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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인터뷰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알마티 거주 정추의 삶과 음악…북한서 버림받고 고난의 삶 끌어안아

  • 글·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haewookoo@hanmail.com 기획·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북한은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했다. 지난해엔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관계를 긴장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남북 간 대립, 충돌은 광복 이후 6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도록 이어진다. 이산의 아픔을 겪은 이가 적지 않다.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정착한 이주민도 늘고 있다.

여기, 66년 분단 역사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영화처럼 살아온 남자가 있다. 희생, 고통이 가득한 삶을 살았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사는 천재 음악가 정추(88). 한국에서도, 북한에서도 버려진 비운의 천재다. 윤이상(1917~95년)은 한국에서 버림받았을지언정 북한에서는 환대받았다.

정추는 조국애가 강하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스쿨 졸업작품 이름이 ‘조국’.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스탈린’은 민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그가 마지막 노래로 작곡한 ‘내 조국’은 통일조국을 염원하며 쓴 것이다. 그럼에도 조국은, 그러니까 한국과 북한은 반세기 넘도록 그를 머나먼 이국땅에 내버려두었다.

5월 27일 알마티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6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동안 공산주의자 정추와 천재 음악가 정추, 북방 유목민 문명의 상징인 톈산(天山)과 실크로드 톈산북로(天山北路)의 중심도시이던 알마티를 생각했다. 그는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미수(米壽)를 넘긴 노음악가 얼굴에서 쓸쓸함, 그리움이 느껴졌다.

“집으로 모셔야 하는데 아내가 아파서요. 미안합니다.”



희생과 고통 영화처럼 살아온 남자

그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으로 일행을 안내한 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그와 함께 톈산에 올랐다. 해발 4000m가 넘는 톈산이 내뿜는 기상이 웅혼하다. 산은 만년설을 녹여 강을 발원했고 도시를 건설했으며 문명을 키웠다. 북방 유목민은 서(西)로는 톈산, 동(東)으로는 백두산에 이르는 지역을 호령했다. 대초원을 떠돌면서 고구려제국, 몽골제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와 문명을 건설했다.

“5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카자흐스탄 지역과 민족문화의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고려인이 운영하는 상점을 둘러볼 때조차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했고요.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유물을 살펴보면서 우리 문화와의 동질성도 찾아봤습니다.”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은 1937년 9월 10일 “다음 날 새벽 연해주를 떠나라”라는 스탈린의 명령을 전달받았다. 몸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의 살림살이만 챙긴 채 중앙아시아행 열차에 올랐다. 알마티와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근처 황무지에 도착했다. 그해 겨울은 추웠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했다. 많은 이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그럼에도 죽는 이가 다소나마 줄어든 것은 카자흐인의 도움 덕분이었다. 살아남은 고려인은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카자흐인에게 농사법도 가르쳤다. 중앙아시아에서 최초로 벼농사에 성공한 이들이 고려인이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약 20만 명, 카자흐스탄에 약 10만 명이 산다. 천재 음악가 정추는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향수를 달랬고, 그들에게서 조국의 오래된 노래를 채보했으며, 그들의 아픈 역사를 대서사시를 닮은 ‘1937년 9월 11일 스탈린’이라는 교향곡에 담아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남북에게 버림받은 정추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가 연출한 비극이다.

그는 192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호남 부호이던 외할아버지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예술인을 집으로 초청해 손자들에게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워주었다.

“1930년대 외할아버지 댁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예술인 집안이었죠. 외삼촌도 베를린 음대를 졸업했어요.”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1 모스크바 유학 시절 정추(맨 왼쪽)와 김원균(왼쪽에서 세 번째). 2 정추와 정추의 형 정춘재(오른쪽).

전남 광주→평양→모스크바→카자흐스탄

그는 여덟 살 때 노래를 작곡하는 등 어릴 적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예술적 감수성을 간질이는 집안 분위기 덕분에 재능을 일찍 발견한 것이다. 그의 형인 정춘재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인동맹 초대 서기장을 지냈다. 1950년대까지 북한이 자랑하는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서울에 사는 그의 동생은 어린이에게 친숙한 노래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을 만든 동요작곡가다.

“어릴 적부터 애국심이 강했어요. 1938년 광주서중을 다닐 때 조선어 사용 문제로 일본인 교관과 다퉈 퇴학당했죠. 우여곡절 끝에 양정고에 편입해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1942년 니혼대 음악학과에 입학해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은사께서 전문성을 먼저 키운 뒤 그에 기초해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조언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1944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습니다. 한국인 학생들과 함께 탈영을 도모할 때 해방을 맞이했어요.”

이즈음 그는 형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자가 돼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익 영화계의 중심인물이던 정춘재는 1946년 사회주의 혁명 분위기가 고조하던 북한으로 건너갔다. 그는 북한에 도착한 직후 동생을 평양으로 불러올렸다.

“어머니가 나를 끔찍이 사랑했어요. 며칠 동안 북한에 다녀오겠다고 어머니에게 말씀 드리고 38선을 넘었죠.”

그렇게 조국을 떠난 그는 평양음대 교수를 맡았다. 북한 음악계의 중심에서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 숙청이 이뤄지면서 그의 입지가 다소 좁아졌다. 1953년 그는 현재 북한이 가장 자랑하는 음악가 김원균과 함께 사회주의 종주국의 수도이면서 사회주의권 문화예술의 중심지이던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스쿨에 함께 입학한 김원균은 북한에서 영웅으로 불린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했으며, 북한 최고 음대(김원균음악대학)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도 누렸다. 정추와 김원균은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김원균은 별명이 ‘사또’였어요. 유학시절 함께 어울려 다녔죠. 우리의 운명이 갈린 것은 북한 유학생이 1957년 모스크바에서 벌인 김일성 우상화 반대 시위 때문이었어요. 조국 독립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가 됐지만, 나는 스탈린주의는 옳지 않다고 여겼어요.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행태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모스크바 유학생 사이에서 폭넓게 확산했죠. 물론 나도 우상화 반대 움직임에 동참했고요.”

1956년부터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도로 반종파 투쟁을 추진했다. 남로당계에 이어 소련파, 연안파를 숙청하면서 소련 유학생에 대해서도 사상 검열을 했다. 정추를 비롯한 일부 유학생은 ‘반종파 투쟁은 김일성 우상화로 가는 길이며,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곤 김일성 우상숭배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1957년 이뤄진 반(反)김일성 시위의 주동자가 바로 정추다. 북한 당국은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는 도망자 생활을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모스크바 유학생 전원을 북한으로 소환했다. 친구이자 라이벌이던 김원균도 이때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김원균은 반김일성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고, 귀국 후 북한 음악계를 주도하면서 북한에서 최고 영예로 여기는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저항한 예술가는 불우했고, 권력 품에 안긴 예술가는 영예를 누린 것이다. 북한 당국은 소련 정부에 정추를 체포해 송환하라고 요구했으나 소련 당국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소련파 숙청으로 당시 북한-소련 관계는 경색해 있었다. 소련 정부는 정추를 북한에 송환하는 대신 알마티로 유배를 보냈다.

“수일간의 기차 여행 끝에 톈산 아래 도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알마티에 도착했어요.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강제이주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스탈린’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필자와 정추가 대화하고 있다.

알마티로 거처를 옮기기 전 도망자로 살면서 그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스쿨을 졸업했다. 그의 재능을 아낀 교수들의 배려로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작품인 ‘조국’은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만점을 받았다. 지도교수는 소련에서 차이코프스키의 3대 제자로 불렸다. 그는 ‘4대 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소련 정부도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소련 당국이 1961년 성대하게 주최한 ‘가가린 쾌거 축하 공연’에서 연주된 ‘뗏목의 노래’가 그의 작품이다. 유리 가가린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우주인이다.

그는 알마티로 추방돼서도 민족혼을 잊지 않았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황무지로 밀려온 고려인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에게서 구전 가요를 채보하는 일에 10년 동안 정열을 쏟아 부었다.

“고려인이 일하는 농장에 찾아가 그들이 부르는 전래민요, 노동가요를 1000곡 넘게 채보했어요. 실향의 아픔, 조국에게 버림받은 아픔을 그렇게 달랬습니다.”

그는 채보한 음악을 ‘소련의 고려가요’라는 이름으로 집대성해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곤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를 담은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스탈린’을 완성했다.

1991년 그는 북한 민주화를 실현하고,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데 일조하겠다는 마음으로 구국전선에 참여했다. 구국전선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의 역사적 배경에서 잉태한 조직. 1957년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 정착한 남로당 마지막 책임자 박갑동과 정추가 주도해 만들었다. 구국전선은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와도 선이 닿았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고향인 광주를 방문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귀향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망명객이 주축이던 구국전선 활동은 이후 지지부진했다.

2009년 3월 알마티에서 ‘정추 탄생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통일조국을 그리면서 그가 작곡한 ‘내 조국’이 연주됐다. 분단된 두 개의 조국에게 버림받은 그는 통일조국 건설을 간절히 기원한다.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되길 염원하면서 만든 곡이에요. 음악가로서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죠.”

그의 조국, 그러니까 한국과 북한에선 ‘정추의 음악’을 모른다. 이방인으로 반세기 넘게 살아온 카자흐스탄에서는 그를 기리는 음악회가 이따금 열린다. 슬프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카자흐스탄 음악계가 존경하는 거장이다. 그들은 ‘검은 머리의 차이코프스키, 정추’를 사랑한다. 카자흐스탄 음악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 60곡에 달한다.

‘검은 머리 차이코프스키’로 사랑받아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에게 통일조국 건설이 가능하겠는지를 물었다. 노음악가의 얼굴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김일성, 김정일 왕조국가일 뿐이에요. 스탈린주의적 우상숭배국가죠. 하루빨리 민주화를 실현해야 해요. 개혁, 개방과 민주화가 이뤄져야 통일조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통일조국 건설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식민지 조선의 소년으로 살다가 사회주의자가 됐고, 혁명국가 건설에 일조하겠다면서 38선을 넘었으며,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하다 고난의 삶을 끌어안았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그를 닮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수많은 고통과 시련, 통일조국 건설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

‘조국’ ‘1937년 9월 11일 스탈린’ ‘내 조국’은 언제쯤 서울과 평양에서 울려 퍼질 수 있을까.

톈산 아래 터 잡은 도시 알마티에 머무르는 동안 민박집 고려인 아주머니는 식사 때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온 한국음식’을 내놓았다. 서울의 식당에서 내는 음식과는 격이 달랐다. 서구화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한국음식 말이다. 그래선지 정추도 일행이 묶은 민박집에서만 식사하려고 했다. 정추는 남북이 잃어버린, 박제가 돼버린 천재다. 그의 교향곡 ‘조국’과 ‘1937년 9월 11일 스탈린’, 그리고 그가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곡한 ‘내 조국’이 하루빨리 서울에서 공연되기를 기대한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그의 음악을 듣고 싶다.



주간동아 2011.06.20 792호 (p34~37)

글·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haewookoo@hanmail.com 기획·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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