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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총리 찾아 60일 허탈한 도로 鄭 03

최소 11일~최대 6년 7개월 역대 국무총리 48명

대통령 보필하며 국민 다독이는 어정쩡한(?) 자리와 소임

  • 이재원 전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전 건양대 교수

최소 11일~최대 6년 7개월 역대 국무총리 48명

최소 11일~최대 6년 7개월 역대 국무총리 48명

이윤영, 장면 전 국무총리(위부터).

일반적으로 정권이 바뀌거나 나라에 큰 사건 사고가 있으면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경질해 국면 전환을 꾀한다. 세월호 참사로 정홍원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던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한국 헌정사의 국무총리 면면을 따져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건국 이후 66년 동안 우리나라 대통령에 오른 이는 모두 11명이다. 이들에 의해 선택, 지명돼 국무총리 반열에 오른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여기서 굳이 ‘반열’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국무총리 외에 5·16 군사정변 직후 존재했던 내각수반과 국무총리서리도 의전상 국무총리 예우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초대 이범석부터 현재 정홍원까지 국무총리 42명, 내각수반 4명, 서리 6명 등 모두 52명이 국무총리 반열에 올랐다. 이 중 장면, 백두진, 김종필, 고건 등은 두 번씩 국무총리를 역임해 실제로는 48명이 국무총리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이들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짧게는 11일(이윤영)부터 길게는 6년 7개월(정일권) 동안 국무총리 자리를 거쳤다. 최근 문창극 후보자의 경우는 국회청문회에서 시시비비를 가렸어야 옳다고 보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우리 정치 행정사에 있는 특수한 제도인 국무총리에 대해 일반론적으로 얘기하겠다.

헌법 제정 당시 헌법기초위원이던 유진오 박사는 우리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로 구상하고 초안을 잡았다. 그러나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 박사가 “내각책임제 아래서는 대통령 안 하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고 강력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정부 형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다 보니 대통령 아래 부통령, 국무총리 등이 존재하는 절충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역대 정부의 국무총리 운용

우리나라는 1954년 11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3선을 허용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 당시 국무총리직을 없앴다. 이후 5년 7개월간 국무총리가 없다가 민주당 정부의 내각책임제하에서 부활했다. 이때부터 우리 헌정사에서 면면히 이어온 국무총리라는 자리는 임명할 때 며칠만 뉴스거리가 되고 그 뒤로는 있는지 없는지 애매모호하고 어정쩡한 자리로 인식됐다. 최근에는 국민 중 23% 정도만 국무총리 이름을 알고 있다는 조사결과까지 보도됐다.

그렇다면 국무총리의 소임은 무엇일까. 중국 한나라 때 재상이던 진평이 한 말은 이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진평은 황제가 불러 감옥에 갇힌 죄수의 수를 물어도, 국고 내역을 물어도 모른다고 하면서 담당 대신에게 답을 미뤘다. 황제가 그런 진평에게 “재상은 대체 뭐 하는 자리냐”고 묻자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면서 천지 조화를 기해 세상을 순조롭게 돌아가게 하고, 아래로는 인근과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백성을 다독이며, 관료로 하여금 제 소임을 다하도록 하는 자리”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도 두 번째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후임인 고(故) 박태준 국무총리에게 “국무총리가 되면 고민이 많을 거다. 때로는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해야 한다. 그러면서 묵묵히 대통령을 보필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국무총리의 소임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대통령의 보좌역 정도로 인식했다. 초대 국무총리로 누구나 예상했던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등 유력 인사를 배제하고 목사 출신인 이윤영 의원을 지명했다. 이 인준안이 부결되면서 대통령과 국회의 대립이 시작되고 한국 국무총리 제도의 시련이 시작됐다. 이 전 대통령이 4차례에 걸쳐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최소 11일~최대 6년 7개월 역대 국무총리 48명

김종필, 정운찬, 김황식 전 국무총리(위부터).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이범석이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직하게 해 군을 창설하고 6·25전쟁 후 장면을 국무총리로 임명해 대미(對美) 외교에 만전을 기하게 한 점, 그리고 재정에 밝은 백두진을 국무총리로 기용해 복구사업을 통할하게 하고, 국제외교를 위해 변영태에게 국무총리직을 맡긴 점 등을 볼 때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을 뽑아 ‘슈퍼스타’인 자신을 보조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민주당 구파(舊派) 출신인 윤보선 전 대통령은 정치적 배려로 신파(新派) 장면을 국무총리에 앉혔으나 시종 정치적 갈등을 면치 못했다. 역대 대통령 중 국무총리를 상황에 맞게 임명해 가장 적절히 활용한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본다. 정부 초기 군사정권 이미지를 불식하려고 민간 덕망가 최두선을 택한 것이나, 그 후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군 선배인 정일권에게 ‘얼굴’ 역할을 맡긴 것, 그리고 유신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격동기에 김종필을 등용해 바람을 막은 뒤 안정기에 관료 출신인 최규하를 발탁해 행정을 하게 한 것 등은 절묘한 용인술이라 볼 수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권 초기 경제성장론자인 남덕우를 국무총리에 기용했고, 이후 지역화합과 경제발전 등을 고려해 호남 출신 인사(김상협, 진의종, 이한기)를 등용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군사문화 불식 차원에서 학자 국무총리를 활용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초유의 공동정권으로 초기에는 국무총리 인선에 관여하지 않았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헤어진 후 장상, 장대환 등을 지명했으나 이들이 국회 인준을 받지 못한 것을 보면 국무총리 활용에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원외교(한승수), 세종시(정운찬), 4대강(김황식) 등 테마별로 국무총리를 활용했다. 이처럼 대통령의 의지와 시대 상황에 따라 국무총리의 소임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청문회 운영의 묘 살려야

제18대 대통령선거(대선) 과정에서 여야 모두는 대통령의 권력 분산을 위해 ‘책임총리제’를 주장했다. 지금도 언론에서 이를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책임총리제라는 용어는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국무총리 출신 후보(이홍구, 이회창, 이수성)들이 경험론적으로 제기한 용어로, 법률이나 행정 용어가 아니다. ‘책임총리’보다는 실제로 권한을 가진 ‘실권총리’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2000년 이한동 전 국무총리 이후 정착된 국회 인사청문회 제도는 공직자 자질을 객관적으로 검증한다는 본래의 취지는 좋으나 운영의 묘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국처럼 사전에 충분한 검증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착돼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해 국회 검증 과정에서 개인 신상 관련 문제는 비공개로 다루고 정책 문제 등 공적인 부분은 공개해 국민적 검증을 받도록 여야가 합의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돌아보면 대통령 권한이 가장 막강했던 유신헌법 아래서 국무총리를 한 5명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정치적 역할을 한 김종필, 행정적 역할을 한 최규하, 과도기에 굳건한 자세를 보인 신현확과 박충훈, 새 정권의 경제 안정 기반을 마련한 남덕우 등이 모두 제구실을 충분히 했다.

따라서 국무총리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제도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 대통령의 신뢰와 의지, 본인의 역량과 시대 상황, 그리고 권력 주변의 협조 등 3가지 요소가 합쳐지면 현행 제도 아래서도 국무총리는 얼마든 제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간동아 2014.06.30 944호 (p16~17)

이재원 전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전 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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