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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불려 나온 과거, 오늘을 노래하다

‘복고주의’ 속에 담긴 성장과 풍요에 대한 동경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불려 나온 과거, 오늘을 노래하다

불려 나온 과거, 오늘을 노래하다

1990년대 인기 가수들이 당시 의상을 입고 그 시절의 히트곡을 불러 큰 인기를 모은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 :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한 장면.

1월 10일 오후 서울 마포의 한 선술집에는 30, 40대가 가득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응사)에서 주인공 나정과 칠봉이 술잔을 기울이던 곳이다. 주인공이 앉았던 자리에는 올해 갓 마흔이 된 95학번들이 앉아 있었다. 신촌에서 대학시절을 보낸 이른바 ‘응사세대’인 이들은 자신의 20대를 추억하고 싶어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21세기 첫 10년은 미래로 넘어가는 문턱이 아니라 ‘재(re-)’ 시대였다. 끝없는 재탕과 재발매, 재가공, 재연의 시대이자 끝없는 재조명의 시대였다.’

영국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서 이렇게 평했다. 이 말은 오늘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되는 듯 보인다. 새해 벽두부터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미래’ 대신 ‘과거’가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조명’ 열기가 가장 뜨거운 곳은 영화계다. 1월 13일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한 ‘국제시장’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서사시다. 주인공 윤덕수(황정민 분)는 6·25전쟁통에 아버지를 잃고, 독일의 광산 막장에서 젊음을 보내며, 베트남 전장에서 ‘불구의 몸’이 되는 인물. 14일 개봉과 동시에 예매순위 1위를 차지하며 화제몰이를 시작한 영화 ‘허삼관’ 역시 6·25전쟁 직후의 가난한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다. 21일 관객과 만나는 ‘강남 1970’은 1970년대 서울 강남을 다루고, 2월에는 역시 1970년대 청춘들의 꿈과 사랑을 노래하는 영화 ‘쎄시봉’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가요계엔 1990년대가 넘실댄다. MBC 간판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이 방송한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의 영향이다. 1990년대 인기 예능프로그램 ‘토토즐’(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제목을 따오고, 그 시절 가수들을 불러 모은 이 프로그램은 1월 3일 순간 시청률 35.9%(TNmS 기준)를 기록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그때 그 사람들’뿐 아니라 당대의 의상과 무대, 다소 투박한 연출방식까지 고스란히 ‘재연’한 것이 주효했다.



과거를 부르는 이유

불려 나온 과거, 오늘을 노래하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아버지 세대를 조명한 이야기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

‘토토가’ 후폭풍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각종 음원 차트에선 1990년대 가요가 인기몰이 중이고, 당대 가수들이 출연하는 ‘백 투 더 나인티스 빅쑈(BACK TO THE 90’s Big Show)’ 등의 공연도 잇따라 막을 올린다.

이런 현상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 ‘비열한 거리’(2006) 등을 통해 줄곧 과거 우리 사회의 뒷골목 풍경을 그려온 유하 감독은 신작 ‘강남 1970’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향수하는 영화는 늘 있었다”고 했다. 근래에도 2011년 개봉한 영화 ‘써니’가 40대 중반이 된 여고 동창생 7명의 학창시절 회고담으로 관객 700만 명을 동원했고, 이듬해엔 30대 중반의 남녀가 대학시절 첫사랑과 조우하는 내용의 영화 ‘건축학개론’이 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화제를 뿌렸다. 두 영화의 배경은 각각 1980년대 중반과 1990년대 중반이다. 지난해엔 1990년대 중·후반을 다룬 ‘응답하라 1994’가 케이블채널 드라마로는 이례적으로 시청률 10%를 넘어서며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영화나 드라마 안에서 조명한 특정 세대뿐 아니라 현재의 주요 문화소비층인 20, 30대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는 점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이에 대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콘텐츠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되살리고, 젊은 세대한테는 현실 도피처 구실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써니’의 홍보 문구가 ‘가장 찬란한 순간 우리는 하나였다’인 것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건축학개론’ 역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문구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꼭 1년 전 1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 속의 1980년대 중반 풍경도 마찬가지다. 김지미 영화평론가는 영화 ‘변호인’이 대중의 사랑을 받은 요인 중 하나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 것을 꼽았다. 노동판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던 상고 출신 청년이 변호사로 출세해 자신이 지은 아파트를 웃돈까지 주고 살 수 있던 시대,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던 시대에 대한 동경이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는 이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과거의 모습은 대개 사실적 경험이라기보다 현재의 필요에 따라 편집, 가공하고 추상화한 것이라는 데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태지호 호서대 겸임교수는 아예 “‘기억은 과거를 매개로 현재 구성원들이 소통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억에 대한 논의는 그것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관점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게 태 교수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대중매체에서 옛이야기가 넘쳐난다는 점 자체가 아니라 각각의 콘텐츠가 불러 올리는 과거의 기억이 무엇인지가 된다.

많은 평론가는 영화 ‘국제시장’이 대중을 사로잡은 것은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아버지도 없이 자란 주인공이 개인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식구를 건사하는 게 가능했던 ‘성장과 기회의 시대’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존재에 대한 동경, 즉 이제는 볼 수 없는 ‘책임감 있는 아버지’에 대한 희구 역시 이 영화의 인기 요인으로 꼽는다.

풍요로운 상상 속의 황금시대

불려 나온 과거, 오늘을 노래하다

2월 개봉 예정인 영화 ‘쎄시봉’은 음악다방을 배경으로 펼쳐진 1970년대 청춘들의 삶과 사랑을 그렸다.

1990년대를 담은 문화 콘텐츠의 인기를 설명하는 키워드 역시 ‘풍요’다. 마포 선술집에서 만난 ‘응사세대’ 김정은 씨는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90년대 중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희망적이었다. 그 시절 음악을 들으면 미래가 넓고 밝게 그려지던 때를 떠올리게 된다”고 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도 “그 시절에는 ‘88만원 세대’나 ‘미생’이 없었고,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로 무장한 X세대가 젊음을 누렸다”고 했다.

그러나 이처럼 불과 10여 년 전 과거까지 추억의 대상으로 삼아 소비하는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우디 앨런 감독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시간을 여행해 자신이 꿈꾸는 황금시대인 1920년대 파리에 도착한 주인공을 통해 노스탤지어의 허상을 꼬집는다. 이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1920년대에 살면서 1890년대를 동경하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결국 1890년대로 떠나버리는 여인에게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1890년대에 머물면 그때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 상상 속의 황금시대를 동경하겠죠.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러운 것. 삶이 원래 그런 거니까요.”

이런 끝없는 반복을 피하려면 오늘날 대중이 불러온 과거의 열망을 바로 여기 현재의 삶에 투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주간동아 2015.01.19 972호 (p60~61)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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