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0

2008.11.11

“정부, 달러 푼 것은 치명적 惡手”

인체에 스테로이드 투여하는 유해 처방…외환 움켜쥐고 시장 미개입이 상책

  • 배선영 수원여대 경영정보학과 교수·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실 서기관

    입력2008-11-03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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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달러 푼 것은 치명적 惡手”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10월13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63차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 연차총회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필자는 7월16일자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외환위기 재발 가능성을 언급하며 “정부는 보유외환을 풀어 환율을 낮추는 정책을 써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의 원-달러 환율은 1000~1050원이었다. 필자는 당시 상황이 춘한(春寒·봄추위)에 불과하며 머지않아 추상(秋霜·가을서리)과 엄동(嚴冬) 추위가 엄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9월 들어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작과 함께 가을서리가 한국을 덮쳤다. 그리고 엄동이 찾아왔다. 여기에서는 현행 외환위기 국면에 초점을 맞춰 대책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외환 풀수록 시장 불안감 증폭

    세계적인 유동성 위기가 시작되자 각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달러화 비축에 나섰다. 그 여파로 한국에서도 달러화 품귀현상이 일어나면서 외환위기의 초기 국면이 전개됐다. 사실 한국 경제는 참여정부 시절에 진행된 은행권의 과도한 해외차입 등으로 현 정부 출범 이전부터 외환위기에 취약한 상태였다(이 점에 대해서는 참여정부도 분명 책임이 있다).

    현 정부는 고환율을 몹시 두려워했다. 외견상 2400억 달러 수준인 현행 외환보유고가 꽤 넉넉한 수준이라고 여긴 정부는 춘한이나 추상 정도의 추위에도 엄동설한이 닥친 것처럼 보유외환을 풀었다. 이미 수백억 달러 이상 축낸 상태다.



    지금의 고환율은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구조적 요인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보유외환을 아무리 많이 풀더라도 외환보유고만 줄 뿐 환율을 궁극적으로 낮출 수는 없다. 정부가 보유외환을 풀면 풀수록 외환보유고가 줄어 오히려 시장의 불안감은 증폭되고 외환위기의 가능성은 가속적으로 높아진다.

    참고로, 정부가 은행의 해외기채(해외 장·단기 차입금)에 대해 보증을 서주는 것도 위험노출액(exposure) 기준으로 보면 은행에 보유외환을 직접 대출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외환보유고 손실 가능성이 높아져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고, 결국 ‘국가 부도위험 증대에 따른 주가 하락 및 환율 상승’의 과정으로 진행되기 쉽다.

    그런데도 정부는 “외환시장을 확실히 안정시키겠다”며 10월19일부터 보유외환을 위험노출액 기준으로 무려 1300억 달러나 풀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날 이후 주가 폭락과 환율 폭등이 며칠간 계속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정부와 대다수 경제전문가들은 10월19일 대책이 외환시장을 확실히 혼란에 빠뜨린 대책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달러화 발행의 특권을 지닌 미국, 또는 통화맞교환 방식으로 미국으로부터 달러화를 무제한 확보할 수 있는 유럽을 달러화 확보에 제약을 받는 한국이 함부로 따라해선 안 된다.

    현 상황에서 보유외환을 푸는 것은 인체에 스테로이드를 계속 투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매우 유해한 처방이다. 더 이상 시행해선 안 된다. 국회 동의를 얻었더라도 시행은 집행 기준을 엄격히 하는 방법 등으로 적절히 유보해야 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처방은 무엇인가. 정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부가 보유외환을 꽉 움켜쥐고 외환시장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팔지도, 빌려주지도, 보증을 서주지도 않으면 된다. 처변불경(處變不驚·상황이 급변해도 놀라지 않는다) 자세를 견지하면서 말이다. 그 대신 금리를 낮추거나 원화 유동성의 공급을 확대하는 일처럼 보유외환 감소와 무관한 사안에 대해선 어느 정도 관대해져도 상관없다.

    “정부, 달러 푼 것은 치명적 惡手”

    은행 직원이 환전을 위해 세고 있는 달러.

    처음 얼마간 환율은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뛰어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환율이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을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첫째, 어떤 환투기 세력도 한국이 240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끝까지 지키려 하는 한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할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달러화를 계속 매입하진 않을 것이다.

    둘째, 외국인 투자자 가운데 환차익을 도모하려는 세력은 환율이 오를 만큼 올랐다고 인식되는 시점부터 다량의 달러화를 갖고 들어와 집중적으로 매도할 것이다. 이 요인만으로도 한껏 높아진 환율은 반드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셋째, 글로벌 경기 침체로 환율 상승에 따른 수출 효과가 종전보다는 제한되겠지만, 고환율은 수입을 감소시키고 수출을 촉진한다. 이로 인해 달러 수요는 축소되고 달러 공급은 확대돼 시간이 흐를수록 환율은 하향 안정화될 것이다.

    ‘역경(易經)’에 이르길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라고 했다. 사물은 궁극에 달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뜻이다.

    환율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무책으로 일관하면 환율은 올라갈 수 있는 정점, 즉 궁극에 이를 것이다. 그 뒤엔 에너지의 흐름이 변해 내려오기 시작할 것이다(궁즉변). 이렇듯 정점을 찍고 다시 내려온 환율은 경제의 기혈이 정상적으로 순환하도록 돕는 치유의 에너지를 형성하면서 정상 수준을 되찾을 것이다(변즉통). 정상 수준에 이른 뒤에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통즉구).

    하향 안정화된 환율은 경기부양을 위한 정책수단으로 사용하기 쉽다. 정부는 환율 수준을 유지하면서 보유외환을 더 쌓을 수 있고, 수출 활성화를 통한 경기 회복을 도모함으로써 마침내 국민에게 춘풍(春風·봄바람)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고환율은 일시적 고통 따르지만 궁극적 축복

    우리 기업들이 고환율의 이점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생산성 향상에 노력한다면 고환율은 일시적 고통이 따르긴 해도 오히려 축복인 셈이다. 대저, 학문적 지식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경험과 지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이상의 대처방안이야말로 경제학 지식과 경제 공무원 시절의 외환위기 사태 극복 경험, 그리고 경전의 지혜를 융합해 얻은 올바른 처방이라고 믿는다.

    10월30일 한국이 미국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맞교환 협정을 체결해 외환보유고를 늘릴 수 있게 되자, 10월19일 대책 때와는 정반대로 주가 급등과 환율 급락이 뒤를 이었다. 외환보유고 지키기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필자의 지론이 옳다는 것이 한 번 더 증명됐다.

    필자가 제시하는 처방은 이열치열(以熱治熱)이다. 국민 혈세를 낭비하지 않아 효율적이기도 하다. 기실에 있어서는 공격적이다. 설령 글로벌 위기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더라도 외환위기가 초래될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며,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경기 회복이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특히 세계 경제의 장기 침체 국면이 종료됐을 때 한국의 경제적 위상은 몇 단계 더 올라가 있을 수 있다. 몇몇 글로벌 기업의 대주주는 한국 기업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국민이 고통을 감수해 위기를 기회로 바꾼 나라’가 될 것이다.

    필자는 민주주의를 신봉한다. 하지만 시국(時局)의 중대사는 토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만 결정돼선 안 된다. 혜안을 가진 선구자는 처음에는 늘 소수다. 고환율 정책은 당장에는 다수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토론이나 다수결로는 채택되기 어렵다. 그러나 다수의 장래를 위해선 반드시 채택돼야 한다. 정책 결정권자의 결단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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