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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의 ‘망달당달’(망가지느냐 달라지느냐, 당신에게 달려 있다)

약물로 경기력 향상 스테로이드는 ‘악마의 유혹’

  •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약물로 경기력 향상 스테로이드는 ‘악마의 유혹’

약물로 경기력 향상 스테로이드는 ‘악마의 유혹’
영화 ‘슈렉’의 주 무대인 ‘겁나게 머나먼 왕국’에서도 한참 떨어진 ‘정말 겁나게 머나먼 왕국(the Kingdom of Really Far Far Away)’에서는 매년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매우 독특한 자세로 뛰면서 입상을 독차지하는 선수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반 선수와 달리 마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 같은 자세로 미끄러지듯 코스를 질주하며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기록을 세웠다. 단숨에 주위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물론이다.

이에 대해 경기 해설자들은 “주법(走法) 자체가 기존 마라톤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현대화한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 각고의 훈련 결과”라고 침을 튀며 칭찬했다. 다른 선수들도 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선수 대부분이 마라톤대회에서 이른바 ‘롤러스케이트 주법’을 채택하기 시작했고, 이 주법은 곧 전문 선수들이 구사하는 고차원적 경기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자 이를 동경하는 일반인 중에서도 이 주법을 따라하는 사람이 서서히 늘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빠른 근육 성장

그런데 일각에서 롤러스케이트 주법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듯한 자세로 마라톤을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며 뭔가 부정행위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운동 선진국인 ‘바다 건너 왕국(the Kingdom of Across the Sea)’에서 이미 유행하는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표적으로 삼았다. 이 투명 롤러스케이트는 모양과 기능은 일반 롤러스케이트와 같지만, 투명하게 만들어져 겉으로 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신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몰래 착용하고 마라톤대회에 나가면 일반 선수들을 이기는 것은 떼어놓은 당상이다. 그 때문에 투명 롤러스케이트는 그 불법성에도 성과에 눈먼 선수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은밀히 팔려 나갔다.



‘정말 겁나게 머나먼 왕국’ 당국자들은 즉각 소문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섰다. 방법은 발목 털을 채취하거나 특수 시약을 발목 부위 피부에 발라 롤러스케이트를 신었던 흔적을 검사하는 것이었다. 부정행위를 저지른 선수는 자기 털 대신 다른 사람의 털을 제출하는 등 검사에서 발각되는 것을 피하려고 갖은 술수를 썼다.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흔적을 최소화하려고 가급적 시합 직전에는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신지 않고 훈련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당국 처지에서는 정밀검사에 들어가는 비용 탓에 모든 선수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할 여건이 되지 않자 입상자 위주로 검사를 시행했다.

여러 한계가 있었지만 검사 결과, 선수 상당수가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것을 확인했다. ‘바다 건너 왕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투명 롤러스케이트가 밀수입된 증거도 발견했다. 명백한 물증들이 확보되자 관련 선수들은 시합 출전 정지 등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적발된 선수들 대부분이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모든 선수가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자기들은 재수가 없어 걸렸을 뿐이라고 푸념한다는 점이었다. 관중이나 아마추어선수 중에도 프로선수들이 착용한 투명 롤러스케이트의 속도감에 익숙해져 더는 과거의 순수 마라톤 주법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난 점도 문제였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신는다고 누구나 빨리 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에 맞는 엄청난 훈련이 뒷받침돼야 하는 만큼 그들 실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목이 상할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함에도 속도 향상을 위해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착용하는 것은 진정한 프로정신의 발로라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정말 겁나게 머나먼 왕국’ 국민은 마라톤대회 기록에 더는 감명받지 않게 됐다. 마라톤을 인간 능력 한계에 도전하며 역주하는 순수 스포츠가 아닌, 투명 룰러스케이트 성능 경쟁 장소로 여기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들에 대한 언론 관심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정말 겁나게 머나먼 왕국’의 마라톤대회는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

마라톤대회에서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사나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전문 보디빌딩 사회가 직면한 엄연한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여기서 투명한 롤러스케이트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anabolic steroid)를 대표로 하는 각종 불법약물의 상징적 표현이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과 연관된 합성 약물로, 체내 단백질 합성을 인위적으로 조장해 단시간에 빠른 근육 성장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다양한 분야의 운동선수들이 불법적으로 폭넓게 사용하지만, 보디빌딩의 경우 근육 형성이 경기 결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땀 흘리는 정직한 피해자 양산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운동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이용하려는 시도는 1940년대 옛 소련과 동독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그 대상은 강력한 근육 힘이 일차적으로 필요한 역도 선수들이었다. 미국도 이에 질세라 관련 연구에 뛰어들었고,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복용이 여자 수영 등 인근 영역에까지 급속히 전파되자 197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금지약물로 지정했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언론에 보도될 만큼 스테로이드 사용은 여전히 국내외 스포츠계를 어지럽히고 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사용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다양한 형태로 발생할 수 있음에도 눈앞 성과에 급급한 운동선수들이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운동선수들의 성과를 맹목적으로 동경하는 일반인에게까지 불법약물 사용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 의학적 용도를 제외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운동경기에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사용은 정당화될 수 없다. 특히 보디빌딩에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같은 불법약물을 사용하는 것은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일반인이 보디빌딩에 가지는 건전한 이미지를 훼손할 우려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몸을 가졌어도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약으로 만든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사자로서 민망한 일이지만, 건강한 몸을 만드는 데 대한 국민 의식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불법약물 사용이 정직한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점이다. 마라톤 선수들이 아무리 애써 봐야 롤러스케이트 탄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듯이, 정상적인 보디빌더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도 약물에 의지한 사람의 근육을 이길 수 없다. 더욱이 그 같은 불법 수단이 투명 롤러스케이트처럼 교묘히 위장된다면 정직하게 운동한 사람들의 좌절감과 사회 전반에 끼치는 부정적 파급 효과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될 것이다.

스테로이드 같은 불법약물을 일절 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내추럴 보디빌더’ ‘내추럴 보디빌딩’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현실적으로 옥석을 가리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결론적으로, 가장 정당해야 할 운동 세계에서 투명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남을 기만하는 사나이들을 절대 용납해선 안 된다. 개인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건강하게 몸을 가꾸려는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생각해서도 그렇다.



주간동아 2013.01.21 872호 (p78~79)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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