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7

2013.07.22

美 지머먼 인종갈등 방아쇠 당기나

흑인 소년 총으로 살해사건 정당방위로 평결 히스패닉과 흑인 사사건건 갈등 또 다른 뇌관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3-07-22 11:3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美 지머먼 인종갈등 방아쇠 당기나
    미국이 인종갈등으로 신음한다. 오랫동안 미국 사회의 숙제였던 이 문제는 이제 흑인 대 백인이라는 도식적 구도가 아닌, 흑인 대 히스패닉(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중남미계), 흑인 대 아시안 등으로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전통적인 흑백갈등도 아직 치유되지 않았는데 소수인종 간 분열과 대립이라는 새로운 문제까지 등장한 셈이다. 특히 무장하지 않은 흑인 소년을 총격 살해한 히스패닉계 백인 조지 지머먼(29)이 7월 13일 무죄 평결을 받아 흑인 사회의 엄청난 분노를 샀고,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2012년 2월 26일 오후 7시 9분경. 흑인 소년 트레이번 마틴(17)은 부친의 약혼자가 거주하는 미국 플로리다 주 소도시 샌퍼드의 한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차를 타고 동네를 순찰하던 지머먼은 낯선 흑인 소년이 집을 기웃거리며 걷는 모습을 보고 911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소년이 뭔가 나쁜 짓을 할 것처럼 보인다. 마약 등을 한 것 같다”고 신고했다.

    백인 아버지와 페루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이곳에 거주하는 지머먼은 경찰의 허락을 받아 자율방범대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경찰은 기다리라고 했지만 지머먼은 차에서 내려 소년을 따라갔다.

    흑인 분노, 곳곳에서 시위 벌어져



    지머먼은 마틴과 몸싸움을 벌였고, 이를 목격한 주민이 오후 7시 16분경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 전화 녹음 내용에 따르면 “도와달라”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 뒤 총성 2발이 울렸다. 1분 뒤 경찰이 도착했으며 7시 30분경 마틴이 숨진 것을 확인하고 지머먼을 연행했다. 당시 코피를 흘리던 지머먼의 머리 뒷부분에는 찢어진 상처가 2곳 있었다.

    지머먼은 “마틴이 먼저 나를 주먹으로 공격했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마틴은 후드티를 입고 손에는 세븐일레븐에서 산 음료와 스키틀스를 들고 있었을 뿐 완전한 비무장 상태였다. 경찰은 지머먼의 정당방위론을 뒤집을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그는 5시간 뒤 풀려났다. 흑인 사회 등의 반발이 거세지자 특별검사로 지명된 앤절라 코리가 44일 뒤인 2012년 4월 11일에야 지머먼을 2급 살인혐의로 기소했다.

    사건 쟁점은 지머먼이 정당방위를 주장할 만큼 숨진 마틴이 위협적인 행동을 했는지 여부다. 마틴 측 변호사는 “무기도 들지 않은 17세 소년이 체구가 큰 성인 남성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근거가 무엇이냐”며 그를 코너로 몰아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역시 “내게 아들이 있었다면 마틴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라며 마틴 편을 들었다.

    하지만 백인 여성 5명, 히스패닉 1명 등 6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7월 13일 지머먼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배심원단은 지머먼의 변호인단이 정당방위 근거로 제시한 ‘자기방어법(Stand your ground law)’에 근거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법은 자신이 위협을 느낄 만한 충분한 판단이 들 때 자기방어에 나서는 것은 위법이 아니라는 내용을 담았다.

    흑인 사회는 분노했다.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LA), 보스턴, 시카고, 애틀랜타 등 미국 주요 도시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1991년 ‘로드니 킹 사건’(백인 교통경찰이 비무장한 흑인 킹을 구타해 대대적인 흑백갈등을 초래)이 벌어진 LA에서는 분노한 흑인 시위대가 10번 고속도로를 일시 점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플로리다 주법원 판결로 사건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이번 판결과 별도로 법무부가 사건을 계속 조사하고 있어 연방법원에서 다시 다뤄질 공산이 크다. 마틴 가족도 민사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번 사건의 표면적 쟁점은 선제적 총기 사용을 허가한 플로리다 주의 ‘자기방어법’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면을 자세히 들어다보면 미국 사회가 점점 다원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소수인종의 핵심이던 흑인 사회와 새롭게 떠오른 히스패닉 간 대립이 강하게 깔렸다.

    일자리 두고 아슬아슬한 대치

    2000년대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최다 소수인종은 단연 흑인이었다. 하지만 중남미로부터 히스패닉계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된 데다 가톨릭의 영향으로 다산(多産)을 중시하는 이들이 빠른 속도로 인구수를 늘림으로써 히스패닉계가 흑인 지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미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 미국 인구 약 3억 명 가운데 12.3%를 차지하던 흑인이 2010년에는 12.6%로 0.3%p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같은 기간 히스패닉계는 12.5%에서 16.3%로 대폭 늘어나 압도적인 최다 소수인종 자리를 굳혔다.

    히스패닉계 인구의 증가는 정치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미국 내 히스패닉의 75% 이상은 멕시코 국경과 가까운 남서부 주에 몰려 있다. 특히 미국 대통령선거(대선)에서 전체 선거인단 538석 중 가장 많은 선거인단을 보유한 캘리포니아 주(55석)와 그다음인 텍사스 주(38석)에서는 히스패닉의 입김이 절대적이다. 텍사스는 주 인구의 60% 이상이 히스패닉이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이자 2016년 미국 대선의 강력한 공화당 후보로 거론되는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가 주목받는 이유 또한 그의 부인이 멕시코 출신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히스패닉계에게 선심을 사려고 혈안이라 어지간한 정치인은 공개석상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로 두 번 인사하곤 한다. 이 역시 흑인의 소외감과 울분을 키웠다.

    결정적 갈등은 일자리를 두고 나타났다. 흑인이 수적으로 열세가 된 데다 블루칼라 일자리를 놓고 밀려드는 히스패닉과 경쟁하면서 두 인종 간 갈등은 폭발 직전이다. 이런 흑인의 피해의식은 범죄로까지 이어져 2005년 조지아의 한 농장에서 일하던 멕시코 이민자 6명이 흑인 4명에게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흑인은 수 세기에 걸친 고난의 역사와 민권운동을 통해 자신들이 어렵게 자리 잡은 미국이라는 땅에 갑자기 히스패닉계가 등장해 일자리와 사회적 지위를 빼앗는다고 분개한다. 반면 히스패닉은 흑인이 일자리를 잃는 이유는 그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인데도 애꿎은 히스패닉만 탓한다고 맞선다. ‘뉴욕타임스’는 “인종 갈등이 미국 사회의 인종 편견을 확대재생산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탄생하고 그가 올해 초 재선에 성공했지만, 고질적인 흑백갈등은 여전하다. 대표적 사례가 2009년 8월 자기 집에 들어가려다 체포된 미국 흑인학의 선구자 헨리 루이스 게이츠 하버드대 교수 사건이다.

    기존 흑백갈등도 여전

    1997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25명 중 1명’으로 꼽기도 한 게이츠 교수는 닫힌 자택 현관문을 강제로 열다 출동한 백인 경찰에게 체포됐다. 사건의 파장이 가라앉기도 전 오바마 대통령은 게이츠 교수를 체포한 백인 경찰에 대해 “어리석다”고 말했다. 이는 백인들에게 큰 반발을 샀고, 대통령이 중립을 지키지 못한 채 사건 파장만 키웠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그는 인종 관련 발언을 가급적 자제해왔다.

    2013년은 미국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지 150주년,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을 한 지 50주년을 맞는 중요한 해다. 집권 1기에 인종문제와 관련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평가받는 오바마 대통령은 지머먼 사태에서도 큰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이민개혁법(미국 내 1100만 명에 달하는 불법이민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대신, 추가 불법이민을 막으려고 멕시코 국경 수비를 대폭 강화하는 법안) 또한 공화당 반대로 하원 통과가 불투명하다.

    과연 오바마 대통령이 인종갈등이라는 난제를 풀 수 있을까. 상황은 녹록지 않다. 크리스토퍼 에들리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교수는 “흑인 대통령 입에서 나오는 인종 관련 발언이 부작용과 논란만 더한다”며 “오바마가 경제와 외교에 치중하고 인종 등 사회문제에서 멀어지는 정치적 타협을 할 개연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1991년 ‘로드니 킹 사건’은

    LA 폭동 유발시킨 피해자… 47세에 세상 떠나


    美 지머먼 인종갈등 방아쇠 당기나

    로드니 킹(왼쪽)과 그가 경찰에게 몰매를 맞는 모습.

    ‘로드니 킹 사건’은 199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최대 도시 로스앤젤레스(LA)에서 흑인 청년 킹을 무차별 구타한 백인 경찰관 4명이 이듬해 무죄 평결을 받아 LA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난 사건이다. 미국 사회의 인종갈등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가장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1991년 3월 3일 당시 26세의 흑인 청년 킹은 술에 취해 과속 운전을 하다 경찰의 정지 명령을 무시한 채 달아났다. 강도 유죄 판결을 받고 가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도주하다 얼마 못 가 경찰에 붙잡힌 그는 로런스 파월 등 백인 경찰관 4명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것은 물론 전기충격기에 의한 공격까지 받았다. 당시 이 광경을 본 한 시민이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장면이 TV 전파를 타면서 흑인은 물론, 전 미국이 들끓기 시작했다.

    경찰관 4명은 곧 공권력 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됐지만 1년 뒤 이들의 재판 결과는 사태를 더욱 악화했다. 1992년 4월 29일 전체 12명 가운데 10명이 백인이던 배심원단은 경찰관 4명에게 전원 무죄 평결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LA 지역 흑인이 들고 일어나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사건이 미국에서 최악의 인종 폭동으로 꼽히는 ‘LA 폭동’이다. 폭동 기간은 사흘에 불과했지만 이로 인해 53명이 사망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재산 피해액이 10억 달러(약 1조1500억 원)에 이를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이 사건이 더 큰 조명을 받은 이유는 당시 LA 흑인 거주지역과 가까웠던 LA 한인타운 역시 흑인의 집중적인 습격을 받아 흑백 갈등뿐 아니라 흑인과 아시아인 등 유색인종 간 갈등도 미국 사회의 잠재적인 시한폭탄임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당시 한인타운에 있던 한인가게 3000여 개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한인교포 이재성(당시 18세) 씨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킹은 이 사건으로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급부상했지만 그의 사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1994년 미국 정부로부터 380만 달러라는 적지 않은 보상금을 받았지만 계속되는 사업 실패, 음주 문제 등으로 고생했고, 급기야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2007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샌버너디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저격을 당해 한 차례 수술까지 받았다.

    킹은 2011년 LA 폭동 20주년을 맞아 자신의 경험을 ‘폭동의 와중에서 : 반란에서 구원에 이른 내 여정’이라는 책으로 펴내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는 2012년 6월 또 한 번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47세 젊은 나이였던 킹이 LA 위성도시 리앨토의 자택 수영장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킹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경찰은 사고 당시 그의 약물 및 음주 문제가 심각했으며 이로 인한 익사가 사망 원인이라고 추정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