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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환불 서류…인감…‘유족 뺑뺑이’

상속인으로 금융상품 해지 ‘헛걸음’ 일쑤…가입 때 친절 찾아보기 힘들어

  • 이형삼 출판국 기획위원 hans@donga.com

환불 서류…인감…‘유족 뺑뺑이’

환불 서류…인감…‘유족 뺑뺑이’
2월 아버지를 여의었다. 암 확진을 받은 지 17일 만이었다. 고령이지만 워낙 건강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하던 분이라 가족은 물론 당신 스스로도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것 같다. 본격적인 암 치료를 앞두고 강한 투병 의지를 내비쳤을 무렵 심장마비가 왔다. 가시는 분도, 보내는 이들도 경황이 없었다. 허둥지둥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처리할 일이 많았다. 그 덕에 오래도록 슬픔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고 자위했다.

아버지 명의의 휴대전화와 낡은 승용차를 처분하는 것부터 아파트 명의 이전까지 뭐 하나 번거롭지 않은 게 없었지만 무엇보다 성가시고 답답한 일은 금융거래 처리였다. 문상을 왔던 친척이 “아버지 예금부터 인출해라. 사망신고를 하고 나면 돈 찾기 복잡해진다”고 귀띔했다. 아버지가 입원할 때 맡긴 현금카드로 부랴부랴 돈을 찾았다. 그런데 유품을 정리하다 A은행과 B은행의 정기예금, 정기적금 통장을 발견했다. 해지해야 지급 가능한 상품이라 현금카드로는 돈을 움직일 수 없었다.

사망신고를 마친 후 A은행을 찾아가 아버지 계좌의 예·적금을 어머니 계좌로 이체하고 싶다고 했다. 직원은 어머니를 제외한 상속인들(즉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한다는 인감증명서 등 몇 가지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다. 서류를 모아 들고 갔더니 이번엔 “은행에 직접 못 오는 상속인들의 인감도장을 가져와야 한다”며 딴소리를 했다.

은행 홈페이지서 찾아낸 위임장

우리 4형제는 서울 노원구와 서대문구, 대전, 경기 파주에 흩어져 산다. 대전에 사는 형은 사업차 1년에 열 달 이상을 중국에 머문다. 어머니가 계신 본가는 대구다. 다행히 수감 중인 형제는 없어 다들 자유의 몸이지만, 언제든 인감도장 꺼내 들고 동네 스타벅스에 모여 수다를 떨 형편은 못 된다. 불안하기 짝이 없었으나 각자 인감도장을 등기우편으로 주고받기로 했다.



하지만 B은행에 갔더니 얘기가 달랐다. 인감도장은 필요 없고, 다른 상속인들이 은행을 방문한 상속인에게 예·적금 해지 업무를 위임한다는 자기네 소정 양식의 위임장을 쓰고 인감을 날인해 제출하면 된다고 했다. A은행에 다시 가서 그 얘기를 전했더니 “우리 은행엔 그런 양식이 없는데, 정 불편하면 B은행의 위임장을 출력해 날인한 다음 ‘B은행’이란 글자를 ‘A은행’으로 고쳐 써서 내라”는 황당한 ‘절충안’을 내놨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A은행 홈페이지를 이 잡듯 뒤졌다. ‘서식/ 약관’에 들어가 이런저런 검색어를 넣다 보니 웬걸, 직원은 “그런 거 없다”던 ‘상속업무용 위임장’ 양식이 선명하게 떴다. 고객이 직접 찾아내고 출력한 뒤 작성한 은행 서식을 여봐란듯이 직원 앞에 내밀자 “내가 사망 케이스를 여러 건 해봤지만 서류를 이렇게 잘 준비해온 건 처음 본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사망 케이스’ 유족에게 헛걸음을 시켰을까.

아버지의 다른 금융거래가 또 있을지 몰라 금융감독원(금감원)에 ‘상속인 조회서비스’를 신청했다. 상속인이 피상속인(사망자)의 금융재산과 채무를 확인하려고 여러 금융회사를 일일이 방문하는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금감원에서 조회 신청을 받아 피상속인의 금융거래 여부를 확인해주는 서비스다. 아버지가 C보험사, D보험사와 거래했다는 통보가 왔다. 상속인 조회서비스는 거래 여부만 알려준다. 어떤 상품에 가입했는지, 얼마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는 해당 금융사와 직접 접촉해 알아봐야 한다.

아버지가 C보험사에서 가입한 상품은 자동차보험이었다. 미리 낸 1년치 보험료 중 차량 처분 시점까지의 보험료를 제하고 돌려받을 금액은 6만2000원. C보험사 콜센터에 전화해 필요한 서류를 문의한 뒤 시키는 대로 챙겨서 영업점을 방문했다. 서류를 넘겨보던 직원은 “법정상속인 위임장이 빠졌다”고 했다. 내게 보험금을 돌려주는 데 동의한다는 위임장에 다른 상속인들의 서명을 받아오라는 거였다. 보험금 수령인의 실명 확인만 거치면 될 텐데도 상속인들의 신분증 사본까지 요구했다.

“6만2000원 돌려받자고 전국, 해외에 흩어져 사는 가족을 찾아다니며 서명을 받아오라는 게 말이 되나. 콜센터에선 그런 안내가 없었다”고 따졌더니 “콜센터에서 최근 바뀐 규정을 잘 몰랐던 것 같다”는 기계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지급액이 100만 원 이상이면 위임장에 인감 날인을 해야 하는데 그나마 소액이라 서명으로 대신하는 걸 다행으로 알라는 투였다. “요식행위 아닌가. 내가 지금 필적이 다르게 5명의 서명을 해서 내면 어떻게 할 거냐”고 되묻자 그제야 “좀 형식적인 면이 있긴 한데…”라며 얼버무렸다. 귀찮으면 그깟 푼돈은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회사마다 다른 규정 불편과 짜증

환불 서류…인감…‘유족 뺑뺑이’

은행과 보험사는 왜 상품 해지 때만 과도한 서류와 절차를 강요할까.

더구나 규정은 보험사마다 달랐다. 아버지 사망 후 자동이체된 상해보험료를 환불받으려고 찾아간 D보험사에선 그런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홈페이지에 나온 주소대로 서울 종로 본사를 찾아갔더니 안내직원이 “해지 업무는 남대문에 있는 고객센터에서 담당한다”며 약도를 건넸다. 약도를 비치해둘 만큼 종로와 남대문 사이에서 헤매는 고객이 많다는 뜻이니, 홈페이지에 간단한 안내문 하나 띄워두면 될 일이었다. 단돈 1만1000원을 환급받으려고 택시를 타고 가는 건 적절한 경제행위가 아닌 듯해 땀을 뻘뻘 흘리며 남대문까지 걸어갔다.

금융상품 가입 때와 해지 때의 전혀 다른 두 얼굴, 회사마다 제각각인 주먹구구식 매뉴얼(그나마 직원에게 숙지하게 하지도 않은), 고객 불편을 외면하는 과도하고 형식적인 문서 요구, 고객정보 유출사고가 끊이지 않는 마당에 신분증 사본 같은 중요 정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보안불감증…. 우리 금융회사들의 그늘진 민낯이다.

어렵사리 금융 업무를 정리하고 한숨 돌리려니 대구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구청에서 아버지의 자동차세 환급금을 수령하라는 안내장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17만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민간기업에서 몇만 원 돌려받는 것도 그리 힘들었는데 관청에서 무려 17만 원을 돌려받으려면…. 서울-대구 KTX 왕복 운임만 해도 얼마인데…. 영 내키지 않는 손으로 담당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하신 분은 이○○ 씨와 어떻게 되세요?”

“아들입니다.”

“가족관계증명서에 두 분 관계 나와 있죠? 그거 팩스로 하나 넣어주고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위임장 같은 건….”

“부자(父子)관계 확인되고, 본인 실명계좌잖아요. 그럼 됐어요.”

상황 끝. 이튿날 바로 입금 확인 문자메시지가 떴다. 규제 완화는 관(官)에게만 일방적으로 요구할 일이 아닌 듯하다.



주간동아 2014.07.21 947호 (p26~27)

이형삼 출판국 기획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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