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6

2009.07.28

신용불량에서 어찌 탈출하오리까

연체→사채→채무불이행 악순환 … 개인워크아웃·프리워크아웃 노크해야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09-07-20 19: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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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불량에서 어찌 탈출하오리까
    “이제 마지막이다.”

    2009년 6월30일은 박기성(가명·40) 씨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다. 신용회복위원회로부터 채무 조정을 받은 빚 5000여 만원을 67개월 만에 완납한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6년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자 박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박씨가 신용회복위원회의 문을 두드린 것은 2004년. 이전의 그는 금융채무 불이행자, 이른바 신용불량자는 자신과 평생 상관없는 말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지게 된 빚은 순식간에 2배로 불어났다. 카드 돌려막기로 몇 달간 버텨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막막했습니다. 단돈 1만원, 2만원이 아쉽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돈을 갚을 엄두조차 내지 못해 주변에선 파산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지가 멀쩡한데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무를 나눠서 갚을 수만 있다면, 금리만 좀 조정이 된다면 빚을 갚아나갈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았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박씨의 경우처럼 금융채무 불이행자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사업이 부도를 맞거나 병원비·학자금으로 돈이 필요해서 혹은 작은 아파트 한 채라도 사려고 돈을 빌린 사람들. 하지만 어려워진 경제여건 탓에 실직을 하거나 임금이 삭감돼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금융채무가 연체되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사금융에서 급전을 빌리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이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결국 빚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단초가 된다. 사금융 이용자는 189만여 명으로 시장 규모는 약 16조5000억원에 이른다. 보통 4~5군데 사채·대부업체에서 급전을 빌려 돌려막기 식으로 버텨보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못한다.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해 결국 금융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일단 금융채무 불이행자라고 낙인이 찍히는 순간, 사회·경제적 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는다. 직장인은 기본 생계비 120만원을 제외한 모든 급여가 압류되며, 사내에 금융채무 불이행자로 소문나면 정상적인 직장생활은 힘들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오는 상환 독촉전화에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는 것은 물론, 신규대출은 소액이라도 거부된다. 오직 현금만 사용할 수 있다. 나중에 채무를 다 상환해도 한 번 새겨진 ‘금융채무 불이행자’라는 주홍글씨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한때 금융채무 불이행자였다는 낙인 때문에 마땅히 돈을 빌릴 데도 없다. 빌릴 만한 곳은 고리의 사채업자와 불법 대부업체뿐이다. 그러다 급한 상황이 닥치면 이런 업체를 찾아갈 수밖에 없어 결국 어렵사리 벗어난 금융채무 불이행자로 다시 빠져드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개인파산·면책제도 악용도 여전

    사금융에 눈을 돌리기 전, 합법적인 각종 신용회복지원제도를 알아본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다. 채무 부담을 더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제도는 크게 자산관리공사가 운영하는 신용회복기금의 전환대출,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한 채무조정, 법원을 통한 파산·면책 절차 세 가지로 나뉜다.

    3000만원 미만의 소액 연체자라면 자산관리공사의 신용회복기금 전환대출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전환대출은 신용이나 담보가 부족해 금융기관 또는 등록대부업체로부터 높은 금리로 대출받은 채무를 은행의 낮은 금리로 전환할 수 있게 자산관리공사가 보증 지원하는 제도. 1000만원 이하의 채무는 방문 없이 인터넷 신청만으로도 가능하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한 자산관리공사 신용회복기금의 전환대출과 채무 재조정 신청자 수는 4만7000여 명에 이른다.

    금융회사에 대한 총채무액이 5억원 이하인 과중채무자는 2002년 출범한 신용회복위원회의 신용회복지원제, 즉 개인워크아웃제도를 고려해볼 수 있다. 이 제도를 이용하면 대출금의 종류, 총채무액, 변제 가능성, 담보, 채무자의 신용 등에 따라 최장 8년 내에서 채무를 분할 상환할 수 있다. 일정 범위 안에서 이자 및 원금 감면도 가능하며, 채무자의 상황을 고려해 1년 이내에서 채무상환을 유예할 수도 있다. 개인의 신용상태도 ‘금융채무 불이행’에서 해제돼 ‘신용회복 지원 중’으로 전환된다.

    프리워크아웃(Pre-Workout·사전채무조정)제도는 금융회사 채무 연체기간이 1개월 이상 3개월 미만인 단기 연체자가 대상이다. 단기 연체자들이 금융채무 불이행자로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로 지난 4월13일 첫 신청을 받았으며 1년간 한시적으로 운영된다. 연체이자에 한해 채무 감면이 이뤄지며, 최저 약정이자율의 70%가 적용돼 고리의 이자율이 일부 조정된다. 지난 1~6월 신용회복위원회에 개인워크아웃과 프리워크아웃을 신청한 사람은 5만5900여 명.

    신용불량에서 어찌 탈출하오리까
    하지만 이런 제도가 완벽하게 모든 금융채무 연체자 및 금융채무 불이행자를 구제하는 것은 아니다. 신용회복위원회 김상길 선임조사역은 “워크아웃제도는 어디까지나 채무자의 재활 의지가 있음을 전제로 한 신용회복 구제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신용회복기금 전환대출의 경우 이미 금융채무 불이행자이거나 직업, 소득이 없는 경우에는 지원에서 제외된다.

    또한 사채를 비롯한 대부업체 채무 연체자는 사전채무조정 신청을 할 수 없다. 협약에 참가한 3600여 개의 채권금융회사 가운데 대부분의 대부업체는 빠져 있기 때문. 사전채무조정 신청을 한 사람은 5000명이 넘지만 실제로 채무 조정이 확정된 사람은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선임조사역은 “현재 워크아웃 협약에 참여하지 않은 대부업체 및 일부 외국계 은행과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런 한계 때문에 여전히 많은 금융채무 연체자가 빚을 갚지 않기 위해 개인파산·면책제도를 악용한다. 가짜 채권자를 내세운 채무자가 빚이 많은 것처럼 속여 파산신청을 하거나 법조 브로커가 채무불이행을 부추기는 식이다. 이 경우 파산·면책제도를 통해 채무에 대한 법적 책임은 벗어나지만 금융채무 불이행자로 등재된다. 공직이 제한되고, 변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다. 신원조회에도 파산상태가 체크돼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는다.

    정부가 금융채무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개인의 도덕적 해이 탓이라는 데 머물러 있다. 각종 신용회복지원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비록 개인의 채무 문제지만 시혜 차원에서 구제한다는 시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해 민생연대 이선근 대표는 “카드 대란을 일으켜 정부가 나서서 빚을 지라고 권했던 김대중 정부, 서민대출을 꺼리고 은행 문턱을 높여 서민을 불법 사금융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은행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김대중 정부의 원죄와 은행의 공공성을 생각하면 금융채무 불이행을 단지 개인의 도덕적 해이 문제로만 보긴 어렵다”고 주장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 5월 말 현재 금융채무 불이행자는 250만명에 육박하며 신용등급 7~10등급에 해당하는 저신용층도 720만명에 이른다.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금융소외자에 해당하는 것. 생색내기식 대책이 아닌, 가계신용 회복을 위한 제도의 사각지대 보완 같은 광범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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