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2

2013.01.21

현실은 맵고 추억은 달달함이여

뮤지컬 ‘심야식당’

  • 구희언 여성동아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3-01-21 10:4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걱정 반 기대 반. 아베 야로의 인기 만화 ‘심야식당’이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은 간판 없는 ‘심야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 이야기를 다룬 작품. 매회 다른 인물의 에피소드로 진행되다 보니 2시간으로 한정된 뮤지컬로 만들기엔 제약이 많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이 작품, MSG 없이 깔끔하게 조리된 ‘집밥’ 같다.

    한국과 일본에서 10권까지 발간한 만화책 속 수많은 손님은 식당 주인인 ‘마스터’가 만들어주는 음식에 얽힌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원작을 뮤지컬로 옮길 때 가장 중요했던 점도 이들 가운데 인상적인 캐릭터를 추려내 서로의 인생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였다. 결과물은 성공적이다. 배우 8명은 ‘심야식당’이라는 교차로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음식과 인생을 나눈다.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만 문을 여는, 간판도 없는 심야식당 마스터는 메뉴에 없는 음식이라도 손님이 원하면 만들어준다. 식당 단골들은 매번 특별한 재료가 필요 없는 같은 음식을 주문하곤 음식이라는 이름의 추억을 삼킨다. 때로는 추억에 체해 반도 못 먹고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몇 그릇이나 싹싹 비우기도 한다. 뮤지컬 하면 흔히 화려한 무대와 파워풀한 넘버를 연상하게 마련이지만, 잔잔한 넘버와 함께 펼쳐지는 ‘심야식당’에는 자극적인 맛이 없다.

    오랜 기간 게이바를 운영한 코스즈와 조직 폭력배 보스 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공통점은 심야식당 단골이라는 점. 둘은 도시락에 담긴 문어 모양 소시지와 달콤한 달걀말이를 나눠 먹으며 친분을 쌓는다. ‘거리의 역사책’이라 불리는 동네 토박이 40대 노총각 타다시와 인기 있는 뉴하트의 간판 스트리퍼 마릴린, 결혼 못한 노처녀 3인방 오차스케 시스터스, 무명의 엔카 가수 미유키까지 각자의 사연이 추억의 음식 위로 펼쳐진다.

    자정이 넘어 식당을 찾는 지친 도시인을 위로하는 건 마스터의 백 마디가 아닌 음식 한 그릇이다. 송영창과 박지일은 연극적 느낌을 버리고, 정말 어딘가에 있을 법한 마스터 모습을 보여준다. 슬픈 사연도 기쁜 사연도 있지만, 지나치게 신파로 흐르거나 너무 가볍게 터치하는 것을 경계했다. 누군가의 극적 사건보다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면서 주류가 아닌 인물들의 삶을 어루만진다.



    세트에도 공을 들였다. 어딘가 골목 한구석에 있을 법한 선술집 느낌을 그대로 무대에 옮겨왔다. 포스터부터 세세한 소품까지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지글지글 소시지 볶는 소리와 달걀말이 두르는 소리, 물 따르고 밥 짓는 소리는 오감을 자극한다.

    지친 영혼까지 쉬어가는 곳, 심야식당. 공연장을 나설 때 문득 허기가 지는 이유는 비단 늦은 저녁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마스터가 무대에서 갓 지은 밥 위에 버터를 한 숟가락 올리고 간장을 부어 완성한 소박한 버터 라이스를 보면서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추억의 맛이 떠올랐다. 2월 17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현실은 맵고 추억은 달달함이여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