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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칵테일 | 보드카 김렛

보드카에 라임주스…송곳 같은 맛

영화 ‘어바웃 슈미트’에서 쓸쓸한 노년 상징으로 등장

  •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보드카에 라임주스…송곳 같은 맛

영화 ‘어바웃 슈미트(About Sch midt)’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2002년 작품이다. 페인의 2004년 작 ‘사이드웨이’도 국내에 잘 알려졌다. ‘어바웃 슈미트’는 한 보험회사 중역의 정년퇴임 후 생활을 페인 감독 특유의 시각으로 담담하게 그려 나간 명작으로, 주인공 잭 니컬슨의 연기가 특히 돋보인다. 이 영화로 니컬슨은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글러브에서는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주인공 워런 슈미트(잭 니컬슨 분)는 한 보험회사 중역으로 어느덧 정년퇴임을 맞는다. 정년퇴임 송별회장, 그는 첨단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후임에게 떼밀려 퇴장당하는 느낌을 받고는 좌절한다. 퇴임 다음 날, 은퇴자로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 제니를 보는 것이 생활의 기쁨이지만 다른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어 전화만 하고 지내야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러던 중 워런을 더욱 우울하고 심란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딸이 결혼을 선언한 것. 그는 사윗감이 딸에게 한참 부족하다며 불만을 늘어놓는다. 아내 헬런은 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고 새로 장만한 캠핑카로 어디든 원하는 대로 돌아다니자고 애써 흥을 돋운다. 하지만 그의 벗이 돼주던 헬런마저 뇌졸중으로 죽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난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워런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 간다. 샤워도 하지 않고 툭 하면 TV 앞에서 그냥 잠이 든다. 심지어 파자마 위에 코트만 걸친 채 슈퍼마켓에 가기도 한다.

심란한 마음을 간신히 다잡은 워런은 어느 날 밤 문득 딸 제니와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즉시 가방을 꾸려 이미 장만해둔 캠핑카로 딸이 사는 덴버로 무작정 향한다. 하지만 제니는 워런의 덴버행을 반기지 않는다. 덴버로 가는 도중 전화 통화에서 제니는 워런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나무라며 그냥 계획대로 결혼식 날 직전 와주길 원한다고 말한다. 딸의 냉정한 태도에 실망해 또다시 좌절감을 느낀 워런, 과연 그는 자신만의 인생을 찾을 수 있을까.

진과 라임주스 3대 1로 섞은 게 시작



이 영화에서는 칵테일 두 종류가 등장한다. 그중 비교적 오랜 시간 등장하는 칵테일은 ‘맨해튼(Manhattan)’이다. 워런이 덴버에 도착하자 장차 안사돈이 될 로버타가 권하는 바로 그 칵테일이다. 로버타가 “칵테일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자 워런은 처음에는 사양하다 맨해튼이라는 말을 듣고 “그럼 같이 한 잔 하겠다”고 한다. 이어서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특유의 붉은색을 가진 맨해튼을 함께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맨해튼은 지난 번(‘주간동아’ 917호 참조) 한 번 소개한 대로 위스키를 베이스로 베르무트와 비터스를 섞어서 만든 칵테일이다. 원래 체리 장식이 들어가는 것이 정통 방식이지만 ‘어바웃 슈미트’에서는 허점투성이 로버타 성격을 반영하듯 별다른 장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맨해튼보다 자주 나오진 않지만 더 비중 있게 등장하는 칵테일이 하나 있다. 바로 ‘보드카 김렛(Vodka Gimlet)’이다. 영화에서 이 칵테일은 워런의 정년퇴임 송별회 때 등장한다. 그는 옆자리 아내에게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송별회장을 나와 레스토랑 홀에 있는 바로 향한다. 바 스탠드에 홀로 앉은 그가 바텐더에게 주문하는 술이 바로 보드카 김렛이다.

김렛은 원칙적으로 진과 라임주스를 섞어 만든 칵테일을 말한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진 대신 보드카를 넣은 보드카 김렛이 유행해 지금은 김렛이라고 하면 진을 넣은 전통 김렛보다 보드카 김렛을 먼저 떠올릴 정도가 됐다. 이 때문에 어떤 칵테일 책에서는 심지어 김렛 자체를 보드카 베이스의 칵테일로 소개하기도 한다.

김렛은 원래 T자형 자루를 가진 나사송곳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나사송곳이란 이미지 때문에 ‘날카롭다’ 라는 뜻을 지녀 ‘gimlet eye’ ‘gimlet-eyed’라고 하면 각각 ‘날카로운 눈(시선) 또는 꿰뚫을 듯한 눈초리’ ‘눈(시선)이 날카로운’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칵테일에 김렛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주성분인 진과 라임주스의 날카로운 맛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또 다른 설로는 1879년에서 1913년까지 영국 해군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의무감 김렛 경(Sir Gimlet)과의 관련설이다. 그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괴혈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병사들에게 라임주스를 즐겨 마시도록 유도했는데, 병사들이 이를 잘 따르지 않자 라임주스에 진을 넣은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게 했다고 한다.

칵테일 김렛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미국 탐정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1888 ~1959)다. 그는 1953년 발표한 소설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에서 테리 레녹스라는 작중 인물을 통해 김렛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테리는 주인공인 사립탐정 필립 말로와 함께 빅터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는 김렛을 제대로 만들 줄 모르네요. 진에다 라임이나 레몬주스를 넣고 설탕과 비터스를 조금 뿌리고는 김렛이라고 부르는군요. 진짜 김렛은 진과 로즈사의 라임 주스를 반반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아야 돼요.”

그 후 테리는 자살 직전 필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빅터 바에 가서 나를 위해 김렛 한 잔을 마셔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테리는 “진과 라임주스를 일대일로 섞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런 비율이 보편적인 레시피는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진과 라임주스를 3대 1 비율로 섞는다. 그러나 모든 칵테일이 그러하듯 개인 취향에 따라 얼마든 조절 가능하다.

그 쓸쓸하고 신랄한 인생

보드카에 라임주스…송곳 같은 맛
소설 속 테리가 말한 로즈사의 라임주스는 라임주스의 유명한 제품명을 말한다. 이 제품은 그냥 신선하게 짠 라임주스에 비해 약간 단맛이 느껴진다. 지금도 전통 김렛을 즐기려면 반드시 이 제품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게 요즘 바텐더들 생각이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에서는 보드카 김렛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워런이 보드카 김렛을 주문한 후 바텐더가 그것을 만드는 동안 화면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실제 등장하는 것 이상으로 칵테일 보드카 김렛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주문한 뒤 잠시 잔받침(coaster)을 바라보다 곧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이 퇴임을 앞둔 한 노년의 쓸쓸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 보드카 김렛 맛은 원어 뜻처럼 워런의 가슴속을 나사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고도 남을 만큼 짜릿하다.

이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흔히 김렛을 쓸쓸하거나 고독할 때 마시는 칵테일이라고 얘기 하는 사람까지 있다. 하지만 김렛의 그 ‘신랄한 맛’이 인생에서 진정한 재도약을 위해 충전 활력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주간동아 2014.02.17 925호 (p74~75)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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