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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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한국인 숨결과 대화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9-04-29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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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길에서 한국인 숨결과 대화

    신정일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364쪽/ 1만5000원

    걷기가 유행이다. 보통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일 때는 마라톤이 유행이지만 2만 달러가 넘으면 걷기가 대세란다. 그래서인지 걷기에 대한 책이 잇따라 나온다. 시사주간지 첫 여성 편집장을 지낸 서명숙 씨는 제주에 8개 코스, 105km에 이르는 ‘제주 올레길’을 만들었다. 그는 ‘제주 걷기 여행’(북하우스 펴냄)에서 800km 산티아고 길을 걷다 고향 제주를 떠올렸다고 한다.

    동아일보 김화성 기자가 펴낸 ‘길 위에서 놀다’(동아일보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 길 걷기’가 콘셉트인 여행서다. 제주 올레길, 전남 강진 육십 리 해안길, 선운사 꽃무릇길, 지리산 둘레길, 오대산 구룡령 옛길,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 서산 절길, 동해안 대진~강구 해안길 20개의 코스를 소개할 뿐 아니라 ‘가는 길’의 정보와 ‘먹을거리’도 제공해 이 책 한 권 들고 나서면 만사형통일 것처럼 여겨진다.

    무엇보다 주옥같은 문장이 넘친다. 매 편에 등장하는 명시뿐 아니라 “제주 올레길은 연인이 손잡고 걸으며 속삭이는 길이다. 엄마와 딸이 도란도란 걷는 길이다. 아버지가 막내 손잡고 걷는 코스다. 밤엔 서귀포 칠십 리 앞바다 불 밝힌 갈치배들을 보며 가슴 적시는 길이다”처럼 산문시 같은 설명글에는 여행을 떠난 이들의 순간적인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느낄 수 있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직함을 가진 문화사회학자 신정일 씨는 걷기에서는 공인된 전도사다. 그는 25년간 공식적으로만 우리 강과 옛길을 1만6000km 넘게 걸었다고 한다.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랜덤하우스 펴냄)은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8도의 40개 코스를 소개한다. 책에서 그는 걷기의 효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은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약이나 음식도 걷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다산 정약용도 걷는 것을 ‘청복(淸福)’, 즉 ‘맑은 즐거움’이라고 보았다.”



    그는 왜 옛길과 강을 걷는가. 그 길은 사라져간 역사의 길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노릇을 해줄 뿐 아니라 우리 국토에 담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행위에는 ‘사유하는 시간을 확보’한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사유의 한 전형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가장 아름다운 장거리 도보답사 길로 부산해운대에서 동해 바닷가를 따라 북한의 녹둔도까지 이어지는 일명 ‘동해 트레일’을 추천한다.

    “포구가 이어지는 동해 바닷길에는 관동팔경을 비롯해 금강산, 설악산, 칠보산 등의 아름다운 산들과 용화, 장호, 경포대, 원산의 명사십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해수욕장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수많은 어종이 있어 미식가들이 군침 흘리는 곳이 푸른 바다와 함께하는 동해 트레일이다. 그 길을 남북한 공동으로 개설한다면 한반도는 물론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상품이 되지 않을까.”

    그 길에서 한국인 숨결과 대화
    실제로 저자는 요즘 ‘동해 트레일’을 ‘제주 올레길’처럼 세계적 명소로 만들고자 불철주야로 뛴다고 한다. 이 책은 코스 안내, ‘꼭 둘러봐야 할 곳’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단순한 여행안내서는 아니다. 많은 여행서에 없는 몇 가지 미덕을 갖고 있다.

    첫째, ‘택리지’ ‘지봉유설’ ‘연려실기술’ 등 역사적 전거와 전설을 통해 걷는 길의 역사와 배경을 알려주는 인문지리서다. 둘째, 독서가로서의 이력을 통해 역사적 글이 지닌 맥락을 잘 설명해준다. 셋째, 시인의 감성을 읽을 수 있다. 그는 글 속에서 보들레르, 두보, 김수영, 김지하, 김용택, 곽재구 등의 시편을 인용한다. 뿐만 아니라 글 곳곳에서 그의 시편처럼 느껴지는 감상이 드러난다. 옛것에 대한 그리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들에 대한 아쉬움, 어린 시절의 추억 등을 이야기할 때 그는 어김없이 시인의 단말마를 뱉어낸다. 그가 발표하지 않은 시 400여 편을 갖고 있다고 김화성 기자는 자신의 책에서 귀띔해준다.

    마지막으로 사람들과의 만남이 주는 진한 감동이 있다. 동행한 사람이나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과 나눈 대화에서 오랜 세월 한길을 걸어온 이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젊은 사람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무엇을 그는 찾아낸다. 뭇 사물은 그가 의미를 부여했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의미로 거듭난다는 것을 그의 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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