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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형 연재소설

아홉 마디 @오메가

제8화 설순의 그림자

아홉 마디 @오메가

누구에게나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나 보다. 넋을 잃고 순의 얼굴만 떠올리는 시간이 늘더니 거리에서 순을 닮은 여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순이 아닌데….

개성공단이 다시 열릴 날만 기다릴 수 없었다. 열리더라도 순이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필승은 수소문 끝에 브로커 한 명을 만났다. 그는 사람들이 붐비는 잠실역을 만남의 장소로 정했다. 필승은 그와 마주 앉았다.

“장마당 보따리장수로 위장해 북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야 하는데 잡히면 목숨까지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래도 가겠습니다. 가기 전에 소재 파악을 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야 하거든요.”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필승은 그에게 설순의 개성공단 봉재공장 근무 이력과 개성의 고려 성균관 안내원 이력을 알려주었다.

“혹시 사진은?”

브로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지만…. 괜찮을까요?”

“보통 사람이 갈 수 없는 땅에 사는 사람을 찾는 일이에요. 있으면 일이 쉬워지죠.”

필승은 생각하느라 잠시 고개를 들었다. 행인이 참 많았다.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필승 쪽을 지나가는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순의 모습이었다. 필승은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필승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아뇨, 하도 닮아서요.”

필승은 스마트폰에서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둘만의 비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인데 앵글에 따라 느낌이 제각각이다. 입맞춤을 하며 억지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우스꽝스러운 사진에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필승은 증명사진 같은 사진 한 장을 브로커에게 전했다.

브로커는 가고 필승은 그 자리에 더 머물러 있었다. 좀 전의 그 여자가 혹시 순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멀리서 봤지만 순과 정말 많이 닮았다.

다림은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았다. 사실 확인만 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기록, 그것이 남남북녀 이야기라면 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게 기자의 시대의식이라 여겼다. 다림과 마주 앉은 보라가 시계를 들여다봤다. 약속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그때 필승이 허겁지겁 카페로 들어왔다.

“보라한테 들었는데 남남북녀 이야기, 최근 일인가요?”

다림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괴담 수준의 이야기일지 몰라요.”

필승은 남의 이야기인 양 대답했다.

“괴담이라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란 거죠. 지어낸 이야기든가요.”

“보라에게 한 말은 뭐죠?”

“개성공단 앞날이 암담해서 재미로 해본 말인걸요.”

분명히 냄새는 나는데 털어놓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선 화제를 돌려 본론으로 들어가야 상대의 입이 열린다.

“필승 씨는 개성공단에서 얼마나 근무하셨죠?”

“삼 년쯤 됐습니다. 알바로 시작했는데….”

보라가 필승을 빤히 쳐다봤다.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삼 년 전이면…. 예쁜 북한 여자 만난 적 있다고 떠들고 다닌 그때쯤 아냐?”

“뭐라고? 음, 그랬었지. 다 지난 얘기야.”

“난 네가 왜 개성공단에 취직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어. 오라는 데가 많았잖아. 혹시 남남북녀 연애 사건, 네 얘기 아냐?”

필승은 보라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림도 침묵했다. 필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림은 더는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필승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보라야,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제발. 나 지금 정말 힘들다. 부탁해, 보라야.”

여옥이 전화를 받아보니, 군부대에 함께 갔던 그 경찰관이었다. 만나고 싶다며 사무실로 오겠다고 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회사에서 경찰관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여옥이 그를 찾아갔다.

“필승이란 친구, 너무 나대는 것 같아요. 중국 간다면서요?”

“그렇습니다만…. 그 친구 감시하고 있나요? 왜죠?”

“혹시나 해서요.”

“혹시라뇨?”

“그 이야기가 신문에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기자들이 이야깃 거리를 찾아다니고 있어요. 필승이와 같은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경찰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번호를 확인한 그가 여옥에게 양해를 구한 후 자리를 회의실로 옮겼다.

“….”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경찰관은 열심히 듣는다.

“그게 사실이구나. 난 넘겨짚고 한 말인데.”

“….”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를 달래는 모습이다.

“네 심정 알지만 기다려줘. 때가 오면 알려줄게. 많이 걸리진 않을 거야.”

“….” 경찰관은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잘하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될 수 있으면 돌아다니지 말고…. 들키면 안 되지. 꼭꼭 숨어 있어야 해.”

경찰관이 돌아와 여옥과 마주 앉았다.

“기자들이라니, 무슨 말씀이죠?”

“여하튼 행동 조심시키세요. 필승이한테 물어보면 알 거예요.”

“그 편지 공개하고 필승이 마음 접게 하는 게 어때요?”

“무슨 말씀이세요? 큰일 납니다. 아직은 안 돼요.”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여옥은 필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홉 마디 @오메가

일러스트레이션·오동진

쾌락과 퇴폐라는 이름이 따라다니지만 도회지 뒷골목은 명물이다. 장터처럼 사람 냄새가 풍긴다. 골목에 들어서니 여옥이 일러준 간판이 보인다. 필승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술잔을 기울이는 여옥이 보인다.

“순을 잊고 좋은 여자 만나봐.”

여옥의 첫 마디였다. 필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옥은 필승의 잔에 막걸리를 가득 따랐다.

“필승아, 사실은 말야….”

여옥이 핸드백을 연다. 뭔가 꺼낼 듯하다가 그냥 닫는다.

“아냐, 마셔.”

여옥과 필승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필승아, 순이 많이 보고 싶지?”

여옥의 눈에 필승이 참 애처로워 보였다. 딱하기도 했다.

“거리에 순을 닮은 여자가 왜 그렇게 많은지….”

필승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잊어. 다 부질없는 일이야.”

여옥은 다시 핸드백을 열었다. 그 편지는 비닐봉투에 담긴 채 그 자리에 있었다. 여옥은 손을 뻗어 그 봉투를 잡았다. 그러나 꺼내지 못하고 다시 핸드백을 닫았다. 술잔이 다시 오갔다.

“나도 여자지만 너 같은 순정파가 좋더라.”

여옥은 자신의 마음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하하….”

필승은 웃다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앨범을 여옥 앞에 내밀었다.

“사진 좀 봐.”

여옥은 사진을 넘기며 둘의 관계를 그려봤다. 여옥은 끝내 순이 필승에게 남긴 유서 같은 편지를 꺼내지 못했다. 둘은 주점을 나와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필승은 누군가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순의 그림자가 저만치 서 있었다. 필승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 눈을 비비며 여옥을 불렀다.

“누나, 저, 저기….”

“왜 그래, 갑자기?”

여옥의 눈이 필승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곳에 순이 서 있었다.

“저기 순이 아냐? 야, 순아!”

여옥은 순을 부르고, 필승은 순을 향해 달렸다. 여옥은 생각한다. 분명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순의 유령인가.

“필승아, 아냐. 순일 리 없어. 설순이 아니란 말야.”

여옥은 달려가는 필승을 향해 소리친다.



주간동아 897호 (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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