진해왔지만, 아직까지 그리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가장 큰 한계는 역시 회원국들의 반대. 예컨대 2030년까지 전원 구성 중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27%로 키우려는 EU와 이를 반대하는 회원국들 간의 합의가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가스·전력 시장 자유화 요구에 대해 회원국들은 에너지 수송망(grid) 구축에서 해당 국가의 자주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동유럽 국가는 서유럽의 거대 에너지 기업들에게 자국 시장이 지배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 반면, 서유럽 에너지 기업들은 EU가 좀 더 강제성을 띠는 시장 자유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량과 재생에너지 비중의 목표치에 대해서도 회원국 간 견해 차이가 크다.

다만 이러한 상황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다소 반전의 기회를 찾았다. 옛 소련 시절만 해도 우크라이나를 통해 러시아 가스를 유럽으로 들여오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가스관 통과요금과 가스공급 가격을 두고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켰고, 그 실질적인 피해는 최종 소비국인 유럽 국가들이 감당해야 했다. 이미 2006년과 2009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가스 공급을 중단해 심각한 위기 상황을 경험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사태와 동부 지역 분쟁이 에너지 안보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EU는 회원국들 사이의 가스·전력 수송망 연결을 가속하고, 대(對)러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는 차원에서 수입선을 중동, 카스피 해, 동아프리카, 북미 등으로 다변화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2022년까지 모든 회원국이 에너지 공급원을 적어도 2개 이상 보유하자는 것이다. EU는 유럽 전력 시장이 완전히 통합될 경우 소비자들이 연 120억~400억 유로를 절약할 수 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인 전력 요금도 인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주간동아 2015.06.01 990호 (p39~45)

연세-SERI EU센터 연구팀 브뤼셀=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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