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1일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뒷줄 가운데)이 3·1절 행사에 SBS TV 드라마 ‘야인시대’ 출연진과 조일환 씨를 비롯한 주먹계·무술계 인사를 초청했다. 위 오른쪽 원내는 조씨의 대부격인 김두한 씨.
1970년대 이후 한국 주먹계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조씨는 이름값이 전국적으로 통한다는, 이른바 ‘전국구 주먹’의 간판이기도 하다.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주먹이 되자’는 그의 독특한 건달관(觀)에 영향을 받은 주먹들이 전국 곳곳에서 각자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생전에 그는 추종자들에게 ‘협객’으로 떠받들어졌다. 기자는 실제로 수백명의 주먹이 모인 어느 행사장에서 사회자가 그를 협객이라고 부르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협객은 주먹을 가리키는 몇 가지 용어, 이를테면 양아치, 조폭(조직폭력배), 건달 가운데 등급이 가장 높은 표현이다. 그쪽 세계의 룰에 따르면 의협심과 애국심을 갖춰야 협객 칭호를 얻는다. 그렇지만 전국구 주먹들이 서로를 높여 부를 때의 방편으로, 혹은 후배주먹들이 원로주먹들을 예우하는 뜻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일본 정부에 항의 3차례 손 잘라
맨손싸움의 1인자 조창조 씨와 함께 낭만파 주먹의 상징적 인물이던 조일환. 그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단지(斷指)다. 1974년 8월 단지사건 이후 그에게는 ‘주먹계 우국지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단지사건이란 육영수 여사 피살에 격분한 그가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손가락을 자른 일을 가리킨다.
고향인 충남 천안의 유관순 동상 앞에서 부하 5명과 함께 새끼손가락을 자른 그는 11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상경해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100명이 단지를, 10명이 할복한다는 계획이었지만, 경찰이 제지하는 바람에 34명의 단지로 막을 내렸다. 1996년 KBS는 이 사건을 소재로 ‘단지의 꿈’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1996년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일 간 갈등이 고조됐을 때는 이른바 독도결사대를 모집했다. 2000명이 독도로 몰려가 일제히 손가락을 잘라 손가락무덤을 만들고 그중 10명은 할복함으로써 독도수호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다는 이 무모한 계획은 관계 당국의 해산 명령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2001년 8월 독립문 단지사건도 그의 작품이다. 천안에서 올라온 자칭 ‘구국결사대’ 13명이 독립공원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손가락을 잘랐는데, 모두 조씨를 따르는 청년들이었다. 조씨는 이날 경찰의 사전봉쇄로 상경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국내 언론은 물론 CNN, ‘뉴욕타임스’ 등 세계 유수의 언론에 보도됐다.
2005년 3월엔 가족까지 손가락을 잘랐다. 주한 일본대사의 독도 망언과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이 도화선이었다. 이날 조씨와 측근 10여 명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단지를 시도했으나 경찰의 강력한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양측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틈을 타 조씨의 아내 박경자(당시 66세) 씨가 “일본은 사죄하라”는 구호와 함께 식칼로 손가락을 잘랐고, 장남이 뒤를 따랐다.
조씨는 주례나 축사 등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먹의 애국심을 강조했다. 주로 일본의 만행과 야욕을 비난하는 발언이었다. 기자와 만날 때도 자주 그런 말을 했다. 2008년 5월 인터뷰 때에는 독도 얘기부터 꺼냈다. 독도의 동도와 서도 사이를 메워 섬을 만든 다음 주택을 건설해 1차로 100가구쯤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조씨의 우익적 성향은 김두한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씨가 김두한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대 초반이던 1961년. 두 사람이 만난 계기는 이렇다. 당시 김두한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권유로 우익단체인 애국단을 결성했다. 그런데 돈 문제로 애국단에 참여한 주먹들과 충돌이 빚어졌다. 과거의 부하들까지 등을 돌렸다. 이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애국단 조직국장 김길용은 ‘천안곰’이라는 별명으로 충남 일대를 휘어잡고 있던 조씨를 불러올렸다.
조씨는 타고난 싸움 실력으로 김두한의 반대세력을 평정했으며, 이 일로 그의 이름이 중앙무대에 알려졌다. 김두한의 ‘협객정신’에 반한 조씨는 이때부터 천안과 서울을 오가며 김두한을 보좌했고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자 한국독립당 의원이던 김두한은 조씨에게 이병철 회장의 다리를 자르라고 지시했다. 조씨는 이 회장 집 부근에 며칠간 잠복하며 기회를 노렸으나 실패했다. 얼마 후 김두한은 국회에 출석한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뿌렸다.
조씨는 김두한이 1967년 수원에서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선거참모를 맡기도 했다. 1968년 국토건설단에 끌려간 조씨는 한라산 산간도로인 이른바 5·16도로를 닦았다. 전국 폭력배들이 모인 그곳에서 그는 몇 차례 싸움을 벌인 끝에 건설단 최고의 주먹으로 인정받았다. 경비대도 그의 가치를 인정해 총대장을 맡겼다.
조씨 사망으로 ‘김두한系’ 무너져
1974년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 직후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천안 유관순 동상 앞에서 부하들과 함께 손가락을 자른 조일환 씨(위). 조씨는 손가락이 잘린 채 서울로 올라와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조씨는 1970년대 후반 서울 주먹계에서 3대 패밀리 시대를 열었던 조양은 김태촌 씨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조양은 씨의 경우 청주교도소 수감 시절 친구의 딸을 소개해줘 결혼에 이르게 했다.
말년에 조씨는 헌혈·장기기증운동과 학교폭력추방운동에 앞장섰다. 지난해 1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총회 소속 선교목사로 취임한 이후에는 전국을 다니며 설교와 간증을 했다. 최근엔 충남 홍성군에 청소년 수양관을 세워 중·고교 폭력조직인 일진회 소속 학생들을 교화하는 일을 했다.
조씨는 2002년 SBS TV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누릴 때 김두한의 후계자로 각광받았다. 이를 두고 주먹계 안팎에서는 말이 많았다. 일부 주먹들은 조씨가 너무 나서고 과거 행적을 부풀린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어느 행사장에서 기자들이 조씨에게만 몰려들자 동석했던 다른 원로주먹들이 자리를 뜨는 해프닝까지 빚어졌다.
한국 주먹계의 한 축이던 조씨의 죽음은 ‘정통 주먹계’ 판도를 바꿀 것으로 보인다. 족보를 따지는 주먹들 사이에서 원로주먹으로 대접받는 이들은 모두 1세대 주먹의 직계다. 조씨의 선배격인 70대 중반 정종원(오타), 신상현(신상사) 씨는 각각 이정재, 이화룡의 직계다. 조창조 씨는 한 단계 거쳐 시라소니와 연결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