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4

2014.02.10

‘엔저 리스크’ 산업계 빨간불

일본 기업들 본격적인 반격 움직임…내수 지출 확대 등 대비 늦추지 말아야

  •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hybae@lgeri.com

    입력2014-02-10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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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저 리스크’ 산업계 빨간불

    미국의 추가 양적완화 축소 결정으로 원·달러 환율이 1084.5원으로 급등한 2월 3일 서울 중구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

    지난해 하반기 이후 경제계 안팎에서 고착화하는 원고-엔저 흐름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높았다. 새해 미국 출구전략의 영향이 확산되면서 이 같은 분위기에 일정 부분 제동이 걸리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위험회피 성향이 확대되고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가 살아나자 엔화 환율은 1월 한 달 사이 달러당 105엔에서 101엔으로 하락했다. 반면 원화는 달러당 1050원에서 1080원으로 상승해 연초 일시적으로 1000원 선이 붕괴되기도 했던 원·엔 환율이 2월 들어 100엔당 1070원대로 올라섰다.

    엔저가 우리 수출에 미치는 영향도 과거와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과거 원·엔 환율 변화는 3~4개월 시차를 두고 우리 수출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 기업이 환율 변화를 수출단가에 반영하는 데 그 정도 시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1년 이상 원고-엔저가 우리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뚜렷하지 않다. 지난해 일본 수출 규모(달러 표시 기준)는 전년 대비 6.5% 감소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수출 2% 증가에 그쳤지만, 이는 엔저 요인보다 세계경기 부진에 따른 영향이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자동차·전기·전자 산업서 변화 감지

    그렇다면 엔저 리스크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더는 염려하지 않아도 좋은 것일까. 기업경영 일선과 산업현장의 전언을 들어보면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일본 기업의 본격적인 반격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그간 일본 기업은 엔저를 등에 업은 공세적 가격정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즉 단가 인하를 통한 시장 확대보다 수익성 개선에 주력한 것이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발생한 2008년 이후 달러당 70~80엔대에 이르는 ‘슈퍼 엔고’에 맞닥뜨린 일본 기업의 영업이익률은 2012년 평균 2%대까지 하락했다. 2012년 4분기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엔화는 달러 대비 31% 절하됐으나 일본 수출단가는 13.5% 인하돼 엔화 환율 변화의 수출 전가도는 40%에 그쳤다. 1990년대 수출 전가도가 70%에 육박했던 것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엔저가 장기 추세로 굳어질지 여부에 대한 확신이 없고 수익성 개선도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일본 기업이 달러 표시 수출가격을 대폭 인하하기는 어려웠던 셈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일 양국 모두 주력 업종으로 꼽는 자동차, 전기·전자산업을 중심으로 변화가 감지된다. 특히 자동차는 아직까지 엔저 효과가 크지 않지만 올해 안에 효과가 뚜렷해질 개연성이 높은 산업이다. 해외 생산보다 일본 수출 비중이 아직까지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데다, 한일 간 품질 격차가 크지 않아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올해 일본 자동차 기업들은 본격적인 단가 인하 공세와 더불어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엔저 리스크’ 산업계 빨간불

    히라이 가즈오 일본 소니 사장은 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2년 내 스마트폰 판매 세계 3위 업체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밝혔다.

    수익성 개선에 기반을 둔 공세적 전략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은 전기·전자산업에서도 서서히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일본 기업이 강점을 지닌 고성능 TV나 자동차 전장사업 등에서 신규 투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어 일본 기업이 다시 부상할 개연성이 높다. 스마트폰에서도 이들의 절치부심이 감지된다. 최근 일본 내수판매의 빠른 신장세로 힘을 축적한 만큼 다시금 세계시장을 겨냥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소니는 올해 세계 3위 스마트폰 업체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하면서 한국 시장에 2년 만에 신제품을 출시하고 나섰다.

    올해 중 원·엔 환율이 추가로 하락할 공산도 여전히 크다. 일본은 2013년 하반기 경기회복 속도가 둔화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3분기 국내총생산이 전분기 대비 0.5% 늘었는데, 이를 연간성장률로 환산하면 1.9%에 해당한다. 상반기 4.1%와 비교하면 상당히 저조한 수준이다. 회복 속도 저하는 4월로 예정된 소비세율 인상 시점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 세율 인상 전후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지출 쏠림 현상을 감안하면, 2분기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선택할 카드는 제한적

    이러한 경기 부담을 덜려고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BOJ)은 재정 확대와 더불어 현재 실시하는 통화완화정책을 더욱 확대,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BOJ가 2014년까지로 명시된 본원통화 확대 시한을 연장할 공산이 크고, 자산 매입 규모도 더 늘릴 수 있다. 향후 일본의 경기흐름과 그에 따른 통화정책 방향을 감안하면 국제금융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의 변동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변수로 꼽히는 미·일 양국 간 금리 차이는 더 확대될 개연성이 높다.

    반면 원화는 올해도 완만한 절상흐름이 예상된다. 당장은 미국의 출구전략 실행으로 국제금융시장 혼란과 강한 달러 압력이 엄습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달러 환율은 다시금 하락할 개연성이 높다. 경제성장률도 2012년 2.0%, 지난해 2.8%에 이어 올해는 3%대 중후반으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거시경제 여건을 감안할 때 원화절상을 기대하는 외국인 투자자금 유입도 더 늘어날 수 있다. 미국의 출구전략 부담에도 올해 원화 환율은 연평균 달러당 1030원, 원·엔 환율은 이보다 낮은 900원대 중·후반 수준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렇게 놓고 보면 원고-엔저 상황에 대응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매우 제한적이다. 사실 우리가 엔저 흐름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다. 필요한 경우 외환시장에 대한 적절한 개입을 통해 원화 가치의 과도한 절상 또는 절하에 대응하는 정도다. 이 같은 정책 환경에서는 단기적이든 중·장기적이든, 내수 부문 지출을 확대할 수 있는 정책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 전체의 저축과 투자 격차는 2012년 이후 평균 4%p에 이르는 초과저축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투자 부진이 우리 경제의 활력을 저하할 뿐 아니라 환율 문제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부채 부담을 안고 있는 가계나 공기업 등으로부터 추가 지출을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진부한 얘기 같지만, 수익성과 투자 여력을 갖춘 기업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도록 유인하는 정책이 여전히 시급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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