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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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술평론가들을 죽였나

10인의 비평가가 답하다-일민미술관 ‘비평의 지평’展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9-03-20 15: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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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미술평론가들을 죽였나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의 작품 ‘류병학 서재 살인사건’. 살해당한 독립큐레이터 S 주변에는 여성 소설가인 애인과 그녀의 전남편, 미술계의 큰손인 기업 사모님들, 특종에 목말라 있는 기자와 대학교수 등이 있다. 범인을 찾는 건 관객의 몫이다.

    정성일이라는 영화평론가가 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좋은 게 좋다거나 ‘대박’ 흥행이 일말의 미덕이 될 수 있다는 비평을 하지 않는다. 감독의 처지에서 보면 서운한 평문이 틀림없다. 지난해 말, 나이 오십이 된 그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영화 관계자들은 말했다. 아, 얼마나 지루할까.

    비슷한 일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난다.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비평의 지평’전이 바로 그런 경우다(영어 제목이 ‘The Scene of Criticism’이다. 흔히 하는 말로 ‘비평신’인데 한글 제목보다 전시에 더 잘 어울린다).

    이 전시는 미술관의 전시기획자가 10명의 미술평론가를 선정한 뒤, ‘당신의 비평을 이루는 문화적 배경을 시각적으로 설명해주세요’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시작됐다. 선정된 10인은 강수미 류병학 고충환 반이정 장동광 최금수 서진석 임근준 유진상 심상용이다.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활동이 많은 비평가이자 기획자로 꼽히는 이들이다. 기고와 인기 사이트 운영을 통해 ‘문화비평’으로 영역을 넓힌 이들도 있다. 대개 30, 40대 나이로 1980~90년대에 미술대학을 다닌 세대다. ‘관제 미술이 곧 한국 모더니즘’인 기형적 현실을 강요받았고,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현장’인 민중미술을 주도하거나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은 탈정치적 후배들인 ‘코리안 팝’ 아티스트들과 전략적으로 연대한다.

    ‘비평’에 10인 10색 의미 부여

    10명 중 반이정을 제외한 9인은 대학에서 미술 실기를 전공했다. 이건 한국 미술계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전의 미술비평들이 이해 불가한 비문과 비약으로 채워진 경우가 적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주례비평’이란 말은 근거 없이 악랄한 비아냥거림이 아니었다. 80년대 말, 시각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 이들 세대가 창작과 비평신에 뛰어들면서 활발한 미술 ‘담론’이 생산된다. ‘비평의 지평’전에 참여한 10인의 미술비평가들은 시간차는 있으되, 이 같은 반성적 발전을 이끌었다.



    이들이 ‘작품’을 한다는 말에 그들의 각박한 평문에 상처받았던 작가들이 ‘두고 보자’고 했다 한다. 전시에 참여한 평론가 유진상 씨는 “그동안 작가들에게 잘못을 많이 저지른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참여 작가(즉 평론가)들 중 일부는 처음 안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어 내놨고(‘도저히 안 되겠다’), 전시글에서 ‘옹색한 의사 창작자일 수밖에 없는 저의 죽은 상상력에 의존하지 말아달라’(최금수)고 미리 한 수 ‘접기’도 한다.

    10명의 평론가가 만든 10개의 작품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미술의 가치와 의미와 기능과 존재성을 논리적으로 부여해주는 작업’(평론가 강수미 씨의 글)을 하고 있으니 10개의 다른 ‘정답’이 있는 것이다.

    “기획 의도는 한 미술평론가의 사상과 아이디어를 만든 책, 이미지, 사건, 작가 등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런 요구를 받고 어떤 평론가는 문화적 배경을 하나의 오브제로 만들었고, 또 다른 평론가는 자신이 과거에 쓴 글이나 기획전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나의 주제를 해석하는 전시가 아니므로 일관된 이야기는 없다. 공간 분할 외의 모든 면을 평론가에게 맡겼다.”(김태령, 일민미술관 기획실장)

    예를 들면 ‘그림보다 액자가 더 좋다’ ‘미디어시티’ 등을 기획한 류병학 씨는 전시장에 한 평론가의 살인사건이 벌어진 (가상) 현장을 재현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범인을 찾게 했다.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의 저자 고충환 씨는 순수미술의 허구성, 인문학의 위기, 물신화에 대한 우려 등을 키워드로 제시한다. 기존 평단과 부딪치며 보기 드물게 폭넓은 팬을 가진 ‘파워블로거’ 비평가인 반이정 씨는 스타작가 매튜 바니와 이명박 대통령(두 명의 MB란다)을 따라하고 야유하는 자전거 주행을 감행했다. ‘이미지 속닥속닥’ ‘네오룩닷컴’ 등 온라인 미술 아카이브를 운영하며 ‘남한의 형상미술’이라는 새 영역을 비평하는 최금수 씨는 글 없는 대자보, 소리 없는 확성기, 구호 없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민중미술이 간과한 것에 대한 아쉬움, ‘형식’이 곧 미술의 내용으로 치환되는 현대미술의 특징을 은유한다. 한국 대안공간의 맏형쯤 되는 서진석 씨는 문화적 배경으로서 ‘피터팬 신드롬’을 설정, 수많은 장난감이 모인 흰색 ‘큐브’를 만들었다. 심상용 씨는 새로운 것에 중독된 현대미술을 비판하면서 카미유 클로델, 반 고흐, 프리다 칼로 등 고독한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누가 미술평론가들을 죽였나

    평론가 최금수 씨의 작품. 미술관에서 ‘형식’은 내용이 된다(좌). 한국의 정신 상태를 ‘피터팬 신드롬’으로 정의한 미술평론가 서진석 씨의 설치작(중). ‘파워블로거’ 평론가 반이정 씨의 자전거 바퀴(우).

    그 많던 평론가들은 어디로 갔을까

    평론가는 현대미술과 함께 태어난 존재다. 그래서 작가, 화상, 비평가가 현대미술이란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이룬다고 한다. 미국의 모더니즘 미술을 만든 주역이 그린버그 같은 독재적 평론가라는 주장도 있다. 쇼비즈니스 업계와 마찬가지로 평론가는 작가를 스타로 ‘매니징’하고, 미술시장에서 평론은 가격의 기준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 미술시장이 최고의 활황을 맞은 최근 몇 년 동안 평론이 사라졌다. 펀드매니저가 미술 작품을 평가하는데, 어차피 요령부득인 평론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데미언 허스트 같은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순 제작비 200억원, 판매가 900억원이라고 써서 직접 경매에 내놓는다. 그래도 팔린다. 한국 미술계도 규모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현상을 겪는다. 그동안 평론가들이 미술을 전유물로 만들고 대중으로부터 격리했던 건 이 같은 상황을 두려워해서였을까. 이건 자살인가, 타살인가.

    이번 전시는 그래서 비평가들에게 주어진 기회다. ‘하드보일드’한 평문을 쓰는 강수미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술비평을 ‘사회적 현존의 재건’을 위해, 창작과 수용 사이, 우리에게 나 있는 쌍방통행로라 정의한다. 때로는 익숙한 도로 위로 ‘의미의 해석’ 같은 온건한 질료를 실은 승용차가 달리지만, 때로는 ‘생산적 비판’이나 ‘창조적 파괴를 위한 논쟁’ 같은 거칠고 힘센 정신을 실은 중장비가 암중모색 속에서 새 길을 낼 것이다.”

    참고로, 그들의 작품은 웬만한 현대미술 작품보다 뛰어나다. 아이디어와 언어를 시각 이미지로 ‘교차 교란’한 것이 곧 현대미술이기 때문이다. 5월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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