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1

2013.08.19

인천항의 간 큰 도둑들

수입상, 하역업체 짜고 500억대 철근 빼돌려, 인천항만공사 “사인 간의 계약 사안일 뿐” 모르쇠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13-08-16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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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항의 간 큰 도둑들

    지난 5년간 인천항만에선 500억 원대의 수입 철근이 무단 반출됐다.

    중국의 대표 종합무역상사인 Y사 한국법인의 김모(47) 대표는 요즘 한국 사람인 것이 부끄럽다. 모회사인 Y사가 3~4월 일본 철강회사 H사로부터 수입해 인천항(내항) 제3부두 하역장에 들여다놓은 53억 원어치의 철근을 국내 철근수입판매회사인 S사가 물품대금도 내지 않고 무단으로 가져가 국내 업체들에게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S사로부터 물품대금을 받으려 안간힘을 쓰던 김 대표는 별 진전이 없자 8월 말 S사를 사기혐의로, 민간 하역업체 C사를 횡령혐의로 경찰에 고소하는 한편,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 함께 진행할 계획이다. 이 사건 후 중국 Y사의 철강사업 부문과 한국법인은 존폐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처음부터 돈 낼 생각이 없었다?

    S사로부터 피해를 입은 중국 업체는 Y사만이 아니다. 같은 기간에 같은 방식으로 A업체는 65억 원어치의 철근을 빼앗겼고, B업체는 40억 원의 물품대금을 받지 못했다. 일본 철근 수출업체 H사도 40억 원의 피해를 입었다. 금액으로는 모두 198억 원, 수입된 철근 양만 3만2000t에 달한다. 여기에 S사로부터 철근을 받으려고 대금을 선지급한 한국 철근판매업체 9곳의 피해액 50억 원을 합치면 3월 이후 인천항만 제3부두에서 S사의 철근 무단 반출로 발생한 피해액만 모두 248억 원에 이른다.

    S사의 이런 행태는 중국에까지 알려져 국제적 망신을 사고 있다. 수입대금을 물어주거나 물건을 돌려달라는 피해업체 측 요구에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버티던 S사 조모 대표는 6월 말 중국에 들어갔다 공안당국으로부터 여권을 몰수당하고 출국이 금지됐으며, 중국수출입보험공사는 한국과의 수출입보험료 요율을 2배로 올려버렸다. 그만큼 한국과의 무역거래에 리스크가 커졌으며 국가 신인도도 추락했다는 의미다. 중국 공안당국은 조 대표가 가져간 철근 대금을 낼 계획을 완벽하게 마련하기 전까지는 출국을 허용하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S사는 “조금만 기다리면 돈을 내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과연 S사는 어떻게 돈 한 푼 내지 않고 수백억 원대의 수입물품을 국가(정부)가 소유, 관리하는 항만 부두에서 마음대로 빼돌릴 수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S사는 정부가 항만 운영 전권을 임대료를 받고 민간 하역업체(Terminal Operation Company·TOC)에 맡기는 제도를 악용했다. 철근 같은 무관세품목의 경우 수입물품을 선박에서 내려 국내로 반입하는 모든 과정에서 국가나 항만 측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관세품목이라 하더라도 수입상이 하역업체를 속이거나 공모하면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도 언제든 수입물품을 빼돌릴 수 있는 구조다.

    사건 발단은 자체적으로 수입 신용장(물품대금에 대한 은행의 지급 보증·L/C)을 개설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금 상태가 열악했던 S사가 중국 무역상을 통해 철근을 수입하면서 비롯됐다. 금융감독원 공시시스템에 따르면 S사는 지난해 결산조차 제때 하지 못해 외부 회계법인으로부터 ‘의견 거절’을 당할 만큼 재무상태가 엉망이었다. S사는 지난해 수입물품 대금을 제때 내지 않아 거래은행(신용장 개설은행)으로부터 신용장 개설을 거절당하자 올 3월부터 중국 종합무역상사인 Y사, A사, B사를 통해 일본 H사의 철근을 수입했다. 중국 업체가 대신 신용장을 개설해주고 물품대금을 내준 후 S사가 인천항 부두에서 철근을 찾아갈 때 거래은행을 통해 중국 업체에 대금을 지불하도록 계약을 맺은 것. 중국 업체들과 일종의 수입대행 계약을 맺은 셈이다.

    S사가 정상적으로 수입 철근을 부두에서 찾아가려면, 일본 수출업체가 선적한 철근이 인천항에 도착한 후 거래은행에 물품대금을 결재하고 선박회사가 발행한 선하증권(B/L)을 먼저 손에 넣어야 한다. 선하증권은 수출업자가 물품을 배에 선적한 후 선박회사로부터 발급받는 증권으로, 수출업자는 이 증권을 근거로 수입업자에게 물품대금을 청구하고, 수입상은 이를 넘겨받음으로써 수입물품을 인수할 권한이 발생한다.

    선하증권만 확보한다고 해서 수입상이 부두에서 물건을 바로 반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입상(S사)은 손에 넣은 선하증권을 가지고 선박회사의 한국 대리점을 찾아가 제시한 후 이를 근거로 화물인도지시서(D/O)를 받아야 하역업체에 물품 반출을 요구할 수 있다. D/O는 ‘Delivery Order’의 약어로 선박회사가 발행하며, 수입상이 물품대금 결제를 완료하고 선하증권을 제시하거나(D/P 방식), 은행의 지급확약(L/G)이 있는 경우에 한해 하역업체에게 수입상 측에 물품을 내줘도 좋다고 인정해주는 일종의 수입물품 반출 승인 허가서류다.

    인천항의 간 큰 도둑들
    하역업체가 무단 반출 공모한 까닭

    하지만 S사는 거래은행에 수입물품 대금을 지급하거나 은행의 지급확약을 받지 않은 채, 다시 말해 선하증권이나 화물인도지시서를 확보하지 않은 채 하역업체가 보관 중이던 일본 H사의 철근을 모조리 빼가버렸다. 이 과정에서 민간 하역업체인 C사는 S사로부터 화물인도지시서도 받지 않고 철근을 내줬다. 왜 그랬을까. 하역업체 C사 관계자는 “S사와는 거래한 지 오래됐다. 거대 수입상인 S사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도 당했다. S사 측이 외상거래(D/A 방식)라고만 밝혀 화물인도지시서를 받지 않고 내줬다. S사가 수입물품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S사와 공모한 게 아니라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하역업체 C사가 말하는 D/P 방식과 D/A 방식은 수입물품의 대금 지불방식의 하나일 뿐, 법적으로 민간 하역업체는 어느 방식의 거래이든 화물인도지시서를 받은 후 하역장에 있는 물품을 수입상에 반출하도록 규정한다. D/P는 ‘Document against Payment’의 약어로, 수입상이 은행에 물품대금을 먼저 결제하면 선박회사가 발행한 선하증권을 발급해준다는 개념이고, ‘Document against Accep tance’의 약어인 D/A는 수입상이 물품대금 결제나 은행의 지급보증 없이 먼저 선하증권을 수취한 후 일정기간(3~6개월) 이후에 대금결제를 하는 일종의 외상거래라고 볼 수 있다.

    S사는 중국 무역업체 Y사 및 A사와는 D/P 방식으로 계약을 맺었고, B사와는 D/A 방식으로 계약을 맺었지만 그 어느 경우도 물품을 반출해가면서 화물인도지시서를 건네주지 않았다. 실제 S사는 자신의 거래은행에 물품대금을 내지도 않았고 지급보증도 받지 않았다. 당연히 선하증권이나 화물인도지시서는 받을 수 없는 상황. 그런데도 하역업체 C사는 수입물품 반출에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서류를 갖추지도 않은 채 하역장에 보관 중이던 200억 원 상당의 물품을 내준 것이다. “우리도 피해자”라는 하역업체 C사의 해명에도, 피해업체들이 수입상 S사와의 공모 의혹을 제기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다만 S사가 대한통운, 한진해운 등 인천항 내항 부두의 11개 민간 하역업체(TOC) 가운데 가장 영세한 C업체를 하역업체로 선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현재 인천항만공사가 실시하는 TOC 제도 하에서 영세 하역업체는 매출액 증가와 물동량 확보 때문에 수입상의 억지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C사 관계자는 “오래 거래를 해 잘 아는 업체였고, 하역수수료를 다른 업체보다 t당 1000원 더 준다고 해서 S사의 반출 요구를 받아들였다. 현행 TOC 제도 하에선 S사 같은 거대 수입상은 우리 같은 영세 하역업체에게는 ‘슈퍼 갑(甲)’일 수밖에 없다. 화물인도지시서 없이 물품을 내주는 건 일종의 관행”이라고 말했다.

    S사 측은 수입품 무단 반출에 대해 “회사 자금 상황이 갑자기 어려워져 벌어진 일이다. 회사 대표가 중국에서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뭐라고 답변하기가 곤란하다”고 해명했다. ‘주간동아’는 조 대표의 반론을 들으려고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수년간 260억 원 무단 반출, 관행화

    인천항의 간 큰 도둑들

    500억 원대 철근 무단 반출사건이 일어난 인천항만 제3부두.

    문제는 “수입물품 무단 반출이 관행이었다”는 하역업체 C사 관계자의 말처럼 수입상의 수입물품 무단 반출사건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피해금액도 수백억 원 단위다. 2008년 일본 H사는 한국의 철근 수입상 D사가 자신이 수출한 철근 1만t, 시가 140억 원 상당을 대금 지급 없이 인천항만에서 무단 반출해갔다며 형사소송과 함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으며, 현재 3심(H사 1심 패소, 2심 승소)이 진행 중이다. 당시 일본 H사가 수출한 철근의 하역을 담당했던 민간 하역업체 F사는 화물인도지시서 없이 수입 철근을 D사에 내줘 공모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에도 S사와 같은 방법으로 수입 철근을 무단 반출한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업체도 중국 무역중개상 3곳, 일본 철근 생산업체 1곳, 국내 철근 판매회사 4곳 등으로 비슷했다. 피해액은 철근 1만5000t, 120억 원이었다. 철근을 무단 반출해간 한국 수입상 G사는 사건 발생 후 중국 업체 3곳의 피해액 70억 원을 변상 조치했지만 일본 철근 생산업체와 국내 업체의 피해액 50억 원은 아직 갚지 못했다. 당시 G사에 화물인도지시서 없이 철근을 무단 반출한 민간 하역업체가 바로 올해 발생한 S사 사건의 C사였다.

    무역업계 한 관계자는 “인천항만뿐 아니라 전국 주요 항만에서 영세 민간 하역업체에 의한 수입물품 무단 반출은 비일비재하다. 당장 현금 동원력이 없는 수입상들이 민간 하역업체와 짜고 물품을 반출했다가 수출사가 소송에 들어가겠다거나 실제 소송에 들어가면 그때서야 물품대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인천항을 관리하고 민간 하역업체를 선정하는 인천항만공사 관계자는 “우리는 부두 운영의 모든 관리권을 민간 하역업체에 넘겼다. 이번 일은 수출입 회사 간 벌어진 계약 위반 사안일 뿐 우리는 책임이 없으며 개입할 법적 근거도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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