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2

2017.06.14

손석한의 세상 관심법

文 대통령 뽑은 전이현상의 실체

현재 높은 지지율은 긍정적 전이의 결과… 부정적 전이 쌓이면 다시 혼란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의학박사 psysohn@chol.com

    입력2017-06-09 17: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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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분석, 정신의학, 심리학, 정신치료 등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 ‘전이(transference)’가 그것이다. 전이란 유아기 또는 아동기에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경험했던 각종 감정, 생각, 행동 유형이 지금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투영돼 재현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은 대개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어릴 적 어머니가 평소에는 잘 대해주다가도 갑자기 화를 내고 크게 야단쳤던 행동을 많이 보여왔다면 그 자식은 무의식적으로 무서움, 혼란, 원망, 분노, 불신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이후 자식은 일관성이 결여됐거나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을 만나면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상대방을 두려워하고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한다. 그 사람의 사소한 언행에 화를 내며, 사람을 잘 못 믿어 늘 확인하려 하거나 통제하려 할 수도 있다. 원만하고 건강한 대인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난다.



    청문회와 사드 보고 누락의 전이현상

    정신의학계에선 이처럼 인생의 초기 경험, 특히 부모와 관계가 성인이 되고 난 후의 인격과 정신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부정적 전이현상만 있는 건 아니다. 긍정적 전이현상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예컨대 자상하고 친구 같으면서도 잘못했을 땐 따끔하게 야단치는 아버지를 둔 사람은 나중에 커서도 학교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와 관계에서 위계질서를 잘 지키면서도 자유롭고 편안하게 의사소통을 한다. 당연히 그 사람은 조직에서 신임을 얻게 된다. 

    이 경우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내면에서 ‘긍정적 정신 표상(positive mental representation)’이 먼저 작동한다는 뜻이다. 만약 상대방이 아버지와 전혀 다른 사람임을 깨닫게 되면 새로운 방식으로 반응하거나 적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긍정적 기억과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 표상은 좋은 기능을 해 적응 과정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기억으로 전이현상이 일어난 경우에는 대조적인 일이 벌어진다. 상대방이 나를 따뜻하게 대하고 사랑해줄 때조차 도무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면에서 ‘부정적 정신 표상(negative mental representation)’이 작동해 상대방이 언제 어떻게 어머니처럼 돌변할지 의심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언제 멈출지 항상 두렵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나에 대한 애정을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나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려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마음이 치유된 셈이다.

    우리 국민은 요즘 대통령과 정치인을 바라볼 때 자신도 모르게 과거 경험에 따른 전이현상을 겪는 듯하다. 장관급의 인사청문회나 자질 검증 논란에서도 이런 경향이 드러난다. 반대 세력은 후보자들을 자질 부족 등으로 깎아내리기 바쁘고, 찬성 세력은 그 정도면 넘어가도 되지 않느냐고 일방적으로 옹호한다. 이런 정치적 태도와는 상관없이 국민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씁쓸해하거나 냉담하거나 무심하거나 한다. 이해하려는 부류도 있다.

    이렇게 반응이 엇갈리는 이유는 앞서 말한 개인적 전이현상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어떻든 세금체납과 위장전입, 논문표절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법적 책임도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제각각인 감정적 반응은 과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경우가 많다. 만일 어릴 적 세금을 못 내 전전긍긍하는 부모를 지켜본 사람이나 공과금을 못 내 단전·단수 위협에 시달려본 사람은 부자나 고위층, 식자층이 세금을 체납하거나 꼼수를 부린 것에 한없는 분노와 혐오를 느낀다. 자신의 어릴 적 고통스러운 감정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고 누락 파문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결정함으로써 큰 피해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번에도 그때의 분노와 소외감, 배신감을 그대로 느꼈을 개연성이 크다. 여기에 위계질서를 어겼다는 점은 비판 정도를 더욱 강하게 한다. 반대로 비밀스러운 모임이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히려 행복한 결론을 경험했던 사람은 비밀유지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해 국방부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박근혜와 노무현을 뽑은 전이현상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전 ‘선거의 여왕’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많은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에 대한 향수가 크게 작용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 또한 집단적 및 개인적 전이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가난을 겪던 우리 국민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비로소 부강해지는 과정을 경험했고, 비록 권위주의적 독재하에 있었지만 강한 결속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경험들이 당시를 살아온 세대에겐 긍정적 경험으로 작용해 집단적 전이현상이 일어났다. 반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많은 중년이 분노한 이면에는 그 시절 비민주적 독재체제에서 입은 각종 상처가 되살아난 부정적 전이현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노무현 정신’에 대한 계승 심리가 한몫했다. 이 또한 전이현상이다. ‘바보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서 짜릿함을 느꼈던 사람들은 ‘문재인’을 통해 그런 통쾌함을 다시 느낄 수 있길 기대했다. 물론 의식적 차원에선 정치적 신념과 각종 정책에 대한 판단이 우선시됐겠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선 다른 무엇인가가 작용했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관계를 맺으며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결정하는 과정은 개인적 경험에 의해 축적된 데이터, 그것도 이성적 데이터가 아니라 감성적 데이터로부터 비롯된다. 어릴 적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어느 날 나를 제치고 반장으로 선출된 경험을 한 나는 반전을 두려워한다. 어릴 적 나보다 여러모로 부족했던 친구가 부모의 힘과 교사의 비호하에 특권을 누리는 것을 경험했던 나는 반감을 넘어선 적대감과 분노의 감정을 드러낼 확률이 높다. 긍정적 전이현상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부정적 전이현상은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감정을 낳을 수 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매우 높다. 당선 직후보다 다소 떨어졌다고 하지만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긍정적 전이현상이 누적된 결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이나 집단의 부정적 전이현상이 발생한다면 지지율이 떨어지고 정국은 다시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부정적 전이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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