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0

2015.06.01

유전집유, 무전복역

‘땅콩회항’ 판결 계기로 본 재벌 지배구조와 사법적 통제…독단과 전횡 막을 ‘신상필벌’ 필요

  • 김성진 변호사,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위원장 sj5778@hanmail.net

    입력2015-06-01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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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집유, 무전복역

    ‘땅콩회항’ 사건으로 구속됐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5월 22일 열린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돼 구속 143일 만에 법원 밖으로 나오고 있다.

    옛날 한 임금이 공자에게 물었다.

    “한 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칠 수 있는 말이 있습니까.”

    공자는 답한다.

    “사람들은 ‘내 말을 다른 사람이 거스르지 않는 것이 즐겁다’고 합니다. 만일 임금이 착하지 않은 말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이것이 한 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치는 말일 것입니다.”

    불법을 지시하는 재벌



    리더가 비판을 싫어하고 자기 말을 순순히 따르기를 좋아하는 것이 조직을 해치는 길이라는 얘기다. 최근 이른바 ‘땅콩회항’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비행기를 억지로 돌린 행위가 ‘항공기 항로변경죄’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는데, 이에 대해 항소심 법원이 무죄로 판단한 결과다. 이 판결을 두고 ‘유전집유 무전복역’이란 신조어가 떠돌고 있다. 법원 판결에 대한 비판이 비등한 것으로 봐서, 국민의 공분이 아직 풀리지 않은 듯하다.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의 당부는 여기서 논외로 하겠지만, 국민의 공분은 그동안 재벌 총수 일가에 대한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과 관련한 반발감의 재현이라 볼 수 있다.

    조 전 부사장의 사건을 돌아보자. 그는 기내 사무장과 승무원에게 폭언 및 폭행을 하고, 총수 일가라는 위세를 이용해 기장의 의사를 제압해 비행기를 되돌렸다. 기내 사법경찰권을 가진 기장과 사무장은 승객에 불과한 조 전 부사장에게 눌려 정당한 권한을 행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회항 사건 후 대한항공 한 임원은 피해자인 사무장에게 “우리는 네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 쓰면 윗사람이 좋아하겠어”라며 허위진술서를 쓰게 했다. “너 회사 오래 다녀야 되잖아. 정년까지 안 다닐 거야”라고 회유해 시말서까지 쓰게 했다. 또 대한항공 측은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되자 관련 파일을 삭제하고 컴퓨터를 교체했다. 조 전 부사장의 억지에 따른 회항과 임원의 증거 인멸. 이 둘은 재벌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총수 일가가 지시하면 그 말이 불법적인 것일지라도 그대로 관철되고, 그 잘못을 덮고자 임원까지 불법을 자행하는 게 현실이다.

    재벌 총수는 기업을 경영할 권리가 있을 뿐 직원에게 불법을 지시할 권리는 없다. ‘땅콩회항’과 뒤이은 증거 인멸은 정상적인 경영권 행사와는 무관한 비정상적 권력관계의 단적인 사례다. 이러한 총수의 전횡적 지배 배경에는 내부적인 견제가 없다는 현실과 문제가 생겨도 외부에서 부과하는 제재가 실효성이 없다는 그 동안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총수에 대한 재판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2008년 10월 ‘삼성특검’을 받은 끝에 증권거래법위반죄 등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당시 법원이 무죄로 봤던 삼성SDS에 대한 227억 원에 이르는 배임죄가 유죄로 인정됐지만, 2009년 8월 다시 선고된 형량은 배임죄가 추가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었다. 이 회장은 단 하루도 구속되지 않았다.

    유전집유, 무전복역

    2014년 12월 11일 검찰 수사진이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뒤 압수물품을 들고 건물을 나서고 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900억 원대 회사 돈을 횡령하고 정의선 현대자동차 사장에게 경영권 승계를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계열사에 2100억 원대 손해를 입혔다. 이에 대해서도 2007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3·5제 정찰제 판결’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2001년 1월부터 2007년 6월까지 횡령·배임죄로 언론에 보도된 사건을 확인해봤다. 재산범죄 액수가 50억 원 이상일 때 적용되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횡령·배임죄의 경우 1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비율이 71.1%이다. 금액이 적을 때 적용되는 일반법인 형법상 횡령·배임죄의 경우인 41.9%보다 훨씬 높다. 항소심에 이르면 집행유예 비율이 83.9%로 더 높아진다. 이처럼 재산범죄 액수가 커질수록 실형이 선고되지 않는다는 것은 ‘법원이 기업인 범죄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세간의 인식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재벌 경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려면 외적 견제가 필요하다. 재벌 경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곧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다시 말해 법원이 경제를 위한다면 불법 경영을 한 총수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할 게 아니라 ‘신상필벌’을 해야 한다. 외부 통제가 느슨하면 내부를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재벌 총수는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는 권력이 되고, 그 부정적 결과는 국민에게까지 미친다. 경제 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에게 특히 엄벌이 필요한 이유다.

    내적 견제의 제도화

    법원의 재벌 총수 봐주기 판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18대 대통령선거 당시 여야 후보 모두의 공약이었다. 현재 국회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대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재산이득액이 300억 원 이상일 경우 집행유예를 받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다. 하지만 재벌 측 반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재벌 총수의 전횡을 막으려면 외적 통제의 강화와 더불어 내적 견제의 제도화도 필요하다. 재벌 회사 내부에 총수의 결정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사외이사제도가 있지만 총수 일가에 반대할 수 있는 사외이사가 선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총수 일가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난 임원이 선임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이것도 박 대통령의 대표적인 ‘경제민주화’ 공약이었는데, 역시 재벌 측 반대로 입법화되지 못하고 있다.

    재벌에 속한 대기업은 국민이 힘을 모아 띄워놓은 국민 경제의 큰 배다. 재벌은 국민 속에서 국민과 함께 배를 키웠고, 지금까지 운전해올 수 있었다. 총수 역시 그 배의 선장일 뿐, 국민이 만드는 규칙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국민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국민 다수의 합의사항이 제도화되는 과정을 경제력을 이용해 방해해선 안 된다. 경제력으로 입법을 막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한다.

    ‘땅콩회항’ 사건에서 보듯 비판이 불가능한 독단은 조직 자체를 뒤흔든다. 조직을 위해서도 건전한 견제와 비판의 제도화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재벌 총수 일가가 무소불위로 경제력을 남용하는 것은 국민 경제뿐 아니라 해당 재벌 자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음을 이제는 알 때가 됐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로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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