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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너무 미안하고… 사랑해 05

아, 살아 있다는 이 죄책감이여

세월호 취재하며 대구 가스 폭발사고 떠올라…두통, 소화불량, 악몽 등 PTSD에 시달려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아, 살아 있다는 이 죄책감이여

아, 살아 있다는 이 죄책감이여
46년 생애 처음으로 심각한 편두통 때문에 두통약을 사 먹었다. 아무리 맵고 짜게 먹어도 속이 답답하거나 아픈 적이 없었는데 소화제를 매일 복용했다. 작은 일에도 신경질이 나고 짜증이 나면서 입맛이 없다. 단언컨대 인생에 단 한 번도 입맛이 없었던 적이 없다. 독감에 걸려도 입맛만큼은 왕성하던 나였다.

새벽까지 잠을 설치고 다음 날 아침 멍하니 있다 졸음이 몰려오면 진한 커피를 두세 잔 마셔야 그나마 정신이 들었다. 뭔가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고 가슴은 두근두근, 얼굴에는 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왠지 농담을 해서는 안 되고 웃고 즐기는 일도 피해야 할 것 같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집중이 안 된다.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가려운 듯한 증상이 괴롭혔고 다음 날 아침이면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 모두가 4월 16일 오후부터 벌어진 일이다. 476명이 탄 세월호가 이날 이른 아침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살려달라 아우성치는 학생들 모습을 TV로 본 직후부터였다. 280명 넘는 사람이 배에 갇혀 생사를 모르는 상황이 쉴 틈도 없이 보도되는 걸 지켜본 나의 정신 상태는 정말이지 실시간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고 원인과 피해 상황에 대해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고 취재에 들어간 뒤에는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입에서는 “저런 나쁜…” “어떻게 또 이런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돼 나왔다. 말도 하기 싫었다. TV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됐다. 속으로는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진도로 가서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불안감만 엄습하고 해야 할 일이 정돈되지 않았다.

어떻게 또 이런 일이…



세월호 참사, 그날 이후 나는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꿈에선 땀이 피처럼 느껴졌다. 베개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매일 꾸는 꿈에는 18년 전 발생한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 당시 학생들과 세월호 안에 갇힌 학생들이 오버랩돼 등장했다. 물에 잠긴 그들이 “아저씨, 살려주세요”라며 손을 내밀어 내가 그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닿지 않았다. 아무리 발악해도 몸은 꿈쩍하지 않았고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리다 잠에서 깼다. 가위에 눌린 것이다.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는 1995년 이맘때인 4월 28일 오전 7시 52분쯤 일어났다.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동 사거리 공사현장에서 새어나온 도시가스가 폭발하면서 101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공사현장 인부가 실수로 깬 지하 매립 도시가스관에서 새어나온 가스가 밤새 지하 공간에 머물다 다음 날 아침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꽃과 닿으면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반경 400m 내 건물과 시설, 차량이 쑥대밭이 됐다.

사고 당시 대구 달서경찰서 출입기자였던 나는 현장에서 1km 떨어진 경찰서 형사계에서 그날 새벽에 있었던 사건을 정리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폭발음에 경찰서 건물이 흔들리고 유리창이 깨졌다. 경찰서 밖으로 뛰쳐나갔더니 검은 연기와 함께 50m가 넘는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1차 폭발이 있은 지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아직 구급차도 도착하지 않았고, 취재차에서 내리자마자 시내버스가 폭발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대구 지하철 1호선 공사현장에 있던 1t 무게의 복공판은 수백m를 날아가거나 지하로 무너져 내렸다. 복공판 위를 달리던 차량들은 지하로 매몰되거나 화염에 휩싸였고, 건물과 전봇대가 부서졌다. 피해자들의 찢어진 사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사고 발생 시간은 인근에 있던 영남중고교 학생들의 등교 시간이었다. 총 101명의 희생자(202명 중상) 가운데 학생이 42명이나 포함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회사로 상황을 보고하려 했으나 주변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엔 휴대전화가 없었기에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를 찾으려고 곡예하듯 이리저리 누비고 다녔다. 그 순간 뒤쪽에서 “아저씨 살려주세요. 저 학교 가야 해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여고생이었다. 허리 아래쪽이 지하철 공사장에서 무너진 대형 철제 빔에 눌려 있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철제 빔을 들 수 없었다. 주변에 있던 경찰을 불렀지만 경황도 없었고 목소리도 닿지 않았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아, 살아 있다는 이 죄책감이여

101명이 사망한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 현장(위). 당시 사고 현장에서 경찰이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를 구조하고 있다.

“다시 오마. 당황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라. 구조반이 곧 올 거야.”

내가 그 여학생에게 한 이 한마디는 인생 내내 후회로 따라다녔다. 나는 현장의 이 급박한 상황을 신문사 데스크에 먼저 보고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취재인력을 지원받고, 지시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근처 건물에 들어가 살아 있는 전화선을 발견해 보고를 마친 뒤 돌아와 보니 여학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10분 상간의 일이었다.

미친 듯 취재를 마치고 그 여학생을 찾으려고 20개 병·의원을 돌아다녔다. 끝내 어느 한 병원에서 그 여학생을 찾았는데, 그는 이미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다 나는 여학생 가족으로부터 얼굴을 두드려 맞았다.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는 철제 빔에 깔리는 순간 이미 요추에 손상을 입어 즉시 구조했더라도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인명구조보다 취재를 택했다’는 죄의식은 마음 한구석에 대못처럼 박혀버렸다. 대구시 당국과 싸움까지 해가며 여학생의 보상 문제를 끝까지 도와줬지만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사건 1년 후 영남중고교에서 펴낸 추모집에 죄를 고해하고 가족의 용서를 다시 한 번 구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빠, 나 지난해 이맘때쯤 세월호 타고 제주도 수학여행 다녀왔는데 1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아빠 얼굴 다시 못 볼 뻔했어요. 사랑해요.”

4월 16일 저녁, 세월호 침몰 사고를 취재하는데 고교 3학년인 아들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얘기인즉, 경기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이 탔던 바로 그 배 세월호를 타고 지난해 이맘때쯤 제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아빠, 정말 무서워서 공부가 안 돼요. 그 친구들 지금 아마 식당칸에 몰려 있을 텐데. 어떻게 해요.”

자율신경계 이상 증상

아, 살아 있다는 이 죄책감이여

세월호 침몰 이틀째인 4월 17일, 경기 안산시 단원고 운동장에 모인 안산 지역 고교생들이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있다.

아들의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아픔과 슬픔이 몰려왔다. 승선 인원도 파악하지 못하는 정부와 늦기만 한 구조 상황, 그리고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선장 얘기를 취재하면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치가 떨렸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두통약과 소화제, 커피를 끼고 산다.

세월호 사고가 나고 일주일 후 각종 증상이 사라지지 않아 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가 낸 자료를 훑어보니 기자의 이 모든 증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PTSD)였다. 거기엔 ‘사람이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질환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적혀 있었다.

정신의학 칼럼리스트인 손석한 박사에게 상담을 요청했더니 “소화불량, 불면증, 편두통 등 각종 증상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율신경계에 이상이 와서 생긴 증상이다. 18년 전 받은 정신적 외상이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다시 재현되고 증폭되면서 악몽을 꾸고 끊임없이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상황이 심각하다. 항불안제와 항우울제 등 약을 복용하고 세월호 사건에서 손을 떼는 게 좋다. 이런 경험을 고백하고 위로받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세월호 사건으로 숨진 학생과 유족, 실종자와 실종자 가족에게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들에겐 나의 이런 고통이 한낱 실없는 어린 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게 죄스러운, 이 마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주간동아 2014.04.28 935호 (p26~28)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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