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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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북한식 냉면 늦봄을 점령하다

서울 물냉면

  • 박정배 푸드칼럼니스트 whitesudal@naver.com

    입력2015-05-04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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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면집의 광고하는 갈게발이 벌서 춘풍에 펄펄 날리’(1921년 4월 20일 ‘동아일보’)면 서울엔 냉면철이 돌아온 것이다. ‘아스팔트를 데운 더운 공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냉면집 처마 끝에 달린’ 깃발과 빙수가게 얼음 깃발이 흔들릴 때 서울 사람들은 냉면을 본격적으로 먹었다. ‘냉면의 나라’란 별칭까지 붙은 냉면의 본고장 평안도 사람들이 냉면을 겨울에 주로 먹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서울 냉면이 광복 이후 남한에 정착한 실향민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서울 냉면은 19세기 이미 외식으로서 전국적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유만공(柳晩恭·1793~?)이 서울 풍속을 적은 시집 ‘세시풍요’(歲時風謠·1843)에도 냉면이 등장한다. ‘냉면집과 탕반(湯飯·장국밥)집이 길가에서 권세를 잡고 있어, 다투어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마치 권세가 문전처럼 벅적인다.’

    조선 말기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1871) 춘명일사(春明逸史) 편에는 냉면과 관련된 순조 임금 이야기가 등장한다. ‘순묘(純廟·순조)가 초년(1800)에 한가로운 밤이면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로 면(麵)을 사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와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일제강점기 냉면은 대표적인 배달음식이었다. 서울 냉면집들은 추운 겨울에는 설렁탕을 팔았고 여름에는 냉면을 팔았다. 1945년 이후 북한 사람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서울 냉면집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평안도 사람이 차린 냉면집들은 맛도 좋았지만 실향민의 모임 장소로 자리매김하면서 장사가 월등하게 잘됐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명월관이란 고급 식당을 운영하다 서울로 내려온 장원일 씨는 중구 주교동에 ‘우래옥’을 차려 지금까지도 명성이 자자하다. 평양 외식 음식의 핵심인 불고기와 냉면을 잘한다. 메뉴에는 없지만 100% 메밀로 만든 순면은 ‘봉피양’ 방이점의 순면과 더불어 서울 냉면의 정점에 있다. 같은 평양 출신이지만 경기 의정부에 둥지를 튼 ‘평양냉면’의 자손들도 서울에서 냉면집으로 크게 성공을 거뒀다. 중구 을지로3가 ‘을지면옥’과 필동의 ‘필동면옥’은 자매간이다. 냉면 스타일도 비슷하다.



    남대문 ‘부원면옥’은 돼지고기 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다른 집 냉면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서울시청 뒤 ‘남포면옥’은 북한에서 주로 사용하던 동치미 국물을 기본으로 한 냉면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장충동1가 ‘평양면옥’은 직접 도정해서 뽑은 면발과 냉수처럼 맑고 진한 국물의 조화가 좋다. 마포구 염리동 ‘을밀대’는 정통 평양냉면과 거리가 멀지만 면발 상태가 좋다. 살코기와 사골 등 정통 냉면육수 재료에 채소가 들어가 개운한 맛이 난다. 채소의 단맛을 이용한 집으로는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근처 ‘서북면옥’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구 순화동 ‘강서면옥’은 양지머리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섞어 냉면을 낸다. 국물도 깔끔하고 면발도 빈틈이 없다.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깃대봉냉면’은 정통 냉면과 전혀 관계가 없지만 언제나 사람이 많다. 전분으로 만든 함흥냉면식 질긴 면발과 채소로 뽑아낸 국물에 매운 양념장을 넣어 먹는 서민형 물냉면이다.

    계절은 봄인데 날씨는 여름을 향하고 있다. 시원한 서울식 물냉면의 계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깔끔한 북한식 냉면 늦봄을 점령하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을밀대’ 냉면과 중구 을지로3가 ‘을지면옥’, 필동 ‘필동면옥’의 냉면(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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