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4

2013.04.22

재계, 등기임원 보수 공개 왜 트집

경제민주화 정책에 ‘밀리면 끝장’ 인식…별 내용 없어도 호들갑

  • 이지수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위원·미국변호사 jisoolee@cgcg.or.kr

    입력2013-04-22 0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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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계, 등기임원 보수 공개 왜 트집

    3월 15일 서울 서초동 사옥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권오현 부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왼쪽).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 논의가 한창이던 2012년 7월 17일 30대 그룹 인사·노무 담당 임원들이 회동해 심각한 표정으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상장회사 등기임원의 연봉을 사업보고서에 공개하기로 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하면서 이런저런 논란이 많다. 임원 보수 공개 문제는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다. 국회 차원에서 처음 논의한 것은 2006년(17대 국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심상정 진보신당 의원은 임원 보수를 각 임원별 보수로 개정하는 내용의 증권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그 후 18대 국회에서 자본시장법(증권거래법의 바뀐 명칭) 개정안으로 다시 상정했으나 이 역시 자동 폐기됐다. 이번 19대 국회에서는 이목희 민주통합당 의원이 다시 발의해 이번에 소관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것이다.

    보수 5억 원 넘는 등기이사 470명 추산

    개정안 내용만 본다면 별로 복잡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보수 총액만 공개하던 것을 총액뿐 아니라 개별 임원의 보수까지 공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것도 전체 임원이 아닌 등기임원이면서 연봉 기준으로 5억 원 이상(구체적 금액은 대통령령으로 위임)을 받는 임원에 한해서 공개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 개정안은 향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는 절차가 남았기 때문에 최종 법률이 어떤 모습일지는 예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필자가 속한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번 법안이 통과한다 해도 실제로 보수를 공개해야 하는 등기임원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가증권시장에서 5억 원이 넘는 보수를 받는 등기이사는 47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공시해야 하는 전체 이사의 약 20%에 해당하는 수다. 쉽게 말해 10명 가운데 2명만이 이번 법안으로 개별 보수를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사의 경우, 5억 원을 넘는 감사는 단 한 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110명 정도가 이번 개정안으로 개별 보수를 공개해야 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전체의 3.5%에 불과한 수치다. 코스닥 시장의 경우 개별 보수를 공개해야 하는 감사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수치를 놓고 볼 때 많은 사람이 우려하는 바와 달리 이번 개정안으로 등기임원 대부분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임원 보수와 관련한 외국의 경험 가운데 특히 미국과 스위스 사례가 눈길을 끈다. 미국에서 임원 보수 공개와 관련한 논의는 우리나라와 궤를 조금 달리한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상법상 임원의 보수는 이사회 권한으로 취급됐다. 즉, 이사회 결정에 이해상충이 없는 한 주주들이 보수 수준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에서 주주로 유일하게 이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은 주주제안을 통한 것이었으나 이마저도 구속력이 있는 방안이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Say on Pay’(임원 보수에 대한 주주들의 의견 반영)라고 부르는 움직임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캘리포니아교직원퇴직연금(CalPERS)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이었다. 기관투자자들은 임원 보수를 반드시 주주 승인을 받도록 하는 주주제안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많은 주주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 미국을 대표하는 몇 개 기업(버라이즌, 모토롤라, 블록버스터) 에서 이를 수용해 임원 보수와 관련해 반드시 주주 승인을 받는 절차를 정관에 도입했다. 향후에도 미국의 기업은 주주들의 이러한 요구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수 공개와 관련해 미국은 이미 1938년부터 이를 공시하도록 했다. 임원의 개별 보수는 주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주주와 시장에 시기적절하면서도 완전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견해인 셈이다. 특히 1992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증권감독국(SEC)의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임원 가운데 수령금액 기준 상위 5명에 대해서는 개별 보수뿐 아니라 보수의 산출 근거, 보수 외에 추가적으로 지급하는 모든 혜택을 빠짐없이 공개하게 하고 있다. 2006년 시행령이 발효되면서 상당수 기업은 그동안 임원들에게 지급하던 비금전적 혜택을 줄여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미국, 보수산출 근거 추가 혜택 모두 공개

    스위스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권을 비롯한 대기업 임원의 고액연봉이 논란이 됐으며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가운데 2008년 당시 자유민주당 소속이던 토마스 민더 의원이 이를 규제하는 법안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민더 이니셔티브’는 임원 보수 규제 외에도 이사 및 이사회 의장 선임, 전자투표 허용 등 주주권을 강화하는 각종 제도를 담고 있다.

    이 법안이 발의되자마자 스위스 경제 단체들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특히 임원 보수를 규제하면 우수한 인력을 영입하기 어려워 결국 기업경쟁력이 저하된다고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 법안은 18개월 동안 10만 명에게 서명을 받는 데 성공했고, 결국 국민투표에 부쳐져 67.9%의 찬성을 받았다. 이에 따라 스위스 연방의회는 이를 연방법에 추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이사회에서 결정할 수 있던 임원 보수 문제가 민더 이니셔티브로 반드시 주주의 승인을 받는 것으로 의무화됐다. 즉, 이사 및 경영진의 보수는 주주투표를 통해 결정되며 법적 구속력도 지닌다. 그뿐 아니라, 이사들은 겸직을 할 수 없으며, 퇴직 시 부여되는 황금낙하산을 비롯한 각종 금전적 혜택이 금지됐다. 이 밖에도 주주권을 강화하는 여러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의 첫 효과가 4월 12일에 나타났다. 스위스의 최대 프라이빗은행인 율리우스 바에르의 주주들이 최고 경영진에 대한 보수안건을 부결했으며, 이로 인해 회사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민더 이니셔티브는 내년부터 발효될 예정이기 때문에 주주들이 부결했다고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처지에 놓였음은 분명하다.

    이건희 회장 등 등기임원 사임 공개 안 해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는 소식과 함께 필자가 기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나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보수를 공개하지 않는가”였다. 바로 이것이 이번 개정안의 한계다. 개정안 내용을 보면, 5억 원 이상을 받는 등기임원의 경우에만 개별 보수를 공개하도록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등기임원으로 재직하지 않은 이건희 회장이나 정용진 부회장의 경우에는 이번 개정안이 통과된다고 해도 보수를 공개할 필요가 없다. 이건희 회장은 2008년 삼성 특검이 끝난 이후 삼성전자 대표이사직을 사임했고 그 후 그룹의 어떤 계열사에서도 등기임원직을 맡고 있지 않다. 정용진 부회장은 올해 등기이사직에서 사임함으로써 설령 이 개정안이 통과된다고 해도 회사에서 얼마를 받는지 공개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 일간지 조사에 따르면, 이번 개정안이 시행된다고 해도 지배주주의 가족 4명 가운데 1명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번 개정안의 이런 심각한 한계를 알아차린 일부 총수 일가들은 벌써부터 등기임원직에서 사임할 준비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기업을 경영하거나 통제하는 데 등기임원직을 꼭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내던질 수도 있다. 결국 이번 개정안은 실효를 거두기도 전에 무용지물이 될 우려마저 안고 있다. 임원 개별 보수 공시와 관련해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보수 공개 대상을 등기임원 전원과 보수총액 상위 5명까지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사실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이번 개정안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기업에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을 초래할 내용도 아니다. 그럼에도 재계에서 크게 문제 삼는 이유는 개정안의 내용보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국정지표 가운데 하나로 삼은 마당에 하나하나 밀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수 있음을 우려하는 목소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소한 문제로도 난리법석을 떠는 모습을 보면서 향후 경제민주화를 추진하는 데 얼마나 큰 저항과 장애가 있을 수 있는지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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