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4

2017.06.28

특집| 한국의 마초 문화를 말하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에는 ‘젠더’ 관점이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사회학자의 ‘안경환 사태’ 후기

  •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nylee@cau.ac.kr

    입력2017-06-28 11: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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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산책하다 다리를 다쳤다. 처음으로 깁스를 해보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 앞에서 한참 돌아가야만 턱이 없는 통로를 만날 수 있는 출입구, 주요 출입구에서 멀리 배치된, 그나마 홀수층 짝수층으로 분리된 엘리베이터, 울퉁불퉁 잔뜩 멋을 낸 보도블록과 가파른 계단. 이 모든 게 목발을 짚은 사람에게는 큰 장애물이었다. 잦은 승차 거부와 냉소적 시선은 덤이다. 비장애인의 눈으로 설계된 건물과 도시, 제도 전반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늘 타자의 처지를 고려하고 차이를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라고 주장해온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성찰하게 됐다. ‘타자의 처지에서 사고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권 문제는 이렇다. 어떤 이에게는 특수한 것, 부차적인 것, 구현되면 좋지만 안 해도 되는 것이어도 누군가에게는 불평등한 구조, 차별적 대우를 교정해 생존을 보장받는 일이다. 무엇보다 당사자가 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남성 중심 ‘사회체제’의 총체적 실패

    특권은 공기 같아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즐긴다. 그래서 일상에서 특별히 불편함을 못 느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지하기 매우 어렵다. 자신의 위치를 상대화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본다는 건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고통스럽게 복기하며 부단히 실천해야 함을 의미한다. 단순히 ‘당신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안경환 사태’는 상대방 처지에 서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평생을 갱신하며 사회적 약자의 인권 증진을 위해 헌신해온 한 ‘남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페미니스트의 곤혹스러움, 그 곤혹스러움을 이분법적 잣대로 판단하려는 성차별주의자들의 행태가 맞물린 사건이기도 했다. 필자는 이번 논란을 개인 안경환의 문제가 아니라 징후적 사건이라 여기므로 ‘사태’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안경환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자신이 쓴 책 ‘남자란 무엇인가’의 내용, 그리고 그가 20대이던 1970년대 있었던 ‘혼인무효 사건’ 등으로 결국 자진사퇴했다. 먼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이번 사태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개인 안경환이 아니라 대한민국 평균 ‘남성’의 ‘여성관’ 혹은 ‘여성에 대한 인권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일상에서 보고 듣는 일들이 그나마 ‘괜찮은’ 의식을 갖고 이를 실천해왔다고 여겨지는 노학자의 글과 과거 행적을 통해 ‘다시’ 참담하게 확인됐다.

    주변을 돌아보라. 아니,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보라. 당신은 안경환 전 후보자보다 더 ‘나은’ 젠더관을 지니고 평소에 실천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번 사태는 그저 당신들의 일상을 아주 살짝 보여준 것 아닌가.

    둘째, 그러므로 ‘안경환 사태’는 그간 페미니스트의 ‘젠더 정의’ 요구를 외면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여겨온 한국의 남성중심적, 반·비페미니스트적, 젠더 위계적 사회·문화·경제·정치체제의 총체적 실패를 폭로했다고 본다. 그간 안보관과 계급관으로 조직돼 있던 한국의 진영 구도는 사실 ‘봉건남성 아재 가부장 문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늘 단일 구도였다. 젠더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남성들의 공고한 연대체는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 그런 당사자들이 주창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에 여전히 결여돼 있는, 결여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바로 성평등과 여성인권 의식이라는 점이 이번 사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남자란 무엇인가’에 나온 단어 몇 개와 문장 몇 개의 문제가 아니라, 저술의 인식론적 전제 자체가 한국 남성 대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젠더 고정관념의 전형이었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마저도 한국 평균 ‘남성’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었음에도 말이다.

    셋째, 이번 사태를 둘러싼 담론 구도는 남성-남성 간 연대에서 여성은 여전히 도구적으로 소환되거나 교환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케 한다. 박근혜 정권의 실패를 ‘여성’의 실패라 규정해온 남성들의 진단 방식에 내장된 왜곡된 여성인권 수준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가장 반페미니스트적인 박근혜 정권을 만들고 이를 통해 갖은 혜택을 누린 주체들이 안 전 후보자의 젠더관을 빌미 삼아 페미니스트 혹은 여성을 소환하는 아이러니는 그래서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자유한국당이 ‘여성’ 당원들을 소환해 안 전 후보자를 규탄하고, 보수 언론은 그간 단 한 번도 인터뷰 요청을 하지 않았던 진보 페미니스트 단체와 학자들을 소환한다. 젠더 문제에 아무런 관심조차 없고 귀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성차별주의자들이 필요할 때만 페미니스트 혹은 여성을 소환해 총알받이나 사수로 활용하는 시도 또한 어찌 보면 일관성 있는 행동일 것이다.



    젠더 정의는 사회 정의의 필수 토대

    강경화 외교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보여준 반젠더적, 반페미니스트적 행태, ‘여성’ 의원을 사수로 활용하는 방식, 더 나아가 그간 그들이 보여준 반민주적 언설과 여성을 비하하며 하대하는 행위들이 이 사태와 분리돼 공명하는 건 너무나 슬프지만, 가장 첨예한 현실이라는 점 또한 보여줬다. 무엇이 성평등인지 알기는커녕, 자신의 언행을 스스로 진단할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자들이 행한, 어이없지만 예측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반페미니스트 연대의 당사자, 젠더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적극적 공모자들에게 여성은 늘 술자리의 안줏거리나 희롱의 대상, 어쩔 수 없는 남성 욕망의 배설 그릇, 자신을 빛내줄 장식품, 혹은 그림자나 내조자였음을.

    그러므로, 아니 그럼에도 필자는 이번 기회가 한국 사회 전반에 성평등 의식을 확산할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으리라 본다. 보수는 물론이고, 그나마 ‘괜찮은’ ‘진보들’조차 젠더 이슈에서 자유로울 자가 거의 없음을, 그래서 역설적으로 젠더가 사소한 보충물이 아니라 평등을 기반으로 한 정의 구축의 필수적 토대임을 이 사태를 지켜보는 국민 모두가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정말 다행일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남성중심의 강고한 연대체가, 여기에 기생해 살아온 우리 모두가 “성평등이 부재한 민주주의는 없음”을 외쳐온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으로 반드시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일상의 모든 언행이 성차별적이되 깨닫지 못하는 ‘높으신’ 분들. 안경환 ‘사태’는 바로 당신들을 겨누는 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길. 성평등 가치가 채워진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도 이번 잣대는 당신들에게도, 아니 당신들에게 먼저 적용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입에만 걸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대한민국 민주시민의 진정성 있는 실천은 이제 막 도약을 시작했다. 이 정국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광장의 ‘촛불혁명’이 일궈냈다는 사실을 다시 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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