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5

2008.12.16

금고업계, 부자들 주머니 털다

금융불안 탓 현금 보관 선호 가정용 매출 쑥쑥 … 백화점 기획전 등 인기몰이 한창

  •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입력2008-12-10 12: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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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고업계, 부자들 주머니 털다

    10년 만에 금고가 백화점에 재등장했다. 선일금고는 디자인과 소재를 업그레이드한 프리미엄 라인 ‘루셀’로 부유층의 안방시장 공략에 나섰다.

    금고가 10년 만에 백화점 나들이에 나섰다. 현대백화점 서울 압구정점에서 11월24일부터 일주일간 판매된 금고는 프로모션 기간에 총 36개가 팔려나갔다. 와인색, 검은색 바탕에 스트라이프와 꽃무늬를 새긴 이 인테리어형 금고는 같은 사이즈의 일반형 금고보다 약 2.5배 비싼 132만원이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 촘촘히 박힌 최고급형은 디자인에 따라 각각 264만원, 297만원. 이렇게 고가(高價)임에도 관심을 보이는 고객이 많았고 실제 판매로도 이어졌다.

    지난 10월부터 외신을 통해 은행 등 금융기관의 파산을 두려워하는 미국인들이 금고 가게로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내 최대 금고 회사인 ‘센트리세이프’의 매출액은 최근 전년 대비 약 70% 성장했다. 이 회사의 짐 브러시 사장은 “금융기관도 믿지 못하고, 경기가 나빠지면 도둑이나 강도가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미국인들이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개인용 금고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코트라(KOTRA)는 스위스 최대 금고 제작사 ‘카바’의 올 3분기 개인용 금고 매출액이 1분기에 비해 약 20% 늘었다고 전했다.

    안전한(safe) 자산관리 위해 금고(safe) 구입

    약 10년 전, 외환위기에 맞는 ‘불황 상품’으로 금고 판매를 기획했던 현대백화점이 10년 만에 다시 금고를 판매하기로 결정한 이유도 이런 세계적인 트렌드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하지성 홍보실 대리는 “수요 예측 차원에서 단기간 프로모션 상품으로 선보이게 됐으며 우선은 홍보 효과에 기대를 걸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판매 결과 홍보 효과 이상의 성적표가 나왔다. 제품당 단가가 명품 패션 아이템이나 고급 가전제품 못지않아 짧은 판매 기간에도 매출액이 상당했기 때문. 상품을 기획한 김정태 바이어는 “고객 문의가 생각보다 훨씬 많아 놀랐다”며 “내년 중에 비슷한 내용의 프로모션을 다시 기획할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이 판매한 인테리어 금고는 국내 대형 금고 업체 가운데 하나인 선일금고제작의 프리미엄 라인 ‘루셀’ 제품들. 금고의 고유 색상으로 통하던 베이지색과 회색, ‘딱딱한 철덩어리’ 이미지를 바꾸고 여성과 젊은 층을 타깃으로 디자인했다.

    백화점 행사가 끝난 직후인 12월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4가의 선일금고 직영매장 ‘이글세이프’에는 인테리어 금고에 대한 문의 전화가 이어졌다.

    “내부 높이는 425mm, 폭은 330mm, 깊이는 310mm예요. 신권 1만원짜리가 2억1000만원까지 들어가고요.”(상담원)

    계약서에 쓰인 배달 주소들은 논현동 압구정동 분당 등 주로 서울 강남과 인근 지역들이었다.

    백승민 선일금고 상무는 “상당수가 내부 사이즈를 먼저 물어보는데, 이는 안에 넣을 ‘물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라며 “최근에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산가들이 현금이나 채권을 개인 금고에 보관해두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금고 회사 직원은 “최근 금고 수리를 위해 한 유명 연예인 집을 방문했는데, 금고 안에 미국 달러가 가득 차 있었다”고 전했다. 환차익을 노린 ‘환테크’용이었다.

    금고업계, 부자들 주머니 털다

    서울 을지로4가에 밀집한 금고 매장들(오른쪽). 금융기관을 믿지 못하는 자산가들이 개인용 금고를 찾는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늘고 있다.

    선일금고 측은 “올 9월 이후 매출이 평년 대비 약 15% 성장했다”며 “일반 가구류가 30%대 이상의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때임을 고려하면 매우 고무적인 성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웃에 자리한 중앙금고에서도 고객 상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충직 중앙금고제작소 대표는 “기업용과 개인용 금고의 판매비율이 올 9월 이후 7:3에서 3:7로 완전히 역전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배달을 간 고객의 집에는 큰 사이즈의 금고가 한 대 더 있어 놀랐다”고 덧붙였다.

    부산에 본사를 둔 디프로매트금고도 비슷한 상황이다. 안대환 차장은 “가정용 금고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불경기임에도 매출액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전한다.

    최첨단 금융공학과 아날로그 금고의 패러독스

    금고의 내수시장 규모는 400억~500억원으로 추산된다. 선일금고, 범일금고, 디프로매트금고가 선두그룹으로 꼽히는 가운데 약 100개의 군소업체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금고 수출액 역시 2005년 3577만 달러, 2006년 3942만 달러, 2007년 4116만 달러 등으로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표 참조). 2008년 10월 말 현재 수출액은 3859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5.8%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2006년 대비 2007년 수출액 증가율이 4.4%였음을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한 성과다.

    금고 수출 현황


    년도 수출 현황
    200330908053-2.7
    200428821823-6.7
    20053577086524.1
    20063941956510.2
    2007411689184.4
    20083859508315.8


    그러나 한 금고업체 관계자는 “모든 업체가 웃는 것은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외국 바이어들이 환율을 반영해 납품가를 더 낮추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국내 소비자들도 아직 금고를 필수품으로 여기지 않고 있어, 수출이나 내수 모두 해외 금고업체들만큼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금고에 관심을 보이는 부자들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자산관리컨설팅사인 엠앤앨파트너스 최태선 대표는 “금융기관의 유동성 문제가 도마에 오르면서 좀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자산을 보호하려는 이들이 많아졌다”며 “부자들은 일반인보다 자산 안정성에 더 민감하다”고 말했다.

    한편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은 “금융상품이 아닌 친목계를 통해 목돈을 굴리려다 문제가 생긴 다복회 사건에서 보듯, 우리나라에서는 금융기관에 대한 부자들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편이고, 이러한 심리가 금고의 인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경제위기가 최첨단 금융공학이 빚어낸 결과임을 고려할 때 아날로그의 상징격인 금고가 인기몰이를 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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