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5

2009.07.21

“핵실험 하든 미사일 쏘든 먹고사는 일이 더 급해서리…”

요즘 북한 주민들 ‘결속’ 대신 생존전쟁 … 외부 사정에 무관심해 선전선동도 안 먹혀

  • 주성하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입력2009-07-15 2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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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실험 하든 미사일 쏘든 먹고사는 일이 더 급해서리…”

    6월 초 북한과 중국 접경인 단둥에서 바라본 북한. 주민들이 압록강변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함경북도 두만강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북한 주민 A씨는 매일 저녁 9시면 잠자리에 든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딱히 할 일도 없을뿐더러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등잔에 넣을 석유 값만 더 들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 6시면 눈이 떠진다. 그나마 요즘처럼 밤이 짧은 여름은 낫다. 밤이 긴 겨울에는 하루 12시간 넘게 누워 있기도 해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런 날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함경남도 단천지역에 사는 B씨의 형편은 그나마 좀 낫다. 가끔 저녁에 1~2시간씩 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TV를 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진 않다. 신문을 본 지도 오래다. ‘노동신문’은 간부들만 본다. 다 본 신문은 장마당(북한의 시장)에 담배종이로 팔려나온다.

    A씨와 B씨 모두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다니는 소리 소문에 기대어 사는 실정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어떻게 하면 돈을 좀더 많이 벌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B씨는 “나뿐 아니라 요즘 북한 사람들은 다 먹고살기 위해 돈벌이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TV를 봐야 늘 같은 소리고 거기서 거기라, 이젠 뉴스에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5월25일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고 한 달 반 정도 지났고, 뒤이어 미사일 발사실험을 강행한 이후 요즘 북한의 내부 풍경이다. 이는 여러 경로를 거쳐 현지 주민들과 직접 통화해 확인한 내용이다. 그동안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이 외부세계는 물론, 북한 내부의 여론까지 감안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핵실험과 인공위성으로 포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가 주민 결속에 도움이 되리라고 봤기 때문이다.

    변화 갈망 “빨리 전쟁이나 터져라”



    하지만 실제 북한 주민들의 목소리에서는 ‘결속’ 의지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가 김정일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주민 결속이나 긍정적인 여론 형성에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한 주민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내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 주민들이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빨리 전쟁이나 터져라”다. 이 말에는 ‘전쟁이라도 해서 죽든, 살든 이 지긋지긋한 처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

    북한 주민들은 변화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한 지도자들 스스로 중국처럼 변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주민들은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일임을 잘 안다. 또 반체제운동으로 인한 정권 변화는 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가장 실현 가능한 기대는 외부세계가 북한 체제에 압력을 가해 강제적으로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심지어 외부에서 전쟁을 일으켜주는 극단적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이 핵을 갖고 있으면 외부세계의 압력 강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민들은 잘 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나 터져라’는 희망이 이뤄질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는 것이다.

    북한 주민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핵을 가진 김정일 정권이 변화를 거부한 채 고슴도치처럼 웅크리는 것이다. 이는 김정일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지난 20년 가까이 기아와 빈곤에 시달려온 주민들이 김 위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이미 ‘강성대국’이니 경제생활 향상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런 사정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핵무기가 김정일 체제 유지를 위해 개발됐다고 인식하면서도, 핵실험에 박수를 보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북한 내부에서도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계층이 존재하고, 또 세뇌교육의 영향으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의도’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주민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 주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예로 북한 주민 C씨는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아직도 굶어죽고 있는데 인공위성 발사가 웬 말이냐”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핵실험까지는 체제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자금을 투자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공위성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자는 1998년 8월 북한이 인공위성으로 포장한 대포동 미사일을 처음으로 쏘아 올렸을 때 북한에 있었다.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할 때였다. 당국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고 공포하자 주민들은 서로 만나면 공공연히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불만만큼은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인공위성 개발과 발사에 막대한 돈이 든다는 점은 북한 주민들도 잘 안다. 그런데 인공위성이 올라가서 고작 하는 일이 김일성 부자 찬양가를 내보내는 것이라니….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주민 의식이 더욱 깨어 있다.

    북한 주민 D씨는 “아직 전자시계조차 못 만드는 나라가 인공위성을 개발한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면서 “그럴 돈 있으면 쌀이나 사오겠다는 것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의 심정일 터”라고 말했다.

    “위성은 정신 나간 짓 … 쌀이나 사와라”

    “핵실험 하든 미사일 쏘든 먹고사는 일이 더 급해서리…”

    6월21일 신의주 압록강변의 한 창고에서 인부들이 배편으로 도착한 하얀 포대를 창고와 트럭에 싣고 있다.

    북한 주민들에 대한 당국의 선전선동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만성적인 경제난과 무관하지 않다.

    전력 사정이 열악해 주민들이 늘 어둠 속에서 살다 보니 TV를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신문 발행부수도 크게 줄었다는 것. 그마저도 뻔한 내용이라 이제는 대다수 주민이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주민의 관심이 먹고사는 문제에만 쏠려 있다 보니 당에서 가끔 실시하는 학습이나 강연회에 빠지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과거 같으면 심하게 비판받을 일이지만, 요즘엔 초급 간부들조차 빠지기 일쑤라는 것. 심지어 초급 간부들이 직접 장사에 뛰어든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 때문일까. 대부분의 북한 주민은 최근 북한이 강행한 중·단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북한 당국은 이를 TV나 신문을 통해 보도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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