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6

2012.05.07

이스라엘 ‘재벌해체법’ 논란

내각 입법위원회에 제출했지만 국회 통과 쉽지 않을 듯

  • 예루살렘=남성준 통신원 darom21@hanmail.net

    입력2012-05-07 10: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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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2일 이스라엘 내각이 만장일치로 ‘경제집중위원회’(이하 위원회)의 권고안을 수용키로 결정했다. 앞서 이스라엘의 경제구조와 자본 안정성, 경제 효율성 등을 조사해온 위원회는 부의 집중현상을 완화할 것으로 기대되는 일련의 조치를 담은 권고안을 내각에 제출했다. ‘경제 집중에 관한 보고서’라고 부르는 이 권고안은 기업 간 경쟁 강화와 일부 재벌 해체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이스라엘 내각은 총리와 재무장관, 법무장관에게 권고안을 내각 입법위원회에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 같은 내각의 결정에 대해 “생활비 안정을 위한 또 하나의 발걸음”이라고 천명했다.

    중동의 부국 이스라엘에서 재벌 해체가 논의되는 건 왜일까. 지난해 여름 이스라엘은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집세와 각종 세금, 생필품 가격 폭등으로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려워진 서민이 전국 주요 도시의 광장과 공원 등지에 천막을 치고 나앉았기 때문이다. 소수 재벌이 독과점으로 이스라엘 경제를 지배한 탓에 물가가 폭등했다고 믿는 시위자들은 독과점 타파와 생활비 안정을 위한 조치를 정부에 요구해왔다. 연인원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올여름 또다시 대규모 시위를 예고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려고 전 재정부 총괄국장을 위원장(차관급)으로 하고, 총리와 재정부 장관, 이스라엘은행장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리고 3월에 이 위원회에서 낸 최종보고서에 재벌 해체안을 담았으며, 내각이 이를 승인했다.

    20개 가문 주식시장의 30% 통제

    이스라엘은 경제 선진국 중에서도 소수 대기업에 대한 경제 집중도가 높은 나라다. 그간 여러 매체가 기업총수 20여 명과 그 가족이 부를 과도하게 차지했다고 보도해왔으며, 그 결과 이 문제가 중요한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년마다 발행하는 회원국에 대한 경제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경제를 자세히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이스라엘 내 20여 개 가문이 이스라엘 경제수도 텔아비브 주식시장의 30%를 통제한다”는 이스라엘은행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심각한 경제 집중현상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실제 이스라엘 정부도 상장기업 시가 총액 전체의 41%를 10대 대기업 지분이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OECD 보고서는 또 이스라엘 재벌 기업들이 여러 금융기관을 소유한 것을 빗대 “실패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분석했다.



    소수 재벌이 독과점한 이스라엘 경제는 문어발식 기업구조, 다수 기업에 대한 교차 소유(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 동시 소유), 개인의 정부 자산 매입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위원회의 권고안을 법제화하면 거대 재벌은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 중 어떤 회사를 보유할지 선택해야 한다. 또한 피라미드 구조의 지주회사는 보유할 수 있는 자회사 수가 제한된다. 기존 지주회사는 3단계까지, 새 지주회사는 2단계까지만 자회사를 보유할 수 있다. 이스라엘 기업은 그간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 때문에 최소한의 투자로 광범위한 사업 분야의 기업을 통제할 수 있었다.

    기존 및 새 지주회사가 보유할 수 있는 자회사 수에 차이를 둔 것은 급격한 개혁으로 인한 충격을 얼마간 완화하려는 조치라는 게 위원회 측 설명이다. 또한 권고안에 따르면 한 기업이 자산규모 400억 셰켈(약 12조 원) 이상의 금융회사와 총 매출규모 60억 셰켈(약 1조8000억 원) 이상의 비금융회사를 동시에 보유할 수 없다. 권고안을 법제화하면 해당 기업은 4년 안에 이 같은 내용을 실행해야 한다. 이 밖에 위원회가 검토한 사안 중 관심을 끌었던 금융회사와 언론사 공동 소유 금지안은 논의 핵심에서 벗어난 주제라는 판단에 따라 권고안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회는 이 사안의 경우 이후 정부 차원에서 검토하도록 권고했다.

    금융과 비금융 동시 소유 금지

    권고안을 적용할 경우 IDB그룹은 클랄보험과 이스라엘 최대 통신사인 셀콤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자원개발을 주 업종으로 하지만 보험사(피닉스)와 증권사(엑설런스 네수아)를 보유한 델렉그룹도 금융업과 비금융업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아팍스 파트너스도 유명 식품회사 트누바와 증권사 프사곳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위원회는 “현재의 이스라엘 경제 상태는 위험하다”며 “권고안을 실행하면 이스라엘 경제의 소유구조가 개선되고 개인 투자자에 대한 보호가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에 기업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번 권고안의 적용 대상인 한 대기업 관계자는 위원회에 출석해 “교차 소유가 금지된 마당에 짧은 기간 안에 자회사를 매각하면 결국 상당수 기업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IDB그룹은 국내외 분석 자료를 동원해 좀 더 구체적으로 반박했다. IDB그룹은 “이스라엘처럼 작은 규모의 경제에서는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경제 집중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한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경제 집중현상이 이스라엘 경제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세계경제포럼 인덱스가 발표한 2010∼2011년 보고서에서 이스라엘 경제의 경쟁성 순위가 전체 139개국 중 27위에서 24위로 상승한 것을 근거로 “이스라엘 경제가 충분히 경쟁적”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의 공동 소유를 금지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미국도 이 둘의 공동 소유를 허락한다”며 반박했다.

    IDB그룹은 단크네르 가문을 중심으로 총 3개 가문이 공동 소유한 전형적인 재벌 기업이다. 클랄보험과 셀콤뿐 아니라 이스라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마아리브’, 통신사 넷비전, 이스라엘 최대 소매유통회사인 슈퍼솔 등 수많은 기업을 소유한다.

    권고안을 법제화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 위원회 권고안을 이스라엘 내각이 만장일치로 승인한 단계에 불과하다. 앞으로 법무장관 등으로 구성된 입법위원회에서 법문화하고 이를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국회에서는 이 법안을 의원총회에 상정하고, 3차에 걸친 심의 과정을 거쳐 통과시켜야 비로소 입법 절차가 마무리되고 효력도 발생한다. 국회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법제화를 막으려는 재계 로비스트들에게서 자유로운 의원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라엘 경제의 근간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중대 사안임에도 이스라엘 언론이 그리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주요 일간지에서 이 내용을 보도하긴 했지만 대서특필한 신문은 없다. 올해로 건국 64주년을 맞은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경제구조를 몇 년 사이에 바꾸는 게 쉽지 않으리란 점을 알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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