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5

2013.04.29

생전에 가짜 그림 판쳐 겸재 정선도 기가 막혀!

작품 위조하고 베끼고, 화첩에도 버젓이 넣어 감상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4-29 14:0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생전에 가짜 그림 판쳐 겸재 정선도 기가 막혀!

    1 1960년 출간된 ‘개자원화전’에 실린 난시준. 2 필자가 ‘주간동아’ 883호에서 제시한 난시준. 3 신화첩본 ‘연강임 술첩’의 정선 발문.

    ‘주간동아’ 883호에서 필자는 겸재 정선(1676~1759)의 산수화 감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로 그의 ‘미친 듯이 빠르게 그리는 난시준’을 꼽았다. 그 후 한 학생이 1960년 중국 베이징 인민미술출판사(人民美術出版社)에서 출간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에 실린 난시준(그림1)과 필자가 제시한 ‘그림2’가 다르다며, 왜 다른지에 대해 질문했다. ‘그림1’과 ‘그림2’는 언뜻 봐도 다르다. 특히 ‘그림1’은 ‘그림2’와 달리 필획의 끝을 붓글씨의 ‘ㅣ’처럼 삐친 부분이 전혀 없다.

    난시준이 실린 ‘개자원화전’ 1집은 난징 화가인 왕개(王槪·? ~?)가 그려 1679년 간행한 것이다. 당시 여러 번 정교하게 인쇄됐지만 현재는 남은 게 거의 없다. ‘그림2’는 1679년 간행한 ‘개자원화전’을 1782년 이전에 쑤저우 조씨서업당(趙氏書業堂)에서 다시 새긴 것으로, 현재 미국 넬슨 갤러리에 소장돼 있다. 1887년엔 상하이 화가 소훈(巢勳·1852~1917)이 이미 훼손된 ‘개자원화전’을 직접 베껴 석판본으로 간행했다. 학생이 제시한 ‘개자원화전’은 바로 이를 영인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봤던 ‘개자원화전’은 이 책이거나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이다.

    ‘난시준’ 이해 못 한 위조자들

    생전에 가짜 그림 판쳐 겸재 정선도 기가 막혀!

    4 ‘연강임술첩’ 산화첩본의 가짜 ‘우화등선’. 5 정선이 1742년 그린 ‘우화등선’.

    소훈이 난시준을 모른 채 따라 그렸듯, 위조자들도 정선의 ‘미친 듯이 빠르게 그리는 난시준’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짜를 만들었다. 2011년 12월 서울 견지동 동산방화랑 ‘조선후기 산수화전’에 나온 정선의 ‘연강임술첩’ 신(新)화첩본의 ‘우화등선’과 ‘웅연계람’은 바로 위조자가 그의 난시준을 모르고 베낀 가짜다.

    ‘연강임술첩’은 1742년 음력 10월 보름날 정선이 일행과 함께 임진강 상류에 있는 우화정(羽化亭)에 모여 배를 타고 내려와 해질녘 웅연(熊淵)에서 달을 보며 뱃놀이를 하고, 이를 그린 것이다. 정선의 글에 의하면 그는 ‘연강임술첩’ 세 벌을 그려 자신과 함께 뱃놀이를 했던 홍경보(1692~1745), 신유한(1681 ~?)과 각각 나눠 가졌다. 따라서 이미 알려진 구(舊)본 ‘연강임술첩’ 한 벌 외에 앞으로도 두 벌이 더 나올 수 있다. 그러나 2011년 동산방화랑 전시에 나온 신화첩본을 보면, 정선의 글씨(그림3)만 진짜고 ‘우화등선’(그림4)과 ‘웅연계람’은 가짜다.



    이 전시를 기획한 미술사가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신화첩본을 “최고의 대어급 명작”이라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그림4’의 절벽 표현은 “비스듬한 터치로 바위 질감을 내어 유연한 편”으로, 구본 ‘우화등선’(그림5)에 비해 성공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가 전시장에서 직접 보니 ‘그림4’는 절벽을 그리는 데 있어 ‘그림5’처럼 붓 끝을 ‘뾰족하게 세워(竪尖·수첨)’ 빗자루로 쓸 듯 난시준으로 그리지 않았다. 또한 ‘그림4’는 전체적으로 먹 농담조차 조절하지 못했다. 특히 ‘그림4’의 산 윤곽선 필력은 정선에 크게 못 미쳤다. 당연히 이 모든 게 가짜라서 그런 것이지, ‘현장사생본’이기 때문은 아니다.

    정선은 미불(米·1051~1107) 화법과 동기창(董其昌·1555~1636)의 미불화법을 배웠다. 따라서 반드시 산의 윤곽선을 그리고 미점준이라 부르는 낙가준을 찍었다. 낙가준은 그 생김새가 마치 우리가 먹는 ‘가지(茄)’를 옆으로 놓은 듯해서 붙은 이름이다.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정선 미불화법의 미진한 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그 사물 배열에 있어, 때때로 너무 빽빽하고 답답하게 화폭에 가득 차서 산수화에 빈 하늘이 하나도 없다. 정선의 그림은 낙가수단(落茄手段)에 있어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하다. 정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학계는 이 글에서 ‘낙가수단’을 ‘공간 경영’이나 ‘경영 수단’으로 잘못 번역했다. 이는 조영석의 ‘관아재고(觀我齋稿)’에서 미불화법을 의미하는 ‘낙가(落茄)’의 ‘가(茄)’를 ‘갈잎피리 가’로 잘못 표기했기 때문이다.

    정선의 ‘그림5’나 그가 1711년 그린 ‘장안사도’(그림6), 1747년 그린 ‘만폭동’(그림7)을 보면 동기창이 미불화법으로 그린 ‘그림8’보다 하늘을 많이 가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선의 가짜 그림 중에는 무식한 위조자가 미불화법도 모른 채, 대담하게 산의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위조한 것도 상당히 많다. 그 예로 국립춘천박물관 소장의 ‘단발령망금강’과 ‘정양사’,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목멱산’, 서울대박물관 소장의 ‘미법산수도’(그림9) 등이 있다.

    생전에 가짜 그림 판쳐 겸재 정선도 기가 막혀!

    6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정선이 1711년 그린 ‘장안사도’. 7 서울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정선이 1747년 그린 ‘만폭동’. 8 중국 상하이박물관이 소장한 동기창의 ‘방고산수화책(제8면)’. 9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정선의 가짜 ‘미법산수도’.

    정선의 대필은 없다

    정선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던 권섭(1671~ 1759)은 1748년 쓴 글에서 자신이 욕심내어 만든 정선의 화첩에 가짜가 섞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고민했으나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진짜처럼 즐기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처럼 가짜에 속았던 그는 당시 정선의 가짜 노년 작품을 변호하는, 항간에 떠도는 대필이나 태작에 대한 뜬소문을 강하게 부정했다.

    “겸재 노인의 세상에 보기 드문 그림은 이미 각기 다른 종류로 화첩 하나를 꾸몄는데, 곧 다시 그 종류를 넓히고자 했다. 이 12폭에 또 10폭이 있는데, 그림의 얻고 잃음이 각기 다르다. 그래 이 벗이 늙고 고단해 그 아들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겠는가. 맘껏 거침없이 그림을 그릴 때, 또한 혹 뜻대로 될 때와 안 될 때가 있었겠는가. 기왕에 겸재 노인 그림이라고 하는데, 어찌 헛되이 취사선택을 하겠는가. 아울러 이들을 붙여서 별도 화첩으로 만들어, 한천장과 화지장 두 곳 책상에 나눠 비치했다. 가히 78세 노인의 남은 세월을 즐겁고 기쁘게 할 만하다.”

    이 글에서 ‘그래 이 벗이 늙고 고단해, 그 아들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겠는가(豈此友老倦 而使其子代手耶)’는 정선이 아들을 대필로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학계는 이를 정선이 아들로 하여금 대필하게 한 것처럼 정반대로 해석했다. 그리고 ‘맘껏 거침없이 그림을 그릴 때, 또한 혹 뜻대로 될 때와 안 될 때가 있었겠는가(縱筆揮之際 或有得意未得意時耶)’는 정선이 미친 듯이 빠르게 그림을 그릴 때 모두 잘 그려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학계는 이 또한 끊임없는 그림 요구에 정선이 대강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잘못 해석했다.

    웃기는 것은 권섭조차도 손자인 권신응(1728~1787)으로 하여금 정선의 그림을 베끼게 한 다음, 이를 자신이 꾸민 ‘정선의 화첩’에 넣어 사람들에게 장난을 쳤다는 점이다. 정선이 살아 있을 때 이미 가짜 작품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