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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天·高·野·飛 04

만약에 야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만약에 야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만약에 야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KIA의 정규리그 1위 확정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군산야구장에 수많은 팬이 몰려들었다.

지난해 8월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올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의 영향도 있겠지만, 600만 관중시대의 1등 공신은 단연 KIA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

12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KIA는 호남 팬들의 ‘해태 향수’를 자극하며 50만 관중을 운집시켰고,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롯데는 138만명을 동원해 지난해 한 시즌 최다관중 기록을 갈아치웠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야구에 열광하게 만들었을까. ‘주간동아’는 KIA와 롯데 팬들이 야구장을 찾는 이유에 주목했다. KIA의 페넌트레이스 1위 확정 순간을 보기 위해, 그리고 롯데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는 팬들을 따라가봤다.

롯데는 비록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패해 포스트시즌에서 탈락하고 말았지만, 대한민국 야구광풍의 진원지임은 분명해 보였다.

PO 승자 기다리는 호랑이 “아그들아 비켜라! 12년 기다렸다” 노점상, 관중 자리 쟁탈전 … “아따, 참말로 별일이네”



9월24일 정규리그 우승까지 매직 넘버 ‘1’을 남겨둔 KIA와 히어로즈의 군산 경기.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매표소 앞은 몰려든 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묵, 컵라면, 각종 음료수와 스낵을 가득 실은 노점상 리어카들이 경기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1951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1·4후퇴 당시 피난민들의 수레가 원산항에 집결하던 광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팬들의 눈에 띄기 좋은 그라운드 중앙과 1, 3루 출입구 자리를 차지하려는 노점상들의 ‘자리 쟁탈전’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아따, 참말로 심하네. 쪼까 옆으로 비켜나달랑께.”

“요놈(생수와 음료수가 담긴 갈색 고무 욕조)은 여그다 놔둬야 혀. 안 된당께. 포클레인 갖고 와서 들이대 봐. 그러면 피해줄 테니께.”

생글생글 웃으며 던지는 노점상들의 ‘송곳 사투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경기 시작 30분 전, 경기장 안팎의 혼잡은 극해 달했다. 밖은 필사적으로 표를 구해 입장하려는 팬들로, 안은 경기 시작 전에 허기를 때우려고 매점을 찾는 팬들로 곳곳이 북적였다. 가까스로 표를 구한 이범순(52) 씨는 ‘대사’를 제쳐놓고 광주에서 친구들과 함께 이곳 경기장을 찾았다고 했다.

막내아들 생일보다 야구가 먼저

“오늘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 생일인디, 에라 모르겠다고 와부렀어요. 오늘이 보통 날인가? 미안허긴 한데, 뭐 지 팔자지. 아들놈 선물로 파울볼이나 하나 받아가야 쓰겄네. 기왕이면 이종범이가 친 걸로다가.”

팬들 간의 자리 선점 싸움도 곳곳에서 치열했다. 자리를 잡지 못한 염흥수(44) 씨는 아예 출입문 기둥 위로 올라가 신문지로 자리를 펴고 앉은 뒤 닭다리를 베어 물었다. 경기장에 입장한 뒤 30분 동안 내·외야를 떠돌았지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김정훈(17) 군은 문득 1루 내야의 빈자리를 발견하고 부리나케 뛰었으나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옆자리에서 무섭게 눈을 흘기고 있는 아저씨의 한마디.

“아그야, 물통 올려놓은 거 치우지 마랑께. 자리 있다.”

KIA가 1위를 확정짓는 경기여서인지 기자들도 평소보다 2배 이상 많이 경기장을 찾았다. KIA 조범현 감독이 기자실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흠칫 놀란다.

“기자분들 많이 오셨네. 더우신데 한 잔씩들 들어요. 그런데 모자라겠네. 어쩌나.”

조 감독이 기자들을 위해 1.5ℓ 페트병에 준비한 냉커피가 금세 동이 났다.

“감독으로서 어깨가 무겁습니다. 감독들도 이제 경기력뿐 아니라 팬들과의 소통의 질을 높이는 데 노력해야 할 때가 왔어요. 점치는 걸 배울까 봐요. 기자들한테 좀 앞서가는 얘기를 해줘야 기사를 본 팬들도 재미있어 할 텐데….” 600만 관중시대를 맞이한 야구인의 말에는 팬들을 향한 고마움이 묻어났다. 히어로즈 이광근 코치는 팬들의 성원에 감동받은 듯 살짝 흥분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광주도 아니고 군산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에게 선수들은 감사해야 해요. 이제 메이저리그 같은 선진야구를 보면서 수준이 높아진 팬들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죠. 선수나 코치나 늘 공부하면서 적극적으로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만약에 야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V10 향한 열정, 신종플루보다 거세다”

경기가 시작되면 팬들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진다. 볼 하나하나에 환호와 탄식의 희비가 교차한다. 1회 말 선두타자 이종범이 깨끗한 우전안타를 치고 나가자 함성은 천지를 뚫는 듯 거세졌다.

“종범신(神)! 종범신!”

희생번트로 2루에 안착한 이종범이 히어로즈 포수 유선정의 견제구에 아웃되자 ‘망국(亡國)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심판에 대한 원망과 함께.

“아따, 심판! 슬로비디오로 한 번 보장께.”

아쉽게 1, 2회가 지나고 3회 말 KIA의 공격. 중심타선으로 이어지자 응원 소리가 더 커진다. 이용규와 김원섭이 범타로 물러난 뒤 최희섭이 볼넷으로 걸어나가 2사 1루. 타석에는 올해 프로야구 최고의 ‘블루칩’인 김상현이 들어섰다. 홈런, 타점, 장타율 3관왕에 빛나는 KIA의 주포.

관중석에선 “홈런! 홈런!”을 외치는 함성이 이어졌다. 일발 장타가 필요한 상황. 로진백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와인드업한 히어로즈 투수 김수경의 140km 직구가 포수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찰나.

“따악~.”

경쾌한 타구음이 울린 순간, 관중은 일제히 김상현의 팔 궤적을 쫓았다. 지면에서 70도 각도로 힘차게 쭉 뻗어 올린 왼팔, 그리고 완벽한 스윙 타이밍과 팔로스루. 자연스럽게 이어진 만세 동작과 함께 더그아웃을 향해 불끈 쥐어 보인 오른 주먹.

“와~!”

좌측 담장을 훌쩍 넘긴 타구에 관중은 하나가 됐다. 김상현의 36호 투런 홈런. 관중석은 그야말로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숨죽이며 경기를 지켜보던 임진택(35) 씨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좀 엉뚱하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와 야구를 철학적으로 분석했다.

“제가 미혼인데요! 어떻게 보면 야구 때문에 장가를 못 갔어요. 그런데 요즘은 제 신세가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요. 영화 제목도 있잖아요,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야구하고 결혼했다는 표현은 좀 지나치겠지만, 이것저것 따져보면 야구가 정말 최고의 아내인 것 같아요.”

야구 문외한이라는 여자친구 박진(21) 씨와 함께 온 이대희(24) 씨도 ‘급방긋’한 여자친구를 보면서 기뻐했다. 군산 용문초교 6학년 김주영(13) 군이 준비해온 피켓의 문구는 경기장 분위기에 딱 들어맞았다. ‘V10을 향한 우리 열정은 신종플루보다 거세다.’ 김군의 친구들도 신이 나서 관중석을 뛰어다녔다. “야구가 왜 재미있냐”고 묻자 마치 답을 준비해온 것처럼 “9회 말 투아웃에 역전이 있으니까요”라고 합창했다.

5대 0. KIA가 6회까지 한 점도 주지 않고 앞서가자 KIA 팬들의 낯빛이 느긋해졌다. 파도타기 응원이 절정에 이르렀고, 치어리더들의 몸짓도 가벼웠다. 팬들의 눈에 그제야 슬슬 치어리더들이 들어온 듯한 눈치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내 스타일이야.”

“그냥 내비둬…, 내가 벌써 찜했어.”

만약에 야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KIA의 김상현을 연호하는 군산팬들(왼쪽).KIA 선수들의 이름을 적은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 남성팬.

눈물과 감격, 희망을 쏘다

젊은 남성 팬들의 ‘구애’ 열기와 함께 경기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 시각, 관중석과 달리 기자석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KIA 우승 기사를 속보로 보낼 준비를 해야 하는 기자들과 KIA 홍보팀 직원들 사이에 분주히 대화가 오갔다.

“인터뷰는 누굴 하죠? 감독과 선수 2명? 아니면 따로 자료를 마련해드릴까요?”

“감독하고 1명으로 하죠.”

“2명이 낫지 않겠어요?”

대화 도중 경기 상황 기록표가 들어왔다.

“홍보팀장님, KIA가 시즌 1위를 한 게 몇 번째죠?”

“잠시만요. 이 대리, 몇 번째지?”

“여섯 번째입니다. 그리고 8시10분에 관중 1만1000명 매진입니다.”

치열한 속보 경쟁이 펼쳐지는 사이, 기자석에 놓인 TV에서는 현장 상황보다 10초 정도 늦은 화면이 흘러나왔다. 현장에서 들리는 생생한 환호와 방송에서 들리는 환호가 오버랩되면서 흥분은 배가됐다. 결국 경기는 5대 0으로 마무리. KIA의 우승이 확정됐다. 감독과 코치진, 선수들은 부둥켜안았고 팬들도 몸과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4명의 치어리더는 경기장으로 내려와 선수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치어리더 박영선(24) 씨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KIA에서 4년간 일했는데 정말 기뻐요. 시즌 중반 11연승을 할 때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감격스러울 줄은 몰랐어요.”

올해 KIA의 영웅 김상현에겐 아주 특별한 우승이었다. LG에서 친정 KIA로 등 떠밀리듯 내몰렸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국내 최고의 거포로 거듭난 것.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게 고맙습니다. 시즌 초반 트레이드됐는데,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저를 믿고 (경기에) 내보내주신 게 큰 힘이 됐어요.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영광을 안게 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쁩니다.”

KIA의 1위 등극 날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KIA 팬들이 보여준 열기는 고스란히 한국시리즈로 이어질 것이다.

“KIA 없이는 못 살아, KIA 없이는 못 살아~♪.”

조명탑에 불이 꺼져도 팬들의 노래는 계속됐다. ‘포에버 KIA, 포에버 한국 프로야구’를 외치는 듯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600만 관중시대? ‘전국구 갈매기’들에게 물어봐! 성형수술 女, 조기퇴근 男 … 출발지는 달라도 종착지는 야구장

“올림픽 금메달을 딴 대한민국 야구 수준이 이 정도입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정직한 타격왕’이 돼야지. 기자 양반, 꼭 좀 (기사를) 제대로 써주이소.”

9월25일 롯데의 시즌 마지막 경기인 LG 트윈스전이 치러진 서울 잠실구장. 3루 외야석 상단에 자리잡은 롯데 팬 김종택(46) 씨가 바로 뒷자리에 앉은 기자에게 몸을 돌려 한마디 내뱉는다.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휘저으며 입술을 깨문 모습이 KBS 개그콘서트 ‘할매가 뿔났다’의 장동민을 연상케 했다. LG 박용택과 타격왕 수위 자리를 다투는 롯데 홍성흔의 타석.

1회에 이어 3회 두 번째 타석에서도 LG 투수 한희가 고의 4구성 공을 던지자 롯데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율 0.372의 박용택은 이날 타율 관리를 위해 결장했고, 0.371의 홍성흔에겐 제대로 공을 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탓이다. 기자는 앞서 김씨에게 야구장을 찾은 이유를 물으며 안면을 튼 터였다.

“롯데의 마지막 경기를 ‘봐주지’ 않으면 예의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오는 기라예. 우짜겠노. 봐줘야지. (옆에 있던 친구들을 번갈아 보며) 안 글라(안 그렇니) 친구들아?”

다소 ‘4차원적’인 이유로, 건축자재 판매업을 하는 김씨는 친구 3명과 함께 이날 야구장을 찾았다. 그는 경기 내내 친구들에게 양팀 선수들의 타율과 최근 컨디션을 설명하면서 흥을 돋웠다.

만약에 야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롯데 마지막 경기 안 보면 예의가 아니다”

경기 시작 전 분위기는 차분했다. 양팀 팬들 모두 승패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미 시즌 4위(66승66패)를 확정해 갈매기들의 염원인 ‘가을야구’의 꿈에 부푼 롯데, 그리고 7위(52승75패)로 시즌을 끝내 ‘가을야구’에 초대받지 못한 LG 팬들에게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1루와 3루 관중석이 어느 정도 찰 무렵(이날 관중은 1만8227명이었다), 전광판에 출전 선수명단이 발표되자 다소 실망한 듯 팬들의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LG 박용택과 롯데 주포 이대호의 결장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 여유로운 분위기는 3회 들어 돌변했다. 홍성흔과 가르시아의 연속 4구로 2사 만루 찬스가 되자 ‘검은 갈매기’ 로이스터 감독의 손짓이 분주해졌다. 더그아웃을 지키던 이대호가 선발 오장훈을 대신해 타석에 들어서자 ‘갈매기 응원떼’의 신문지 응원 비행이 시작됐다(신문지 응원은 신문지를 찢어 꽃술처럼 만들어 흔드는 것으로, 롯데의 대표적 응원문화다).

‘허리통증’으로 수비가 어려웠던 이대호는 이날 지명타자로 출격할 수밖에 없었지만, 타격왕 경쟁을 벌이는 홍성흔 때문에 벤치를 지켰던 게 아니냐는 해석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2사 만루가 아니던가. 올해 1승4패, 방어율 6.35를 기록한 투수 한희도 이를 악물었다. 파울과 헛스윙으로 2스트라이크가 되자 갈매기들은 숨을 죽였다. 볼과 파울이 이어져 볼카운트는 2-2. 한희의 손을 떠난 6구가 홈 플레이트에 다다를 무렵 이대호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이대호가 밀어친 공은 1루수 키를 살짝 넘기며 우측 파울라인에 바짝 붙는 2타점 적시 2루타로 이어졌다. 평소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30홈런보다 100타점을 하고 싶다”는 약속을 지키는 순간, ‘부산갈매기’ 합창에 맞춘 갈매기들은 집단 군무로 축하했다.

“이대호는 2타점을 더해 올해 100타점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네요. 28홈런에 타율 0.293인데, 이 정도면 4번 타자 노릇을 제대로 한 거죠. 아~ 살맛난다.”

보험회사 직원 김성철(38) 씨가 넥타이를 살짝 늘어뜨리며 한마디 하자 옆에 있던 동료 이현우(37) 씨가 거든다.

“이런 게 야구 아닙니까. 2사 만루에서 ‘한 방’으로 분위기 급반전이죠. 인생 뭐 있나요? 제대로 한 방 휘둘러야지.”

여기서 잠시 정신분석학 사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많은 전문가는 스포츠의 사회·심리학적 효과를 일종의 ‘카섹시스(Cathexis) 현상’으로 분석한다. 카섹시스는 자기감정이나 정신적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일, 즉 억압된 심리상태가 끊임없이 만족을 구하면서 심리적 에너지를 외부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적이나 상사에 대한 불만, 경기침체 우려 등의 스트레스를 야구로 배설한다는 얘기인데, 끊임없이 통계지수를 만들면서 선수 간 경쟁을 유도하는 야구는 어쩌면 우리네 직장인의 애환과도 닮았다.

성형 마스크녀 “야구 보러 동반 외출 감행”

3루 외야석을 어슬렁거리던 기자의 눈에 행동이 수상한 ‘마스크녀’ 3명이 들어왔다. 이대호의 선취 2타점에도 어정쩡한 모습으로 기쁨을 억누르는, ‘카섹시스 현상’이 나타나다 만 듯한 ‘시추에이션’이 포착됐다. 그 순간 올챙이 헤엄치듯 머릿속을 휘젓는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신종플루 때문에 마스크를? 아니야. 그렇다면 맘껏 응원할 텐데…. 군대에서 배운 거수자(거동 수상자) 아닐까.

그런데 얼굴의 3분의 2를 가리는 마스크는 왜? 오옷!’ 그들이 있는 외야석 계단을 오르다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까이서 보니 3명 모두 눈두덩이 부분에 멍 자국이 선명했던 것.

기자 : “신종플루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했나요?”

마스크녀 : “….”

기자 : “야구 보러 자주 오세요?”

마스크녀 : “(서로를 쳐다보며) 네.”

‘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만일 네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네가 충분히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로버트 카파의 말은 옳았다. 오해는 간단히 풀렸다. 친구 사이인 3명 모두 최근 눈과 코 성형수술을 했는데 야구가 무척 보고 싶은 나머지 결국 대형 마스크를 착용한 채 동반 외출을 감행했던 것. 그중 1명은 ‘난생녀’(난생처음 야구장에 온 여자)라고 소개했다.

“‘남친’ 따라 올해 처음 야구를 보러 왔다가 롯데 팬이 됐어요. 케이블TV에서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진짜 야구가 보고 싶더라고요.”

만약에 야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쓰레기 수거용 ‘봉다리’는 롯데의 또 다른 응원 코드가 됐다.

어느새 LG는 3회 이대형의 중전 안타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뒤 5회 윤진호의 2루타로 2대 2 균형을 이뤘다. 5회 롯데 수비가 시작될 무렵 3루 관중석에서 주황색 ‘봉다리(갈매기들은 봉지를 이렇게 부른다) 응원’이 시작됐다. 부산 사직구장에서 나눠준 쓰레기 수거용 주황색 비닐봉지는 구단의 예상과 달리 ‘훌륭한’ 응원도구가 됐다.

3루 내야석에 롯데 유니폼을 입은 ‘범상치 않은’ 한 무리의 갈매기들이 눈에 띄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치킨과 ‘아나고(붕장어)’회, 족발로 한 상 제대로 차린 ‘포스’가 남달랐다. ‘수원 갈매기’라고 씌어진 유니폼을 입은 한모(46) 씨에게 말을 걸었다.

“수원에서 오셨어요?”

“네.”

“단체로 오셨나 봐요?”

“아니라예. 집사람이랑 둘이서 왔는데 여서(여기서) 이분들 만났으예. 다들 부산이 고향이라 카네예(하네요). 말씨를 보니 기자님도 부산 사람이네예? 여(여기) 앉아 한 젓가락 하이소.”

‘서울말 제법 한다’는 말을 듣는 기자였지만 굳어진 혀 근육에서 나오는 ‘인토네이션’은 어쩔 수 없는 모양. 각각 따로 온 네 팀이었지만 함께 응원하다 호형호제가 된 그들은 준비한 먹을거리를 한자리에 펼쳐놓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영화 ‘해운대’에 출연한 이대호의 연기평에서부터 야구팬을 위해서라도 박용택이 출전해야 한다는 논평까지…. 야구는 그렇게 안줏거리이자 친구였다.

저마다 ‘봉다리’를 똘똘 말아 머리에 얹은 갈매기들. 경기가 시작되고 1시간 반가량이 지난 터라 주당(酒黨)이라도 가벼운 취기가 돌 타이밍이었지만, 마음만 맞으면 바로 ‘형님 동생’ 하는 부산사람 특유의 친화력 탓도 있으리라. 그 순간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의 설명이 떠올랐다.

“같은 목표를 위해 같은 응원도구로 함께 응원하면서 주위 사람과 일시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같은 길을 간다는 위안을 받게 된다. 복잡한 현대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한데, 이것이 야구 열풍의 주요 요인이 아닌가 싶다.”

한씨의 아내가 뭔가 불편한 듯 남편에게 귓속말을 하자 한씨 왈(曰) “개안타(괜찮다), 내 오늘 야구 본다고 사장한테 얘기했다.” 대화 내용이 궁금했다.

“주간동아에 이름 나오면 안 돼요”

“요즘 경기가 살아나면서 회사에서 야근이 많아졌거든요. 집사람이 ‘주간동아’에 이름 나가면 사장님한테 찍힐 것 같다고 불안하다네예.(웃음)”(-_-)

7회가 시작되기 전 전광판에 ‘키스 타임(Kiss Time)’이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전광판에 모습이 잡힌 커플은 그 자리에서 키스를 해야 한다. 전광판에 남녀 한 쌍씩 얼굴이 잡히자 기다렸다는 듯 과감한 키스가 이어졌다. 다음 순간 40대 남성 두 명의 얼굴이 전광판에 비치자 야구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LG 여성팬과 롯데 여성팬의 눈싸움 대결도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최근 젊은 야구팬들이 대거 몰리면서 프로야구 각 구단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강화하는 추세다.

이름하여 ‘스포테인먼트’인데, 시구를 하면서 프러포즈도 하는 ‘사랑의 시구 릴레이’, SK의 공연 이벤트 같은 야구 이외의 볼거리로 젊은 팬들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 다시 돌아 잠실야구장. 7회 초 홍성흔이 타석에 들어서자 야유가 터져나왔다. 세 타석 연속 4구로 나간 홍성흔에게 바뀐 투수 오상민 역시 제대로 된 승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 결국 네 번째 4구로 홍성흔이 걸어나가자 답답한 갈매기들의 ‘만민공동회’가 시작됐다.

“다승 공동 1위인 조정훈(롯데)과 윤성환(삼성)도 어떤 식으로든 등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과 선동렬 감독은 등판시키지 않았다. LG 김재박 감독이 자기 팀 선수를 타격왕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지만 네 번이나 고의 4구로 거른 것은 팬들을 무시하는 처사다.”

어쨌든 7회 말 2사 3루에서 롯데 나승현의 폭투로 LG가 결승점을 뽑았고 결국 3대 2로 승리했다. 홍성흔은 안타를 쳐도 타격왕이 불가능한 9회 마지막 타석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승부를 할 수 있었고, 외야 뜬공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갈매기들은 0.001 차이로 ‘타격왕 2위’가 된 홍성흔을 연호하며 ‘당당한 2위가 낫다’고 ‘끼룩’거렸다.(다음 날 LG 박용택은 구단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4위로 시즌을 마감한 롯데 선수들이 단체로 팬들에게 인사하자 팬들은 기립박수로 격려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1승3패로 져 플레이오프 진출은 무산됐지만 갈매기들의 야구사랑은 내년 또 한 번의 600만 관중시대를 약속하기에 충분했다.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주간동아 2009.10.20 707호 (p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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