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7

2014.12.15

역대 권력 “돈줄은 못 내놔”

초대 정부부터 ‘주인 없는 은행’ 쥐락펴락 관치금융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4-12-15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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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권력 “돈줄은 못 내놔”

    1972년 8월 3일 ‘8·3 사채동결조치’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는 경제부처 장관들. 왼쪽부터 남덕우 당시 재무부 장관,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 이낙선 상공부 장관(왼쪽).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가운데)가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됐음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이경식 당시 한국은행 총재, 오른쪽은 미셸 캉드쉬 IMF 총재.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2003년 말 터진 신용카드 사태 때 김석동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이 한 말이다. 당시 이 발언은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한국 금융사에서 ‘관치금융’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승만 정부 때부터 ‘관’은 줄곧 금융에 개입했고, 사실상 ‘통치’했다.

    ‘대한민국 머니 임팩트’(비전코리아)의 윤광원 저자는 이 책에서 1958년 11월 20일 열린 제30회 국회 재경위원회 3차 회의 내용을 소개한다. 당시 양일동 의원은 “옛날에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요새 떠도는 말을 들으면 봉이 김선달이 아닌 문창숙이라는 사람이 목포 앞바다 물을 팔아먹고 있습니다”라며 폭로를 시작한다. 책 내용은 이렇다.

    ‘산업은행은 (문창숙이 운영하는) 척방염전에 염전개발자금으로 당초 3억 환을 대출해줄 계획이었으나 척방염전은 설계 변경을 통해 5억 환을 대출받았다. 게다가 이후 4억 환이 더 대출될 예정이었다. 담보는 전혀 없었다. 있다면 바닷물과 갯벌뿐이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거액 대출이 이뤄지게 한 것은 융자를 해주라는 전매청의 추천서 달랑 한 장이었다.’

    이 건만이 아니었다. 야당은 이외에도 막대한 ‘눈먼 돈’이 얼토당토않은 기업에 대출된 여러 사례를 제시하며 정부를 추궁한다. 저자에 따르면 김현철 당시 재무부장관이 결국 내놓은 답변은 “솔직히 큰 기업 하시는 분들이 자유당에 가까이 가려고 선을 대고 있지 않나 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융자가 상당히 나간 걸로 봅니다”였다.



    한은은 재무부 남대문출장소

    박정희 정부 출범 후 금융에 대한 ‘관’의 통치는 더욱 심화된다. 1950년 5월 5일 제정 공포된 한국은행법은 최소한 법규범으로나마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했다. 한국은행(한은)은 독자적인 통화신용정책과 은행감독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61년 12월 박정희 정부는 한은이 갖고 있던 외환 관련 기능을 대폭 정부로 이관하는 내용으로 법을 개정한다.

    또 통화정책을 결정하던 금융통화위원회 명칭을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 바꿔 위상을 낮추고, 이 위원회 결정사항에 대해 재무부 장관이 재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신설한다. 한은 내에서 은행감독업무를 수행하는 은행감독원 관련 조문에도 재무부 장관에 대한 보고조항을 만들었다.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게 된 이유다.

    이후 정부는 은행을 창구로 사실상 경제 전반을 진두지휘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이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민간기업의 자금 조달 및 운용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했다”고 설명한다.

    1972년 박정희 정부가 단행한 8·3 사채 동결조치는 관치금융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대기업의 무분별한 자금조달로 부실 규모가 커지자 정부가 직접 나서 모든 기업의 사채 지급을 동결했다. 그리고 사채를 월이자 1.35%에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전환하거나, 아니면 기업에 대한 출자로 전환하도록 강제한다. 이 조치로 사채시장은 사실상 붕괴했고 기업의 자금원은 은행, 그 뒤에서 실질적으로 대출 여부를 결정하는 정부로 수렴됐다. 대기업은 유동성을 확보하려면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됐고, 금융기관은 정부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수족’으로 전락했다. 2012년 9월 열린 학술대회 ‘역사가, 유신 시대를 평하다’에서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8·3 조치는 부실기업에 면죄부를 주고 그 부담을 국민에게 넘긴 상황에서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준 조치”라고 지적했다.

    관치금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폐해가 적잖았다는 점이다. 김상조 교수는 “특히 은행의 대출심사 기능에 대한 제약, 정부가 주도한 카르텔에 의한 은행 간 경쟁의 제한, 부실채권의 투명한 처리에 대한 제약 등은 우리나라 은행산업 발전 자체를 저해하는 걸림돌이 됐다”고 지적했다.

    전삼현 숭실대 교수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금융시장 성숙도는 세계 80위, 금융 건전성은 122위에 불과하다. 은행 경쟁력을 나타내는 ROA(총자산이익률) 역시 인도네시아(2.75%), 말레이시아(1.70%)에도 못 미치는 0.38% 수준”이라며 이런 상황을 초래한 근원으로 관치금융을 꼽았다.

    금융기관 인사에 영향력 행사

    역대 권력 “돈줄은 못 내놔”

    2000년 전국금융노동조합이 ‘금융지주회사법 제정 저지와 신관치 철폐’를 주장하며 은행 총파업을 선언한 당시 이용득 위원장(오른쪽)이 관계자들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회 민주화와 더불어 관치금융 해소를 위한 노력이 계속돼왔다. 1994년 5월 경제학자 41명이 중앙은행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이듬해 2월에는 시민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경제학자 1054명이 서명한 성명을 또 발표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힘겨루기 속에 표류하던 한은 독립은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비로소 이뤄졌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은 “국제통화기금(IMF)은 당시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관치금융을 지적하고 우리 정부에 이를 해소할 시스템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 독립, 감독기관 재편 등이 실행됐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후에도 관치금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융기관 인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 논란이 반복됐고, 갖가지 정책금융이 은행 부실을 야기한다는 비판도 계속됐다. 오 회장은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금융정책을 담당하는 금융위원회가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을 통할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처럼 정책 기관이 감독기관의 상위기구로 존재하는 한 관치금융이 사라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삼현 교수는 “현재 금융기관 대부분이 ‘주인 없는 회사’라는 점도 관치금융 논란이 반복되는 이유”라며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은행은 대부분 예금보험공사, 국민연금 등이 지분의 상당 부분을 갖는, 사실상 정부 소유가 됐다. 이런 소유구조 아래서는 결코 관치금융이 해소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금융 현장에서도 관치금융이 여전하다는 의견이 많다. 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교수는 2012년 발표한 논문 ‘외환위기 이후 정실자본주의의 제도적 기반 : 예비적 고찰’에서 전직 관료 및 은행과 기업 경영진 등을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 결과를 소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정부의 금융기관 인사에 대한 영향력 여부를 평가하는 질문에 응답자 22명 중 20명이 ‘표면적으로는 감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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