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1

2014.03.31

젊은 부호 성공엔 특별한 것이 있다

40대 김정주·이해진·김택진 맨땅에서 시작 1000억대 자산 일궈

  • 양충모 객원기자 gaddjun@gmail.com

    입력2014-03-31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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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벌한 구조조정, 끝을 모르는 경기 불황에 직장인이 느끼는 불안감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진다. 최근에는 20대 후반 젊은이도 이런 고민을 한다고 한다. 입사 1년도 지나지 않아 사표를 내는 신입사원이 부지기수다. 어차피 임원이 되지 못할 바에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칼바람을 맞기 전 빨리 다른 일을 찾아 성공 가도를 달리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다. 남은 사람도 당장 월급 때문에 눌러앉아 있을 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불안감의 근원은 결국 ‘돈’이다. ‘하루빨리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고 싶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털고 싶다’ 등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샐러리맨의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밑바닥부터 시작해 큰돈을 버는 게 과연 가능할까. 더욱이 1000억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을 해낸 이들이 있다. 지난해 말 1000억 원대 자산을 가진 30, 40대 젊은 부호가 52명에 달한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중 자수성가형은 9명, 나머지는 모두 재벌가 2~3세였다. 상속형 부자 43명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잠시 접어두자. 눈길을 둬야 할 곳은 자수성가형이다. ‘주간동아’는 이들이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그리고 부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짚어봤다. 자수성가형 자산가 9명 가운데 정보기술(IT) 산업에서 부를 쌓은 3인(김정주 NXC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 그 대상이다.

    “시대를 읽어라”



    김정주 NXC 회장

    젊은 부호 성공엔 특별한 것이 있다
    1994년 서울 역삼동 한 오피스텔에서 넥슨을 창립했을 당시 김정주 NXC 회장은 한국과학기술원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학업과 사업가의 갈림길에서 그는 과감하게 사업가 길을 선택했다. 자신에게는 사업가가 더 어울리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 회장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광성고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서울대 기숙사에서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룸메이트였다. 옆방에는 송재경(엑스엘게임즈 대표), 김상범(넥슨 이사) 등이 있었다. 김 회장은 송재경, 김상범 등과 함께 넥슨을 창업했다.

    지금이야 넥슨이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회사지만 초창기에는 웹 오피스라는 인터넷 솔루션을 개발하거나 기업체 내부 인트라넷을 개발하는 용역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정말 하고 싶은 사업을 위한 현금 확보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들이 정말 하고 싶은 사업은 ‘게임 개발’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을 이끄는 것은 시대를 읽는 능력이다. 또한 독창적으로 자신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김 회장은 이 능력이 탁월했다.

    1990년대는 한국 게임 역사상 온라인게임 태동기였다. 이때 김 회장은 PC(개인용 컴퓨터) 통신상에서 MUD(Multi User Dungeon)게임이 인기를 끄는 점에 주목했다. MUD게임이란 텍스트를 활용한 실시간 채팅 게임이다. 넥슨은 여기에 그래픽 요소를 더해, 세계 최초로 그래픽 MMORPG(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게임)를 개발했다.

    지금이야 그래픽이 게임 필수 요소지만 당시에는 낮은 PC 장치, 복잡한 개발 과정, 비싼 서버 비용 등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 회장의 전략은 적중했다. 넥슨의 첫 출시작인 ‘바람의 나라’가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바람의 나라’는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게임이다. 누적 회원 수가 1800만 명에 달하는데, 지금도 평균 동시접속자 1만여 명을 기록할 정도로 꾸준히 사랑받는 게임이다.

    김 회장은 게임업계에서는 입지전적 인물로 손꼽힌다. 게임업계에서 단일 기업으론 최초로 매출 1조 원 시대를 열었고, 다양한 인맥을 보유할 뿐 아니라 기획력, 판단력, 사업 수완도 뛰어나다.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지난해 김 회장은 유아용품 브랜드 ‘스토케(STOKKE)’를 인수했다. 게임회사의 유아용품업체 인수에 많은 사람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김 회장은 스토케 가치와 잠재력에 주목했다. 끊임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이 곧 그의 성공 원동력인 셈이다.

    “가장 절박한 시도가 성공한다”

    이해진 네이버 의장

    젊은 부호 성공엔 특별한 것이 있다
    이해진 네이버 의장은 김정주 회장과 달리 회사 경험을 갖고 창업했다. 이 의장은 한국과학기술원 대학원을 졸업한 후 삼성SDS에 입사했고, 사내 벤처 1호 네이버포트를 거쳐 1999년 네이버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자본금은 5억 원이었다.

    이 의장은 네이버를 세우면서 최고 검색기술로 한국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다음과 야후가 포털사이트 투톱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라이코스, 네띠앙이 네이버 앞에 있었다. 뒤에서는 엠파스가 따라붙었다. 검색 광고가 등장하기 전인 당시에는 뚜렷한 수익모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 의장이 생각한 돌파구는 한게임 인수였다. 현 카카오이사회 의장이자 입사 동기이기도 한 김범수 의장이 창업한 한게임은 당시 고스톱, 윷놀이 등 친숙한 게임으로 3개월 만에 가입자 100만 명을 돌파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의장은 네이버가 한게임을 인수하면 게임과 인터넷의 결합으로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한게임은 네이버의 결제 관련 기술력을 토대로 ‘한게임 프리미엄 서비스’를 선보이고, 네이버 역시 늘어난 회원을 기반으로 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그 전략은 적중했다. 네이버의 검색과 한게임의 게임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NHN이 국내 1위 인터넷 기업에 등극했다. 인터넷의 핵심 수익모델인 검색과 게임을 모두 갖추면서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든 강력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진 기업을 탄생시킨 것이다.

    합병이 이뤄진 2000년 당시 네이버 매출은 88억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해 네이버 매출은 2조3100억 원이었다. 11년 사이 매출이 200배 넘게 성장한 것이다. 한게임과 네이버의 합병이 국내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수합병 사례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또한 네이버는 지금도 중국 바이두, 러시아 얀덱스와 함께 구글로부터 자국 검색시장 1위 자리를 방어하는, 세계에서 3개뿐인 검색 포털사이트기도 하다.

    지식인, 통합검색, 오픈캐스트 같은 새로운 서비스를 통해 한국 인터넷의 새 역사를 쓴 이 의장이지만 실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0년 일본 검색시장에 진출했다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2005년 철수한 것은 뼈아픈 경험이다. 하지만 이 의장은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본 시장을 두드렸다.

    2007년 재도전에 나서 4년 이상 고전했지만 2011년 전환기가 찾아왔다. 모바일 메신저 ‘라인’이 소위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단순히 텍스트에 기반을 둔 메신저 서비스에서 벗어나 코니, 브라운 등 캐릭터 스탬프로 무장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갔고, 여기에 게임과 만화 같은 디지털 콘텐츠도 접목했다. 다양한 서비스는 유료 콘텐츠에 거부감이 없다는 일본인의 특성과 맞아떨어지면서 라인의 고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라인은 서비스 시작 2년 6개월 만에 가입자가 3억 명을 돌파했는데, 이는 페이스북(5년 8개월)보다 배 이상 빠른 속도다.

    이 의장은 지난해 도쿄 라인 본사에서 열린 ‘라인 가입자 수 3억 명 돌파 기념행사’에서 “인터넷 서비스로 다른 나라에서 자리 잡는 게 너무 어려웠고 실패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비록 실패하더라도 후배 벤처기업인에게 실패를 경험 삼을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일했다”며 “보통 성공은 천재들이 쉽게 떠올린 멋진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실패 끝에 가장 절박한 시도가 성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돈을 좇지 마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젊은 부호 성공엔 특별한 것이 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독서광으로 잘 알려졌다. 일주일 평균 2권 정도 책을 읽는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활동하지 않지만, 과거 트위터에서 매력적인 문체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아냈던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김 대표는 서울대와 동대학원에서 반도체를 전공했다. 프로그래밍은 사실 취미로 시작했다. 하지만 후자에서 더 큰 소질을 보였다. 당시 그의 대표작은 1989년 이찬진, 김형집, 우원식 등과 공동개발한 ‘아래아한글’이다. 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한메타자교사’도 김 대표 손을 거쳤다.

    김 대표는 대학 졸업 후 병역특례연구원으로 현대전자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인터넷서비스(아미넷 개발팀장)를 담당하다 회사 지원으로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밟던 중 1997년 동료 16명과 독립해 자본금 1억 원으로 엔씨소프트를 창업했다. 첫 작품은 SK텔레콤의 넷츠고 서비스 개발이었다.

    그리고 31세였던 1998년 김 대표는 한국 온라인게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평가받는 ‘리니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리니지’는 가정으로 보급된 초고속통신망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PC방을 배경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리니지’는 유료서비스를 시작한 지 1년 3개월 만에 회원 수 100만 명을 돌파하며 당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에 버금가는 PC방 최고 인기 게임으로 등극했다. 97년 창업 당시 5억 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2년 뒤 13배인 80억 원, 3년 뒤인 2000년에는 570억 원으로 급증했다.

    ‘리니지’ 성공 이면에는 김 대표의 ‘완성도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게임 1개가 성공하면 곧 차기작을 준비하는 다른 업체와 달리 엔씨소프트는 게임 완성도를 높이는 데 공을 들였다. ‘리니지’가 게임 완성도와 캐릭터 간 밸런스 면에서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이유다. ‘리니지’는 출시 15년이 지난 지금도 게임 유저의 의견을 반영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김 대표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꾸준함’과 ‘현장’이다. 그는 회사 대표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개발 현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리니지’를 비롯해 엔씨소프트의 모든 게임은 그의 손을 거쳤다. 그가 여전히 개발자로서의 임무를 내려놓지 않는 이유는 개발 작업에서 꾸준히 아이디어를 얻기 때문이다. 2011년 개발자 콘퍼런스 ‘디브온 2011’에서 “개발자라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싶고 그걸 실현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라면서 “만약 나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선보였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같은 자리에서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관심 있는 개발자들이 있다. 개발자 사이에서 언제부터 ‘중박’ ‘대박’ 같은 질문이 나오게 됐는지 모르겠다. 개발자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 행복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개발자에 국한하지 않고 본다면 ‘신념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돈 같은 외적 가치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가 트위터에 쓴 문장은 이에 대한 보충일 것이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열정이 이끄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에 정렬돼 있는 충만한 동기가 진정한 동력이다. 꼭 해내겠다는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유지돼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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