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7

2009.10.20

죽음과 자살의 우울한 관능적 해석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입력2009-10-16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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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자살의 우울한 관능적 해석
    필자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은 ‘드러눕는 개’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대마초 흡연으로 당국에 체포되면서 한 말이다. 당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말이 오늘날 이 땅의 대마초 애호가들이 애송하는 ‘경구’가 될지는 사강 자신도 몰랐을 터.

    하지만 사강은 단지 대마초 흡연을 정당화하고자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다. 이 말은 유럽의 현대 철학자들이 천착해온 ‘실존’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관련이 깊다. 인간이 가장 ‘실존적’일 수 있는 순간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가질 때라는 얘기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펴냄) 역시 ‘죽음’, 그것도 ‘자살’이라는 깊고도 음울한 주제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자살 안내자’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화자(話者).

    인터넷 자살 카페에 ‘자살 교사범’이 득시글거리는 지금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이 책이 쓰인 1990년대로선 황당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개 ‘실존’에 대해 고민하는 존재다. 택시를 운전하는 동생 A와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 C, 어릴 적 가출해 술집을 전전하다 동생과 관계를 맺는 ‘유디트’라 불리는 여인, 그리고 행위예술가인 미미.

    이들 4명과 이들 사이의 관계에 틈입해 두 여인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화자’인 ‘자살 안내자’가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 동생 A는 늘 형에 가려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유디트는 여고시절 선생님과 관계를 맺고 자퇴를 선택한 뒤 가출해 술집을 전전하는 여인이다. 별 볼일 없는 남녀가 만나고, 형제가 치정에 얽히고,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는 식이니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통속적인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연결하는 고리는 의외로 그림이다.



    책에는 프랑스 화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들라크루와의 ‘사르다나팔 왕의 죽음’이 등장한다. 이 그림들은 각자의 주제어를 갖고 있다. 책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마라의 죽음’에선 치열한 정쟁과 이념의 대립 속에 희생된 프랑스 혁명가 마라의 죽음이 먼저 묘사된다. 그는 정적이 보낸 암살자에 희생되지만 그림 속에서는 지극히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내려다본다. 이 책에선 어떤 이유이건 ‘죽음’은 이렇듯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필연성으로 제시된다.

    유디트는 적진에 침투해 적장의 목을 베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다. 하지만 클림트의 ‘유디트’에선 피가 흐르는 적장의 목이 관능적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누가 행하느냐에 따라 그 자체가 관능적인 퍼포먼스가 된다. 수많은 화가가 ‘유디트’를 그렸지만, 클림트의 유디트는 에로틱하다. 입술을 약간 벌린 채 허공을 응시하는 유디트의 표정에서 ‘혁명의 여인’이라는 이미지는 침전돼 가라앉는다. 죽음은 ‘절정’이라는 제시어다. 작품 속의 유디트 역시 C와 섹스를 하면서 목을 졸라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C는 그 행위로 인해 사정에 이른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마지막 그림 ‘사르다나팔 왕의 죽음’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패배를 직감한 사르다나팔 왕은 자신의 애마와 애첩을 모두 불러모은 뒤 심복으로 하여금 목을 베게 한다. 그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무표정하게 그 참혹한 광경을 응시한다. 작품 속의 사르다나팔 왕은 그래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감상자들은 가장 먼저 죽음과 맞닥뜨린 애첩들의 관능적인 몸과 애마의 몸부림을 접한다.

    그 다음에야 시선은 사르다나팔 왕으로 향한다. 즉 죽음은 이렇듯 관능과 공포를 내포하지만,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그저 언젠가 다가올 ‘필연’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야기는 이 구도대로 전개된다. 죽음을 대하는 자의 거부와 수용을 외줄타기 하듯 묘사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물론 죽음, 혹은 자살 예찬은 아니다.

    우리가 모두 유디트나 사르다나팔, 마라가 될 수 없듯이 죽음은 원하는 방식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 따라서 “삶의 잉여를 압축하지 않고”(저자의 말) 느슨하게 삶을 이어가는 ‘권태로운 자’에겐 죽음조차 비(非)실존적이다. 저자는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관계 속에 절망하거나 나포돼 무료한 나날을 이어가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생의 종료’를 택하는 게 더 실존적인 것 아니냐고 말한다.

    죽음과 자살의 우울한 관능적 해석

    <B>박경철</B><BR>의사

    책은 도발적인 주제, 충격적인 소재, 기이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책은 탐미적이다. 죽음과 자살이라는 음울한 코드를 관능적으로 그려낸다. 이 책이 문제작으로 일컬어지고 한국 문학을 ‘김영하 이전’과 ‘김영하 이후’로 나누는 평론가까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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