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3

2015.04.13

잊힌 대일항쟁 역사 두만강 연추 창의소를 가다

대한제국 붕괴 후 임정 수립 때까지 대일투쟁 본부…역사 현장 발굴, 복원 시급

  • 블라디보스토크=이정훈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5-04-13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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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힌 대일항쟁 역사 두만강 연추 창의소를 가다

    안중근 의사의 흔적이 담겨 있는 연추창의소 자리를 찾아냈다고 설명하는 오명환 두만강개발유한공사 회장.

    광복 70주년이다. 우리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기려야 하는가. 기자는 일본에게 당한 36년을 ‘일제강점기’라부르는 것을 거부한다. 그 말에는 일본에 강제 점령당했다는 패배의식이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사교과서는 고려가 몽골에게 당한 100여 년을 ‘대몽(對蒙)항쟁기’라고 해놓았는데 왜 일본에 당한 시절은 대일(對日)항쟁기라 하지 못하는가. 그 시절 우리는 임시정부(임정)를 유지했고 가열찬 투쟁도 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는 두만강 하구에서 17km가량을 접하고 있다. 러시아는 두만강 접경 지역을 19세기 그 지역에 처음 들어온 러시아군 부대장의 이름을 따 하산 면(面)으로 명명했다. 러시아는 불법 월경 등을 막고자 국경 안쪽에 민간인 출입을 막는 철책을 쳐놓았다. 주요 국경 지역은 외국인 출입도 통제한다. 하산과 그 후방에 있는 크라스키노 면 등이 그에 해당한다.

    두만강 건너에서 다시 일어난 ‘창의(倡義)’

    오명환(69) 두만강개발유한공사 회장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두만강 하구지역 땅 일부에 대한 사용권을 받아냈다. 그 덕에 그가 보증하면 외국인도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있다. 오 회장이 사업 이상으로 몰두해온 것이 두만강 하구에서 우리 역사 찾기다. 그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가장 엄혹했던 시기의 대일항쟁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창의(倡義)’는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만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다. 그 뜻은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피살되자 전국적으로 창의대가 일어났다. 1905년 4월 동해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해 11월 17일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그러자 두만강 건너 러시아 땅에 있는 연추리에서 다시 창의가 일어났다. 연추(煙秋)는 러시아 마을 이름인 ‘노우키에프스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지금은 크라스키노 주카노바 리(里)에 해당한다. 이를 이끈 이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군과 시베리아철도 공사에 납품을 해 큰돈을 벌고 연추리에 살았던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최재형(崔在亨)과 1902년 고종에 의해 간도관리사로 파견됐던 이범윤(李範允·당시 훈련대장 이경하의 아들)이었다.

    연추 창의소가 운영한 의병조직이 ‘동의회(同義會)’다. 동의회에서 ‘우영장(右營將)’을 한 이가 안중근인데, 그는 중대규모인 300여 명의 병사를 지휘했다. 1908년 6~7월 동의회는 여러 부대로 분산돼 함경도로 진격했고 일본군 19사단과 격전을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안중근의 아명(兒名)이자 자(字)는 ‘응칠’이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수감된 그는 순한문으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란 자서전(국내에서 ‘안중근 의사 자서전’으로 출간)을 썼는데, 거기엔 ‘1908년 6월께 러시아령 연해주 연추의 의병창의소를 떠나 (중략)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는 내용이 있다.

    함경도 진공 실패로 동의회는 위축됐다. 그러자 안중근을 포함한 12인이 1909년 2월 7일 연추리에서 왼손 무명지(넷째 손가락)를 잘라 ‘대한독립’을 혈서로 쓴 다음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란 별도 조직을 만들었다. 유명한 단지(斷指)동맹이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등을 암살하기로 하늘에 맹세했다. 준비에 들어간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남만주철도의 종착점인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일본의 조사를 받게 된 안중근은 동의회를 ‘대한의군(大韓義軍)’으로 표현했다.

    그러한 투쟁에도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병합됐다. 기세가 오른 일본은 안중근이 나오게 된 러시아를 압박해 연추 창의소를 무력화하려 했다. 밀정을 넣어 창의소 지휘부에 대한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위협을 느낀 최재형은 훨씬 북쪽에 있는 우수리스크로 거처를 옮겼다.

    잊힌 대일항쟁 역사 두만강 연추 창의소를 가다

    연추 창의소가 주도한 함경도 진공 작전이 실패한 후 안중근 등 12명은 왼쪽 넷째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를 쓰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로 했다. 연추리에는 광복회가 세워 놓은 단지(斷指)동맹 기념비가 있다(왼쪽). 안중근이 러시아 정부가 보호해준 연추 창의소 출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간도로 거점 옮겨 독립투쟁

    중국 지린성에 있는 옌볜조선족자치주는 이전에는 간도(間島)라고 불렀다. 당시 우리 영역이던 간도에는 연추리보다 더 많은 동포가 살았다. 연추 창의소가 쇠퇴하자 창의운동 세력은 간도로 옮겨갔다.

    그러자 일본도 대비를 했다. 1907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상대로 정미칠조약(한일 신협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군대와 경찰, 사법부를 해산시켰다. 경찰 업무는 일본 경시청이 대신하게 했다. 그러니 일본 경시청은 우리 땅 간도에 파출소를 집어넣어 조선인을 단속할 수 있었다. 창의소 활동을 막은 것이다.

    그러던 일본이 1909년 정책을 바꿨다. 청나라가 건설하려 한 다롄-하얼빈 간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따내는 것이 더 유리하다 보고, 청나라에 간도 영유권을 주는 협약(간도협약·1909년 9월 4일 체결)을 맺은 것이다. 이 협약으로 간도는 청나라 땅이 됐지만, 간도에서 일본 경찰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창의소 활동은 오히려 활발해졌다. 간도 중심지인 용정은 독립투쟁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한일합병의 충격이 너무 커 본격적인 독립투쟁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1919년 2월 1일 용정에서는 독립운동가 39인이 서명한, 매우 투쟁적인 내용의 ‘조선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그날은 음력으로 기미년(己未年) 원단(1919년 1월 1일)이었다. 선언은 기미년 첫날에 했지만 준비는 전해인 무오년(戊午年)에 한 것이라, 이 선언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한 ‘기미독립선언’과 구분해 ‘무오독립선언’이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차례로 무오→2·8(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기미(3·1)선언을 하면서 다시 독립운동의 불을 붙였다. 최초로 불을 지핀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한 활동가의 다수가 연추 창의소 출신이었다.

    이들은 바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에서 각각 일본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이들은 서일(徐一)을 대장으로 한 대한독립군단으로 모여들었다. 대한독립군단의 규모는 3500여 명 정도였는데, 절반가량이 연추 출신이었고 한다.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 자유시인 스보보드니 일대에 주둔했다. 그때 이들을 맞은 것은 연추 창의소를 지원했던 ‘제정(帝政)러시아’와는 성격이 다른 ‘공산 러시아’(러시아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국가)였다. 러시아는 1917년 공산혁명을 치르면서 성격이 바뀌어 있었다.

    잊힌 대일항쟁 역사 두만강 연추 창의소를 가다

    2010년 오명환 두만강개발유한공사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은 연추 창의소의 터를 찾아온 북한 대표단을 만났다. 북한 대표단이 연추 창의소를 북한 정권과 연결하기 위해 김정일의 방문을 추진하려 했으나 오 회장이 이를 봉쇄했다고 한다.

    상하이 임정 재무총장 추대된 최재형

    일본은 그러한 러시아를 상대로 ‘왜 조선 독립군을 숨겨주느냐’며 맹공을 가했다. 혁명에 성공하긴 했으나 기반이 취약한 공산 러시아는 일본에 굴복했다. 러시아는 대한독립군단의 무장을 해제하겠다고 약속하고 1921년 6월 22일 행동에 들어갔다. 이에 대한독립군단 일부가 반발하자, 공격을 했다. ‘자유시사변’으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됐다.

    그러는 사이 중국 상하이에서 새로운 싹이 텄다. 3·1운동 영향으로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정이 만들어진 것. 연추 창의소를 이끌었던 최재형은 임정의 재무총장(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추대됐는데, 이는 연추의 정신이 임정으로 이어졌다는 증거가 된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이상설을 정사로,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보냈으나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비분강개한 이준은 자살을 했다. 졸지에 낭인이 된 이위종과 이상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망명객이 된 이들을 받아준 것이 최재형이 이끈 연추 창의소였다.

    이상설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 정부’(초대 의장 이상설)를 만들었다. 1919년 9월 6일 상하이 임정은 1차 개헌을 통해 이 정부를 통합했다. 러시아의 독립운동 세력도 흡수한 것이다. 연추에서 시작된 창의소는 대한독립군단 등을 거쳐 대한민국임정에게 세력을 넘기고 소멸돼갔다.

    연추 창의소 복원의 역사적 의미

    오명환 회장은 연추리에 있던 최재형의 집터와 창의소 건물터 등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광복 70주년인 올해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러시아와 협의해 안중근 의사를 배출한 연추 창의소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이러한 비화를 털어놓았다.

    “상하이 임정의 정통성이 우리에게 이어졌기 때문에 북한은 정통 찾기에 부심하고 있다. 내가 연추 창의소의 터 등을 찾아냈다는 것이 알려지자 북한이 관심을 보였다. 2010년 북한 관계자들이 찾아와 그 터를 보자고 했다. 2011년 김정일은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는데, 그때 그곳을 방문하는 이벤트를 만들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러시아 측에 김정일의 연추 방문을 허락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해 관철시켰다. 그 일로 한동안 나는 북한으로부터 테러 위협을 받아 몸을 숨겨야 했다. 연추 창의소 발굴과 복원은 정통성을 가진 우리 정부가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두만강 하구에는 고인돌이 즐비하다”는 증언도 했다. 발해의 유적과 윤관을 통해 여진족을 정벌한 고려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도 적잖다고 했다.

    광복 70년, 대일항쟁이란 용어를 되살리며 우리의 숨은 역사가 살아 있는 두만강을 러시아와 협의해 발굴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하는 것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하면서 북한을 변화케 해 통일을 만드는 ‘또 하나의 뒷문’을 여는 조용한 노력일 수도 있다.

    연추 창의소가 있던 두만강 너머 땅

    베이징조약으로 빼앗긴 연해주…남북통일 후 한·러 간 영유권 분쟁 가능성도


    잊힌 대일항쟁 역사 두만강 연추 창의소를 가다

    두만강 하구 러시아 쪽 지도를 찍은 사진. 두만강과 녹둔도, 연추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오명환 두만강개발유한공사 회장은 두만강 하구에 고인돌이 즐비하다는 증언도 했다.

    러시아와 우리 정부는 두만강 하구를 국경으로 한다고 합의한 적이 없다. 우리가 두만강 하구에서 17km가량 러시아와 접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중국 때문이다. 청나라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을 맺으면서 극동 지역을 뭉텅뭉텅 러시아에 내줬다.

    베이징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두만강 너머 연해주를 러시아에 할양해버린 것. 두만강 하구 건너편은 우리 선조들이 나가 살고 있는 우리 영역인데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일본이 간도협약으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줬다면, 청은 베이징조약으로 우리 땅인 두만강 하구 건너를 러시아에 넘겨준 혐의가 있다.

    두만강 하구 건너편이 우리 영역이었다는 것은 많은 자료가 증명한다. 명나라 시절 중국은 두만강까지 진출하지 못했다. 그곳에는 조선족과 여진족이 어울려 살았다. 고려시대 윤관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쌓은 9성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두만강 하구였다. 윤관이 쌓은 공험진 등은 두만강을 건너 한참 북상한 곳에 있었으니, 고려가 두만강 건너를 경략한 것은 분명하다.

    조선도 같은 길을 걸었다. 조선 전기 세종 때 김종서는 두만강 하구에 6진을 쌓았는데 그중 하나가 두만강 하구에 만든 경흥도호부다. 그리고 두만강 건너 ‘녹둔도(鹿屯島)’에 경흥도호부의 통제를 받는 요새를 만들었다.

    녹둔도는 ‘사슴궁둥이’를 뜻하는 ‘녹둔(鹿臀)’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도’의 A 지점에는 노루꼬리 같은 짧은 반도가 튀어나와 있고 해안선이 사슴궁둥이처럼 둥그스름하다. 그리고 남쪽으로 두만강, 북으로는 이름 없는 샛강이 있어 섬이 됐다(엉덩이 둔(臀)을 주둔할 둔(屯) 자로 바꿔 표기하게 됨). 넓이는 서울 여의도의 4배인 13.22km²(400여만 평)가량이다.

    녹둔도에는 ‘조산(造山)’이라는 곳이 있다. 만호(萬戶)는 전방 지역의 행정과 국방을 책임진 무장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흥도호부에는 요새가 두 곳 있는데 그중 하나가 조산포다. 조산포에는 싸움배를 정박해놓고 만호가 배 타는 병사 90명을 거느리고 지킨다’고 밝혀 놓았다.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조산 만호는 이순신이었는데, 여진족의 습격을 받아 많은 부하를 잃었다. 이 때문에 모든 벼슬을 잃고 백의종군하는 강등을 당한 바 있다.

    청은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기에 명나라와 달리 처음부터 만주를 지배했다. 그리고 만주를 ‘청황실의 발상지’라 해서 사람이 들어가 살지 못하게 봉금(封禁)을 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등을 통해 청에 굴복한 바 있어 이를 지켰다. 그러나 두만강 하구는 봉금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포시에트 우웨즈지보에서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조선인 마을터가 다수 발견된 것으로 확인된다.

    비석도 여러 개 발견됐는데 그중에는 1778년을 가리키는 한자가 새겨진 것이 있다. 관찰사를 지낸 이의 묘비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이 산 동헌(東軒)터도 나왔다. 1778년 전후 그곳에 조선인이 살았고, 조선 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해 이들을 다스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811년 홍경래의 난 직후에도 수만 명이 건너갔다. 우웨즈지보는 녹둔도는 물론이고 연추리보다 동북쪽으로 더 위에 있다.

    ‘지도’에서 보듯 녹둔도에서 15km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주카노바가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연추리다. 주카노바에서 동쪽으로 6km가량 가면 우웨즈지보가 나오는데, 그곳이 18세기 조선인이 살았던 곳이다. 연추 창의소가 운영되던 시절 그곳에 많은 조선인이 살았는데, 그때 조선인이 그곳을 ‘지신하(地新河)’라고 불렀다는 것이 오명환 두만강개발유한공사 회장의 설명이다.

    임진왜란 전에는 녹둔도에 최전방 요새가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에는 동북으로 훨신 더 위쪽에 조선인 마을과 동헌이 있었으니, 조선이 두만강 건너를 경략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청나라가 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맺어 마음대로 이곳을 러시아에게 줘버렸다.

    북한은 이를 인정했다. 1985년 4월 소련과 ‘두만강 하구를 국경으로 한다’는 협정(국경협정)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그러한 협정을 소련이나 러시아와 맺은 바가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주도로 통일이 되면 우리는 간도를 놓고 중국, 두만강 하구 너머를 놓고 러시아와 분쟁을 할 수도 있다. 두만강 너머에는 우리 선조의 역사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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