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7

2009.10.20

‘조두순 사건’으로 한계 노출한 근대 형법제도

私刑 퇴행 아닌 피해자 보호·지원에서 法 ‘존재 이유’ 찾아야

  • 김종갑 건국대 영문학과 교수·몸문화연구소장 jonggab@konkuk.ac.kr

    입력2009-10-14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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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두순 사건’으로 한계 노출한 근대 형법제도

    성폭행으로 정신적, 신체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나영이(가명)가 심리치료 과정에서 그린 그림. 나영이는 “범인을 60년동안 쥐와 벌레가 있는 독방에 가두고 흙이 섞인 밥만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피해자 대신 가해자의 이름을 따 ‘조두순 사건’이라고 불리는 ‘나영이 사건’의 가해자에게 12년형을 선고한 법원의 결정에 누리꾼의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어린이 대상 성범죄의 죄질에 비할 때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것이다. 짐승보다 못한 가해자의 인권은 사치이자 억지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룬다. 가해자 조두순의 얼굴과 신상을 천하에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도 폭주하고 있다.

    누리꾼들의 이러한 분노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인면수심의 범죄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필자 역시 가해자가 나와 같은 인간이고 한국인이며 중년남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검찰과 법원의 심판만을 기다리기에는, 또 그저 ‘남의 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사건이다. 그래서 ‘남’인 우리도 피해 어린이의 부모 못지않게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 적개심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 상당수 국민이 사형, 얼굴 공개 등의 처벌을 주장하는 과정 역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죄라는 형식보다 죄인의 실체에 분노



    불과 몇 개월 전, 연쇄살인범 강호순에 대해서도 온 국민의 분노가 끓어넘쳤다. 그의 인권보호를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 아무리 가증스러운 가해자라 해도 신분은 보호돼야 한다는 인권 원칙에 앞서 국민은 그의 얼굴을 공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다. 그래야 그 끔찍한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줄 수 있지 않은가.

    드디어 강호순의 얼굴이 공개됐고, 우리의 가슴을 짓이기던 분노는 탈출구를 찾게 됐다. 강호순이라는 이름 석 자는 추상적 기호이며 공허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공허한 형식을 내용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우리는 분노하면서도 정작 분노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 일반에 대해, 그리고 인면수심의 개인이 아니라 범죄의 흉악무도함에 대해 분노할 따름이다. 분노의 화살은 가슴에서 넘쳐나는데, 정작 쏠 과녁이 없는 형국이다. 강호순의 얼굴이 공개되면서 드디어 우리의 분노는 과녁을 찾게 된 것이다.

    범죄의 성격이 끔찍할수록,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나의 일로 느껴질수록, 동병상련의 공감대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그것을 추상적 범죄로만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심정적으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적 복수의 형태로 나타나는, 사형(私刑)이나 공개처형의 집행자가 되고 싶어 한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형태의 처벌이 존재했다. 죄인에게 칼을 씌워 광장에 세워놓은 뒤 행인이 마음껏 그에게 침을 뱉도록 한 것, 죄인의 머리를 잘라 다리 난간에 걸어놓은 것, 사후에 죄가 드러난 사람의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신체를 훼손한 뒤 공개된 장소에 걸쳐놓는 부관참시(剖棺斬屍) 등이 그 예다. 서양에도 죄인의 몸을 벌하고 모욕을 주는 비슷한 형태의 처벌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점은 과거에는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추상적 개념의 죄 자체보다 ‘죄인의 몸’에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에이, 더러워!’라고 욕하며 침을 뱉을 수 있는 죄인의 몸이 그 죄에 대한 징벌 대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어 공개처형이 자취를 감추면서, 피해자가 드러내놓고 죄인의 몸에 분풀이할 수 있는 방법도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인권이 존중돼야 하며, 최종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범죄자가 아닌 피의자의 신분이 유지돼야 한다는 것도 근대에 들어서면서 확산된 사상이다.

    ‘조두순 사건’으로 한계 노출한 근대 형법제도

    올 2월 여성부 주최로 아동성폭력 근절을 위해 열린 ‘우리 아이 지킴의 날’ 행사에서 서울시 소년소녀합창단이 소망을 적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왼쪽). 올 3월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첫 공판이 열린 수원지법 안산지원 401호 법정에 쌓인 자료와 올 2월 현장검증을 하는 강호순(오른쪽).

    근대 형법제도는 이처럼 원칙적으로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원리에 입각해 있다. 분노와 증오의 대상은 죄 자체이지, 죄인 개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집행되는 사형, 감금, 벌금을 복수의 형태로 볼 수 있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피해 당사자가 직접적으로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거나 복수를 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복수의 주체는 피해자 본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그와 아무 연관 없는 경찰이나 검찰이며, 그것도 경찰관이나 검사 개인이 아니라 경찰 또는 검찰이라는 제도다.

    “신분 밝혀라” 요구 전근대적 유산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피해자의 원한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피해 당사자가 아닌데도 내 일처럼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국민은 어떻게 그 분노를 이겨낼 수 있을까. 또 가해자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대신 법의 심판을 받고 난 뒤 다시 사회로 복귀, 더욱 악랄한 수법으로 계속 범죄를 저지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가해자가 감옥에서 교화되어 새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다면 왜 법은 국민의 아까운 혈세를 낭비하면서까지 그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근대 형법제도의 원칙은 애당초 실행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 ‘밀양’은 이 불가능한 모순을 한 여성의 절절한 육성을 통해 들려줬고,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 공주’는 가해자를 두 손으로 직접 처단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피해자들의 절박한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렇다면 현대의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침을 뱉고 멱살을 잡기 위해 범인의 신분을 공개해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러한 요구가 거세지다 보면 ‘친절한 금자씨’에서 그러했듯 사형(私刑)으로 퇴행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일까. 또 이러한 감정적 반응을 전근대적 유산으로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만일 그러한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법의 이름으로 사상(捨象)시켜버린다면 법의 정신도 소멸되지 않을까 싶다.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을 과연 법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조두순 사건은 근대 형법제도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사건은 근대 형법제도가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출발했던 불가침적 인권의 의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피해자를 배제한 채 가해자를 붙잡아 처벌하는 것으로 형법의 임무가 완료됐다고 볼 수 없다는 시사점도 남았다. 한계를 드러낸 법이지만, 그럼에도 그 ‘존재의 이유’를 피해자에 대한 보호 및 지원에서 찾아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피해자의 분노와 원한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다독거리고 그가 받은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모색할 시점에 우리는 서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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