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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여성 편력만큼 정치·문화에도 일가견

즉위 500주년 기념 유품 대공개 … 부정적 선입견 뒤에 숨은 진면목 밝히는 기회

  •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헨리 8세, 여성 편력만큼 정치·문화에도 일가견

헨리 8세, 여성 편력만큼 정치·문화에도 일가견

TV 시리즈 ‘튜더스’

‘6명의 왕비를 맞이하고 2명이나 처형한 잔인무도한 전제 군주’ ‘로마 가톨릭에 맞서 스스로를 종교 수장이라고 선포한 독불장군’ ‘왕비의 시녀를 마음대로 갖고 논 욕정과 음모의 화신’. 영국의 역사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헨리 8세(재위 기간 1509~ 1547년)에 대한 이야기다. 변덕스러움과 과격함,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섹스의 화신 같은 부정적 이미지 일색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올해 헨리 8세의 즉위 500주년을 맞아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각종 기념행사는 여성 편력사로 덧칠돼온 그의 이미지에 감춰진, 구부러진 역사의 뒤안길을 찾아가는 지도를 제공한다 하겠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행사는 영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도 유명한 런던 타워에서 개최되는 헨리 8세 유품전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유품은 400년 넘게 왕실 창고에 잠자고 있다가 일반 관람객에게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재위 시절 헨리 8세가 입고 사용했던 유품들은 그의 궁정 생활과 대외활동 모습을 사실 그대로 그려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독불장군, 욕정과 음모의 화신

예를 들어,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른 지 10여 년이 지난 1520년에 만든 것으로 기록돼 있는 전신 갑옷을 보면 젊은 시절 그가 얼마나 미끈한 체격의 소유자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동안 초상화와 조각물을 통해 알려진 ‘뚱보’ 헨리 8세의 모습과는 판이한 ‘슬림 사이즈’의 갑옷에 관람객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역사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젊은 시절 헨리 8세는 활쏘기는 물론 마상(馬上) 창 겨루기의 일종인 주스트(Joust)에 뛰어난 기량을 보인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경기 도중 말에서 떨어져 머리에 부상을 당한 뒤 줄곧 병상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 사이 몸무게가 크게 늘었던 것이다. 이런 탓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스포츠에 능하던 활동적인 헨리는 사라지고 음흉하고 굼뜬 이미지의 헨리만 남게 됐다.

호색에 빠진 마초적 인물로 묘사돼온 헨리 8세를 이야기할 때 여섯 번에 걸친 결혼과 잦은 이혼이라는 개인사를 빼놓긴 힘들다. 이에 대해서도 일부 역사학자는 헨리 8세를 연구해온 사람들이 그와 이혼했거나 그의 손에 처형당한 불운했던 왕비들의 개인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작 헨리 8세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실종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런던정치경제대학(LSE) 역사학 교수 출신이자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유명한 데이비드 스타키 박사도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최근 그는 수십 년간 주로 여류작가와 학자들이 집필한 헨리 8세 관련 저작물이 그에 대한 가학적 이미지만을 생산해왔다고 주장했다. 스타키 박사를 진행자로 투입해 영국의 민영방송 ‘채널4’가 제작한 4부작 다큐멘터리는 이런 선입견 뒤에 가려진 헨리 8세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법하다. 4월 한 달 내내 방송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제작진은 영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먼지 쌓인 중세 문헌을 뒤져 헨리 8세의 출생부터 결혼과 이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특히 로마 교황의 휘하에서 벗어나 개혁교회의 수장을 자처하며 성공회(Anglican Church)를 창설한 배경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예정이다. 헨리 8세가 자신과 앤 불린의 이혼에 반대하던 가톨릭 교황에 반발해 딴살림을 차릴 목적으로 영국 성공회를 만든 것처럼 알려진 항간의 인식에 맞서, 그가 추구하던 종교개혁의 배경과 의미를 되짚어본다. 다시 말해 헨리 8세 시대의 튜더 왕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간섭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16세기 종교개혁 초기만 해도 로마 교황청을 옹호하고 루터파를 비난하던 헨리 8세가 반(反)가톨릭으로 돌아선 데는 어떤 배경이 있는지 등을 문헌 분석을 통해 입증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캐서린의 금발머리 첫 공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헨리 8세의 성품과 취향에 대해서도 재조명한다. 중요한 사실은 헨리 8세가 당시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16세기 유럽 예술을 꽃피우는 데 버팀목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 헨리 8세는 하프를 비롯한 여러 악기 연주에 능했으며 종교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헨리 8세의 예술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1546년 케임브리지의 최고 명문으로 알려진 트리니티칼리지 설립으로 이어졌다. 물론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의 물결이 영국 전역을 휩쓸 당시 가톨릭이 소유권을 갖고 있던 케임브리지의 많은 칼리지 역시 재산 몰수 또는 폐교를 당할 운명에 처했다. 헨리 8세는 14세기에 지어진 2개의 칼리지를 합쳐 트리니티칼리지를 설립하는 중재안을 수락하면서 케임브리지의 전통을 이을 수 있게 했다. 당시 헨리 8세의 정치적 결단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만 31명을 배출한 세계적 명문 트리니티칼리지는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올 상반기 내내 헨리 8세가 살았던 런던 근교의 햄프턴 궁전에서는 그와 관련된 기념행사가 봇물을 이룰 예정이다. 그중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행사는 역시 헨리 8세의 화려한 결혼과 이혼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와 강연. ‘헨리의 여인들’이라는 전시회에서는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여자였던 캐서린 파가 사망한 뒤 지금까지 보존돼온 금발머리가 공개된다. 물론 한 번도 일반에게 공개된 적 없는 유품이다. 캐서린 파는 헨리 8세의 장녀인 메리의 시녀 출신인데, 쉰둘이던 헨리는 자신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 캐서린과 결혼해 3년 반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여섯 번의 결혼 중 두 번째로 긴 결혼생활이었다.

이번 행사에서는 네 번째 부인 앤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했던 당시 왕실 문서도 공개된다. 헨리 8세는 세 번째 부인이 왕자를 낳고 죽은 뒤 초상화만 보고 앤을 간택해 6개월 정도 결혼생활을 했지만, 못생긴 데다 품위가 없으며 영어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언하고 그녀를 왕실에서 내보냈다.

이런 헨리 8세의 즉위 500주년을 기념해 영국에서 열리는 ‘헨리의 재발견’ 시리즈는 영화 ‘천 일의 앤’이나 TV 시리즈 ‘튜더스’를 통해 헨리 8세를 봐왔던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논쟁거리를 선사할 전망이다. 마초적이고 변덕스러운 헨리 8세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역사는 평가하는 사람의 몫이므로….



주간동아 2009.05.05 684호 (p68~69)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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