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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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 고통스런 삶의 고백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8-05-27 16: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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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달자 시인, 고통스런 삶의 고백

    <b>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b><br>신달자 지음/ 민음사 펴냄/ 258쪽/ 9500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해 대학교수가 됐고, 단 한 번도 자존심 굽히는 일 없이 오직 능력으로 자신을 알렸고, 모든 일에 충실하고 당당했으며, 가족을 위해서라면 리어카도 끌 수 있는 성실한 남자와 딸을 세상에서 가장 잘난 여자로 만들고 싶었던 어머니를 둔 부잣집 여자가 만나 결혼을 했다면 그들은 행복했을까? 남자는 고지식하고 여자는 문학과 사랑과 평화를 꿈꾸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생지옥 같은 삶을 산다. 어디선가 들어본 공식 같은 삶이 아닌가?

    나는 시인 신달자는 그런 삶과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류 시인의 에세이집이 불티나게 팔리던 시절, 그는 유안진 김남조와 함께 여성 트로이카 에세이스트로 잘나가는 시인이었다. 당시 베스트셀러는 거의 놓친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여류 시인들의 에세이는 읽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신달자의 신작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도 처음에는 끌리지 않았다. 어쩌다 책상에 한 달 이상 올려놓고 있었지만 읽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최근 우리 소설의 흐름을 짚어내기 위해 여러 책을 뒤적이며 잠 못 이루던 새벽에 우연히 이 책을 잡고는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아, 그 고고해 보이는 시인에게도 이런 생의 이면이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오해 마시라! 고고해 보인다고 한 것은 신달자 개인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시인이 되지 못한 뒤틀린 심사를 표현한 것일 뿐이니.

    시인은 이제 중년이 됐을 세 딸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자기 인생의 비밀을 희수라는 제자에게 털어놓는다. 제자가 아니라 큰딸처럼 여기는 희수는 초등학생 딸을 두었으며, 이제 조금 생활이 펴서 마흔에 이르러서야 대학원에 진학해 소설을 쓰겠다는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원래 마흔이란 나이는 도전보다 포기가 앞서는 시기다. 그런데 희수는 마흔을 앞두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운 남루한 생을 기억하는 시인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으려는 희수에게 그래서 남다른 애정을 느낀다.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사회악이라 여길 정도로 노사문제에 앞선 시각을 가진 진보적 학자이자 대학교수였던 남편은 결혼 9년 만인 197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때 시인의 나이는 서른다섯이었다. 남편은 기적적으로 23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지만 이미 반신불수가 됐다. 시인은 3년 가뭄이 한꺼번에 해갈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붉고 처절한 울음을 쏟아내지만, 남편은 어이없게도 ‘시상하부과오종’이란 뇌의 이상으로 미친 듯 웃어댄다.



    이 같은 부조화에도 시인은 남편과 팔순의 시어머니, 세 딸아이를 뒷바라지하며 지옥 같은 현실을 헤쳐나간다. 남편은 간신히 학교에 복귀하지만 뇌졸중 후유증으로 사회생활이 쉽지 않다.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진 남편은 시인에게 매질을 하는 등 난폭해져만 간다. 몸은 살아났지만 정신적 장님이 되어 정신병원에도 세 차례나 입원한다. 손에 만원짜리 한 장 쥐어드리지 못한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는 척추 뼈가 가루가 될 정도의 부상을 당해 무려 9년을 누워 있다 세상을 떠난다.

    시인은 기구한 운명 앞에서 신을 원망했지만 결국 종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한때 보따리장수로 생활을 꾸려보기도 했지만 자존심에 상처만 입고 그만둔다. 그리고 마흔에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간다. 시인은 1992년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꽃밭에 무지개처럼 당당히 섰다는 자긍심을 갖게 된다. 1988년에 펴낸 ‘백치애인’과 후속으로 출간한 밀리언셀러 ‘물위를 걷는 여자’는 그에게 경제적인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시인의 이름으로 나온 해적판이 10여 권이나 될 만큼 인기를 누렸지만 한편으로 대중적 베스트셀러 저자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어야 했다.

    삶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던 남편은 2000년에야 세상을 뜬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5년쯤 뒤 이번에는 시인 자신이 유방암 판정을 받는다. 간호 10단을 자부하는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자 그렇게 못살게 굴던 남편 생각이 간절해졌다. 세 딸에게 유서 한 장 남겨놓고 수술대에 오를 정도로 마음 편히 상의할 사람이 없었으니 남편이 무척 그리웠던 것이다. 시인은 이제 그렇게 밉던 남편이 자신을 숨쉬게 하고 생명을 유지시켜 준 원소였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시인이 유방암으로 수술대에 오르지 않았다면 이 책은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니 결코 아픈 과거를 반추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남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생이라는 거대한 얼굴의 실체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완성된다. 무엇보다 시인은 생에 대해 넉넉한 생각을 하게 됐고, 어떤 젊음도 부럽지 않을 만큼 늙어가고 있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런 넉넉함이 이 책을 쓰게 했을 터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그와 함께 붉은 울음꽃을 쏟아내고 나면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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