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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탈북자의 절규 01

“씻기 힘든 ‘2등 국민’ 낙인…죽더라도 가고 싶다”

인터뷰 | 재입북 최초 공개 예고 손정훈 북한이탈주민비전네트워크 대표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씻기 힘든 ‘2등 국민’ 낙인…죽더라도 가고 싶다”

“씻기 힘든 ‘2등 국민’ 낙인…죽더라도 가고 싶다”
차 열쇠, 스마트폰, 야구 모자, 메탈 손목시계. 7월 1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손정훈(49·사진) 씨의 소지품만 보고는 그가 재입북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탈북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2002년 대한민국에 정착해 외아들과 단둘이 살아온 그의 직업은 북한인권 활동가.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국장,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정책실장, 탈북인단체총연합 사무총장을 거친 뒤 2011년부터 북한이탈주민비전네트워크 대표로 활동한다.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진행하는 3시간 동안 여러 번 “북한 주민과 탈북자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강조했다.

간경화 말기 시한부 선고받아

그가 7월 초 언론을 통해 재입북 의사를 밝힌 이유는 뭘까.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갈 수도 있었지만 북한인권 활동가인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탈북자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이 ‘탈북자 리더도 체제 적응을 못해 결국 떠나는데 일반 탈북자는 오죽할까’라고 오해할 것을 우려했다.

“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 통과를 촉구하려고 재입북을 택했다. 2005년 발의된 그 법안이 통과됐다면 라오스에서 북송된 탈북 청소년들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북한인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국민도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

최근 보도된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손 대표가 재입북을 결심한 이유는 탈북 브로커에게 지급한 돈 때문”이다. 사실 여부를 묻자 그는 “절대 아니다”라고 답했다. 사업 실패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졌다면 모를까, 돈 850만 원 때문에 떠나는 것은 아니란 설명이다. 그는 2009년 탈북 브로커에게 탈북 여성 A씨가 한국까지 오는 데 필요한 850만 원에 대한 보증을 섰고, 병에 걸린 A씨 대신 채무변제 소송을 당한 뒤 임대아파트 보증금 등을 압류당한 상태다.



“선의로 보증을 서준 뒤 브로커 비용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한 교회에서 500만 원을 모금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악덕 브로커에게 그 돈을 줄 수는 없다. 남한에 데려오는 데 500만 원이면 충분한데 웃돈을 요구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 난 절대로 돈 때문에 정치적인 인생을 바꾸지 않았다. 지인들을 동원하면 돈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그가 재입북 의사를 밝힌 중요한 배경에는 건강문제가 있는 듯하다. 현재 간경화 말기로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1년에서 3년 사이다. 게다가 기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공개 총살당한 형에 대한 그리움 등 심리적 불안으로 불면증과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2005년 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이후 정부로부터 매달 생활보조금 60여만 원을 받으며 우울증 약을 복용했지만 그마저도 간 상태를 악화할 수 있어 중단했다. 수면·우울증장애가 있는 그는 요즘도 새벽 3시를 넘겨서야 잠이 든다.

“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으며 현 상태를 유지할 뿐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의사가 간 상태를 정밀하게 보자고 했지만 CT, MRI 등 관련 검사를 하려면 200여만 원이 든다기에 포기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부모형제를 찾지 않나. 북에는 현재 83세인 어머니와 누나 2명, 여동생 2명이 산다. 북한으로 돌아가면 처벌받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가고 싶다. 죽더라도 만나고 죽고 싶다.”

현재 우리 정부가 파악한 재입북자는 9명. 하지만 그가 파악한 재입북자 수만 70~80명에 이른다. 대부분 중국에서 3~4년 살다 남한에서 1~2년 생활한 사람들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이유로 돌아간다는 설명이다. “그 사람들을 두만강까지 바래다준 사람들이 여기 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했다.

그는 재입북하려고 3가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먼저 통일부에 방북출입허가를 신청한 뒤 허가서를 받아 합법적으로 입북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개인 자격이기 때문에 허가받는 일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허가서를 받지 못하면 국적을 포기할 생각이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재입북을 시도하면 대한민국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적을 포기하면 한국 땅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마저도 무산되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의견을 표명하면서 정부와 정치권 반응을 기다릴 계획이다. 그는 “북한 관련 사안을 인권적으로 해결해달라”고 촉구했다.

부모형제 마음껏 만나고 파

“씻기 힘든 ‘2등 국민’ 낙인…죽더라도 가고 싶다”

손정훈 북한이탈주민비전네트워크 대표는 탈북자를 북송하는 중국을 비판하려고 베이징올림픽 성화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2008년 4월 28일 30여개 시민단체가 베이징올림픽 반대 기자회견을 하는 것으로 손 대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그렇다면 그는 왜 탈북을 했던 것일까. 할아버지가 항일혁명투사이고 장인이 사회안전부(한국 경찰청에 해당)에서 근무했던 터라 부부의 출신 성분은 누구보다 좋았다. 평양공업대 경제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줄곧 무역 일을 하며 평탄하게 살았다.

하지만 국가체육위원회(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 해당) 류경합영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오해를 사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갈 상황이 벌어져 탈북을 결심했고, 이런 계획을 눈치 챈 처가는 손씨 부부의 이혼을 종용했다. 가족이 연좌제로 어려움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후 친척이 사는 중국으로 피신한 그는 세 살배기 아들을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아내는 이혼해 연좌제 적용을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혈육인 아들은 대학도, 군대도 못 가고 조선노동당에도 입당하지 못할 우려가 컸다. 그는 끝내 형에게 아들을 인계받았다.

“우리 아들이 지금도 잘났지만 그때는 곰인형처럼 예뻤다. 그래선지 입양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중국에서 일하던 탈북자들이 동료의 신고로 북송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북송될까 봐 어디에 나가 돈도 벌어오지 못했다. 친척들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았고, 불안감 때문인지 아들을 엄하게 대했다. 중국 아가씨와 결혼할 기회를 아들 때문에 포기할 정도로 아들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가 중국 체류 5년 만에 한국행을 강행한 이유도 아들에게 합법적인 국적을 주기 위해서였다. 중국에서 무국적 상태로 지내면 아들이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물론 그전에도 한국행을 시도했다. 1997년 중국에 입국해 99년 상하이 한국총영사관, 칭다오 한국총영사관을 찾아갔던 것이다. 다섯 살짜리 아들 손을 붙잡고 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후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이 외교적 사안 때문에 탈북자들을 북송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남한 기자의 귀띔에 강제진입을 시도했다.

아들 남겨두고 홀로 떠날 계획

“씻기 힘든 ‘2등 국민’ 낙인…죽더라도 가고 싶다”
“지인 소개로 만난 남한 기자는 어린 아들과 함께 강제진입을 하면 아이가 위험할 수 있다며 나 먼저 한 뒤 나중에 아들을 데려오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중국에 아이가 혼자 있다가 유괴될 수도 있고, 자칫 잃어버리면 찾을 길도 막막할 것 같아 무작정 데리고 진입했다. 그때 우리를 사법경찰하고 중국공안 8명이 끌어냈는데 어른인 나를 어쩌지 못하니까 아이 팔을 잡아 빼는데….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밖이 소란스러우니까 영사가 나와서 우리에게 ‘이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고 말하자 상황이 해결됐다.”

이후 그는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탈북자 40여 명과 한 달 동안 머무르다 중국 외교부의 출국심사를 받으며 북한에서 수배당한 사실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뒤 마침내 2002년 남한으로 왔다. 그는 “보란 듯이 아들을 잘 키우고 싶었다”고 했다.

“차를 좋아해 북한에서 관용차로 벤츠, 볼보 등을 싫증날 정도로 운전했던 터라 카센터에 취직했다. 구인광고를 보고 취업을 시도했지만 탈북자라고 하면 거절당했기에 담당 형사 소개로 일했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는 남한 사람이 월 170만 원을 받고 나는 월 100만 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문제 삼으면서 6개월 만에 그만뒀다. 다행히 이후 구인광고를 보고 호텔 주차요원으로 취업해 월 130만 원을 벌었다. 보수는 적었지만 담당자가 자기 부모가 실향민이라면서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회사가 파산해 그만뒀다. 그러곤 2달 동안 일자리를 찾았으나 탈북자라는 신분을 말하면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탈북자 가운데 간첩이 100여 명이 있다’는 기사가 보도된 바람에 탈북자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그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물질적 부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더는 들지 않았다고 한다. 도리어 ‘탈북자의 권익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깊숙이 탈북자 인권에 몸담아 오늘날까지 일한다. 탈북자 인권단체에서는 50만 원도 받고 150만 원도 받아봤지만 세 번째, 네 번째 단체에서 일할 때는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채 비전만 보고 일했다. 그는 ‘탈북자 북송하는 중국 비판하기 위한 베이징올림픽 성화 반대 운동’ ‘탈북자 의료지원 축소 법안 통과에 따른 국회 자동차 진입 시위’ 등 과격한 시위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북한인권 활동을 지속하면 되지 않을까. 그는 “그간 10년 동안 남한 사회에 북한 주민과 탈북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려고 노력했지만 남한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며 강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그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의 대학 진로 시기와 자신의 재입북 시기가 겹쳐 고민이라고 밝히면서도 재입북을 강하게 피력했다.

“난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들이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들을 북한으로 데려갈 생각도 없다. 처벌받더라도 내가 받아야지 아들에게 짐을 지울 수는 없다. 가능하면 아들이 다른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탈북자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 상처를 많이 받았다. 돌이켜보면 아들 목숨을 걸면서까지 여기 올 필요가 없었다. 미국이나 유럽에 갔더라면 지금처럼 자기 민족에게 차별받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주간동아 2013.07.22 897호 (p8~10)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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