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1

2014.11.03

눈 뜨면 중세의 정취 눈 감으면 추억으로 간다

동유럽 4개국 기차여행

  • 체코 프라하=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14-11-03 11:2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왜 기차를 타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를까. 기차는 앞으로 가는데 생각은 자꾸만 과거로 향한다. 그 어떤 곳을 가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게 되는 공간. 그래서 중년일수록 버스보다는 기차여행을 선호하는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과거 유적지를 보러 떠나는 여행은 기차가 제격이다. 기차를 타면 당연히 걷게 되고, 걸으면 생각에 잠기게 된다.

    요즘 케이블채널 프로그램 ‘꽃보다…’ 시리즈의 흥행으로 동유럽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떠나는 중년이 적잖다. 아직도 관광버스를 타고 떠도는 이른바 ‘합숙 버스여행’이 대세지만 생활영어가 조금이라도 가능한 이라면 기차여행을 권하고 싶다. 중세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유럽 도시의 과거 속으로 기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여행 그 자체가 나를 위한 ‘위로’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비용도 많이 비싸지 않다. 유레일(Eurail) 패스(Tips 참조)를 이용해 자신의 여행기간과 여행국가(도시)를 지정하고 한데 묶으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시간, 횟수와 관계없이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 최근 대한항공의 체코항공 지분 인수(44%)로 체코 프라하로 떠나는 비행기 편이 많아지고 서비스도 좋아져 중년의 동유럽 배낭여행이 더욱 쉬워졌다(Tips 참조). 이번 동유럽 기차여행의 목적지는 4개국 6개 도시. 체코 프라하와 플젠, 쿠트나호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오스트리아 빈 순이다.

    ■ 체코 프라하

    동유럽 4개국 기차여행의 출발지는 체코 프라하다. 프라하공항에 내리면 대한항공의 체코항공 지분 인수의 영향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역만리 외국 공항에서 한글로 된 안내 문구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인으로서 긍지(?)가 느껴진다. 프라하는 눈으로 스쳐봐도 열흘이 걸릴 만큼 명소가 많다. ‘유럽의 심장’ ‘모든 도시의 어머니’ ‘백탑의 도시’ ‘황금의 도시’ ‘마법의 프라하’ ‘건축의 성지’ 등 프라하를 수식하는 어구만 수십여 개에 달한다.



    하지만 관광객 대부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면 사흘, 짧으면 하루. 그렇다면 일단 ‘프라하의 심장’이라는 구시가 광장으로 향해야 한다. 프라하 성에서 카를 다리, 구시가 광장, 화약탑에 이르는 이른바 ‘왕의 길’ 구간을 가봤다면 프라하 여행의 절반은 한 거다. 실제 중세 왕의 대관식 행렬이 지나던 이 구간은 하루 종일 걷는 게 힘들긴 해도 걷지 않으면 숨겨진 프라하의 보배인 도심 골목길의 아름다움을 놓치기 십상이다. 살이 쭉쭉 빠지는 건 덤이다. 하루 종일 걸은 뒤 저녁에 마시는 ‘맥주 종가’ 체코 맥주의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프라하의 13개 관문 가운데 하나로 그 꼭대기에 서면 프라하 시내가 모두 보이는 화약탑에서 구시가 광장까지 이어지는 첼레트나 거리는 중세 때나 지금이나 명품 상점이 즐비하다. 광장에 도착하면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앞에 운집한 관광객에 놀란다. 매시 정각에 12사도의 반신 목각상이 나타나는 장면을 보려면 매시간 10분 전 도착해 바로 앞에 미리 앉아 있는 게 좋다. 광장을 둘러싼 골즈킨스키 궁전, 틴 성모 교회 등 중세 건물들은 각 시대를 반영한 건축 양식으로 ‘건축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회랑 아래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하며 광장 주변에 있는 건물과 바삐 움직이는 관광객을 구경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광장을 빠져나와 이어지는 카를 다리(520m)는 온갖 영화와 드라마의 무대가 된 곳으로, 처음인데도 마치 언제 와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난간에 설치된 30개 조각과 거리의 악사는 그 자체로 예술이고 영화다. 황혼이 들기 시작하면 카를 다리에서 바라본 프라하 성과 블타바 강에 비친 중세 유적의 야경을 찍으려고 관광객이 모여든다. 카프카의 소설 ‘성(城)’의 모티프가 됐다는 프라하 성은 870년 만들어져 현재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고 있으며, 성내에 자리한 성 비투스 대성당은 925년 짓기 시작해 1000년 만인 1929년 완공됐다.

    눈 뜨면 중세의 정취 눈 감으면 추억으로 간다

    체코 프라하 카를 다리에서 찍은 프라하 성 아침 풍경.

    ■ 체코 플젠, 쿠트나호라

    체코 프라하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여를 가면 플젠이라는 도시가 나온다. 체코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맥주인 필스너 맥주회사가 자리 잡은 곳으로, 도시 자체가 맥주 때문에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95년 맥주를 만들기 시작해 1842년부터 필스너라는 상표가 붙었다. 1인당 1만 원 정도를 내면 지하 저장고에서 미정제 맥주를 맛볼 수 있는데 그 맛이 정말 일품이다.

    역시 프라하에서 기차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쿠트나호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골마을로, 13세기 엄청난 양의 은이 매장된 광산을 개발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고딕 양식의 성 바르바라 대성당과 붉은색 지붕의 중세 건물들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작고 한적한 마을이지만 바쁜 여정에서 꼭 한 번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갈 만한 도시다. 쿠트나호라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 4만 명의 해골과 뼈로 장식된 ‘해골성당’이다. 앞을 못 보는 한 수도사가 그 지하에 14세기 이후 흑사병과 각종 전쟁으로 사망한 이들을 추모하고자 그들의 해골과 뼈로 다양한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눈 뜨면 중세의 정취 눈 감으면 추억으로 간다

    체코 쿠트나호라의 해골성당(왼쪽). 체코 플젠의 필스너 맥주회사 지하 저장고.

    ■ 헝가리 부다페스트

    동유럽 기차여행을 체코 프라하에서 시작한 경우 야간 침대열차를 이용하면 숙박비를 줄이고 이동시간을 아끼는 1석2조 효과를 볼 수 있다. 프라하에서 밤 11시 45분 기차를 타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오전 8시 35분 도착한다. 침대칸의 경우 취침 전 반드시 문을 거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오랜 세월 받아왔지만 ‘동유럽의 파리’라고 부를 정도로 곳곳에 명소가 자리해 있고, 쇼핑 천국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 무대로도 유명하다. 여행 일정상 하루 정도밖에 시간이 안 된다면 다뉴브 강(도나우 강) 유람선부터 타보기를 권한다. 다뉴브 강을 중심으로 양쪽에 펼쳐지는 풍경, 특히 야경이 환상적이다. 유람선에선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흘러나오고 무료로 나오는 헝가리 와인은 주변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유람선을 타고 가다 내려 헝가리 건축사가 집대성된 국회의사당과 다뉴브 강 8개 다리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세체니 다리를 들러볼 수도 있다. 13세기에 지은 부다 왕궁은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건물로, 그곳 국립미술관에는 11세기 이후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좀 더 내려오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뾰족하게 지은 어부의 요새가 나온다. 그곳 탑 위에 서면 다뉴브 강변의 건물과 헝가리 평야를 감상할 수 있다.

    트랩이나 버스를 이용해 시가지 내에 자리 잡은 마차시 사원과 치타델라 요새, 영웅광장 등을 구경한 후 꼭 들러볼 곳이 있다. 바로 우리의 명동 거리에 해당하는 바치 거리다. 보행자만의 거리인 이곳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데, 야외 노점에서 파는 전통 먹거리들이 특히 맛있다. 한국사람 입맛엔 좀 짠 게 흠이라면 흠이다.

    눈 뜨면 중세의 정취 눈 감으면 추억으로 간다

    다뉴브 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 전경.

    ■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눈 뜨면 중세의 정취 눈 감으면 추억으로 간다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성 야경(위). 브라티슬라바 구시가지의 스토리텔링 조각상 맨홀 맨.

    부다페스트에서 체코 방향으로 2시간 40분여를 달리면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가 나온다. 오스트리아와 인접해 있고, 물가가 상대적으로 싸 이곳에 숙소를 정하면 인접국을 여행하기 편하다. ‘유럽의 배꼽’이라 부르는 슬로바키아는 오랫동안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오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됐고, 1993년 1월 분리돼 독립을 쟁취했다.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펼쳐진 초원과 농촌의 일상은 중세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브라티슬라바 역에 도착한 후 첫인상은 동유럽 주요 도시보다 조용하고 개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특히 구시가지는 전깃줄만 없으면 그냥 중세 도시다.

    도시 랜드마크는 높은 언덕에 위치해 구시가지가 훤히 보이는 브라티슬라바 성이다. 성 위에 서면 다뉴브 강과 시가지가 멋있게 눈에 들어온다. 테이블을 거꾸로 놓은 듯해서 ‘테이블 캐슬’이라 부르는 이곳은 11세기 건립된 후 불탔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됐다. 조명에 비친 성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엽서다.

    성 아래 구시가지에 들어서면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성 마르틴 대성당이 여행객을 맞는다. 1452년 완공된 이래 합스부르크 왕 11명이 대관식을 치른 곳이자 베토벤의 장엄미사가 처음 연주된 곳이다. 구시가지로 가는 길에 미하엘 성문탑이 나오고 오밀조밀한 중세 골목들이 정겹다. 그중에는 대대로 망나니가 살았다는 골목도 있는데, 아직도 붉은 두건을 두른 데드마스크와 도끼가 건물에 걸려 있다. 우리 전통시장처럼 다닥다닥 붙은 노천카페에선 전통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이 골목 주변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가 소년 시절 연주회를 열었던 황갈색 파울리 궁을 비롯해 파스텔 톤의 아르누보 양식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성 엘리자베스 교회는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건물 내외부가 모두 푸른색이라 ‘블루처치’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구시가지에서 특히 여행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장소는 따로 있다. 구시가지 곳곳에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들. 벽 뒤에 숨은 파파라치, 벤치에서 대화를 엿듣는 나폴레옹, 중절모를 벗고 인사하는 노신사…. 그중 단연 인기 있는 것은 맨홀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여행객을 구경하는 ‘맨홀 맨’이다.

    눈 뜨면 중세의 정취 눈 감으면 추억으로 간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벨베데레 궁전.

    ■ 오스트리아 빈

    눈 뜨면 중세의 정취 눈 감으면 추억으로 간다

    오스트리아 빈의 쇼핑 파라다이스 그라벤 거리.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50분 동안 가면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성로마제국을 합병하고 절대주의 국가를 완성하는 750년 동안 도읍지 구실을 한 빈에 도착한다. 곳곳에 중세시대에 지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즐비하다. 이곳도 구시가지를 둘러싼 환상도로를 따라 모든 관광지가 시내 중심에 모여 있어 도보로 각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빈 역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시청사 광장을 둘러보고 호프부르크 왕궁, 그라벤 거리(게른트너 거리), 슈테판 대성당, 쇤브룬 궁전에 이르면 얼추 점심시간이 넘는다. 사진만 가볍게 찍고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걸으면 4시간 안에 이곳을 모두 섭렵할 수 있다. 시청사 광장 주변에 큰 정원과 빈대학, 요제프슈타트 극장, 보티프 교회가 위치해 있고 좀 더 걸으면 국회의사당과 법원, 폴크스 극장, 미술사 박물관이 나온다.

    시청사 광장 인근엔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도 있는데, 이곳에서 성 슈테판 사원 광장에 이르는 비엔나의 중심가가 바로 게른트너 거리다. 그중에서도 제일 번화한 곳이 그라벤 거리로, 한마디로 쇼핑의 파라다이스.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의 상품과 골동품, 재미있고 앙증맞은 기념품들을 보느라 넋을 잃는 여성 관광객의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근처 노천카페에 앉아 우리에겐 ‘비엔나커피’로 잘 알려진 ‘멜랑쥐’를 마시며 그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시청사에서 그라벤 거리 중간에는 왕궁 정원이 멋있는 호프부르크 왕궁이 자리 잡고 있고, 그라벤 거리 끝자락에 있는 성 슈테판 사원은 석조 부조의 설교대와 스테인드글라스가 멋있다. 사원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인 쇤브룬 궁전이 나온다. 쇤브룬 궁전에서 걸어서 30분, 트램을 타면 10분 거리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은 빈의 유력자 사보이 공이 여름 별궁으로 1723년 완공했으며, 현재는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후기 인상파 작품은 물론, ‘키스’를 비롯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Tips

    유레일 패스와 대한항공 이용 편리


    유레일(Eurail) 패스는 여행국 수에 따라 글로벌(24개국), 셀렉트(4개국), 리저널(2개국), 원컨트리(1개국) 패스 등 4종류가 있다. 국내 총판매대리점은 ACP레일, 레일유럽 외에 인터넷으로만 판매하는 유레일닷컴 등 3곳이다.

    동유럽 여행은 대한항공의 인천-프라하 또는 인천-빈 직항이 편하다. 특히 프라하공항은 동유럽의 허브로 한국인 이용객이 많다. 인천에서 프라하로 들어가 주변국을 관광한 후 빈에서 귀국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 효율적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