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0

2015.03.23

붉게 물드는 내 안의 ‘자유의지’를 보다

이모작 인생, 딸기꽃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입력2015-03-23 1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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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게 물드는 내 안의 ‘자유의지’를 보다
    딸기를 떠올리면 입에서 침부터 고인다. 고 새콤달콤함이란! 시골에 집을 짓고, 이듬해 봄 아내는 앞뜰에 딸기를 심었다. 아이들이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그때그때 열매를 따 먹으라고. 딸기는 땅이 척박한 곳인데도 제법 잘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물론 그 비결은 아들 녀석이 짬짬이 오줌을 눈 덕분이긴 하지만. 앞뜰에 심은 딸기라 아무래도 자주 보게 된다. 자연스레 나는 딸기와 친해졌다. 언제 꽃이 피는지, 어떤 곤충이 날아드는지, 지는 모습은 어떤지….

    납작 엎드려 칼바람 추위에 맞서는

    딸기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웬만한 칼바람 날씨에도 얼어 죽지 않고, 땅에 납작 엎드려 추위를 이겨낸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동전만한 잎을 붉게 바꿔가며 혹독한 자연에 적응한다. 그러다 봄이 되고 땅이 녹았다 싶으면 잎을 푸르게 새로 내고, 뿌리를 뻗어 새 삶을 시작한다. 하루하루만 보자면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보름만 지나도 눈에 띄게 달라진다.

    봄비라도 흠뻑 맞으면 그 푸름과 싱그러움이 춤이라도 출 듯하다. 붉었던 빛은 다 사라지고, 어느새 꽃봉오리를 슬그머니 내민다. 그리고 또 며칠 지나면 하얀 꽃을 소박하게 피운다. 자신에게 언제 칼바람 추위가 있었느냐는 듯이. 이윽고 곤충이 날아들고 수정을 한다. 대규모 시설에서 딸기를 키울 때는 수정 벌을 사람이 일부러 넣어준다. 하지만 자연 그대로 자라는 우리 집 딸기한테 날아드는 곤충으로는 하늘소붙이류가 자주 보인다. 가끔 나비도 날아든다. 그런데 딸기는 이런 곤충의 도움 없이도 수정할 수 있다. 바람이 있어도 좋고, 이 바람마저 없으면 제꽃가루받이를 할 수도 있단다.

    자연 상태 가깝게 자라는 딸기는 대부분 봄에 꽃을 피운다. 4월 초 정도면 꽃이 피기 시작해 5월이면 열매가 붉게 익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딸기는 5월과 6월이 제철이다. 그런데 이 딸기라는 녀석은 제철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호시탐탐 꽃 피울 기회를 노린다. 생육 환경이 좋지 않을 때 더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리하여 여름에 꽃을 피우는 녀석도 있고, 가을에 피우는 녀석도 있으며, 심지어 서리를 맞고도 피우는 녀석이 있다. 비록 광합성을 제대로 못 하고, 기온이 낮아 씨를 맺지 못할지라도 사랑만은 나누고 싶어 한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이유는 자식을 남기기 위해서겠다. 그런데 딸기는 조금 극적이다. 열매를 웬만큼 맺었다 싶으면 이제 기는줄기(runner)를 낸다. 이 기는줄기는 어미로부터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다 적당한 곳에 뿌리를 내려 독립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딸기는 딸기 나름의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자유의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무척 소중하다. 무언가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고, 때로는 설레는가. 자유의지는 곧 선택을 뜻한다. 사람은 대부분 직업을 선택하고, 연인을 선택하며, 결혼을 할지 말지를 선택한다. 어디 그뿐인가.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거의 다 선택이라 하겠다. 아침에 무얼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이리로 갈까, 저 길로 갈까. 누굴 만나 무슨 말을 할까. 이 모든 게 선택이다. 이때 남들과 똑같은 걸 하더라도 이를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복받은 삶이라 하겠다.

    붉게 물드는 내 안의 ‘자유의지’를 보다

    딸기꽃과 기는줄기(왼쪽). 영하 13도 눈 속에서 자라는 딸기.

    딸기도 여행을 떠난다?

    붉게 물드는 내 안의 ‘자유의지’를 보다

    딸기크레페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 한곳에 뿌리 내리고 평생을 살아가는 식물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 사람 기준으로 보자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딸기는 자기만의 여행을 떠난다. 어떻게. 기는줄기로! 이때 딸기는 그야말로 ‘runner’다.

    씨앗은 어미 마음대로 떨어뜨리기 어렵지만, 기는줄기는 어느 정도 딸기 스스로 정해서 나갈 수 있다. 자신의 종을 위해, 딸기끼리 치열한 경쟁은 되도록 피하고, 피할 수 없다면 서로 알맞은 공간을 선택해 줄기를 뻗어간다. 그러다 이 정도쯤이면 좋겠다 싶은 곳에 뿌리를 내려 어미로부터 독립해 새 삶을 살아간다.

    자, 이쯤이면 딸기 인생은 이모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인생은 꽃을 피워, 수정을 하고, 열매를 맺는 삶이다. 사람으로 보자면 남녀가 부부 인연을 맺어 자식을 남기는 거다. 이때는 되도록 곤충의 도움을 제때 잘 받아야 열매가 고루 붉게 익는다. 그렇지 않으면 한쪽으로 말려 특이하게 영근다.

    하지만 열매를 남긴 다음, 딸기는 두 번째 인생을 산다. 배우자나 중매쟁이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며, 여기다 싶은 곳에서 새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 새 딸기는 어미 자신과 똑같은 유전형질을 갖는다. 생물학 용어를 따오자면 무성생식의 하나인 영양생식이다. 이모작 인생은 배우자가 없어도 온전한 삶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쯤에서 딸기 한살이는 우리네 삶과 다시 겹친다. 요즘 우리 사회 중·장년층도 인생 이모작이 삶의 화두다. 인생은 길고, 할 일은 많으며, 하고 싶은 일은 더 많은 세대. 딸기는 우리에게 말없이 용기를 준다. 붉은 딸기를 먹을 때면 내 안의 자유의지도 붉게 물드는 걸 느낀다.

    *딸기 : 남아메리카가 원산인 장미과 여러해살이풀. 한국에는 1900년대 초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에 꼬불꼬불한 털이 있으며 잎자루가 길다. 잎은 뿌리에서 나오고 작은 잎이 3개씩 달린다. 꽃은 꽃줄기에서 4~5월 흰빛으로 피며, 작은모임꽃차례(취산화서)를 이룬다. 우리가 먹는 열매는 씨방이 아니라 꽃받침이 자란 것이다. 현재 딸기는 육종 기술이 발달해 종류가 아주 많다. 꽃말은 애정,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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