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8

2008.06.03

과거 팔아서 먹고사는 일그러진 예술가의 초상

  • 현수정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08-05-27 16:0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과거 팔아서 먹고사는 일그러진 예술가의 초상

    잘나가는 영화감독 강진우는 영화 촬영을 위해 과거에 사귀었던 네 여자를 불러모은다. 자신의 삶을 ‘갉아먹으며’ 창작을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상황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하다.

    명작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복제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올해 초 공연된 뮤지컬 ‘나인’에서 주인공인 이탈리아의 중년 영화감독 귀도는 자신의 아내, 정부(情婦), 영감의 원천 그리고 첫 경험의 상대까지 모두 한 작품에 불러모으려는 시도를 한다. 연극 ‘썸걸즈’(원작 닐 라뷰트·연출 황재헌)에도 이러한 예술가의 초상이 그려진다. 자기중심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에 과거의 여인들을 집어넣으려는 영화감독 강진우(이석준 분). 극은 그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진짜 삶’을 희생시키는 모습을 자조적인 시선으로 펼쳐놓는다.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만큼 성공한 영화감독 강진우는 결혼을 앞두고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들을 만난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순진하고 참한 양선, 그야말로 ‘엔조이’ 대상이었던 민하, 연출부 막내 시절에 만난 선배 감독의 부인이며 배우였던 정희, 대학에 다닐 때 나름 진지하게 사귀었던 의대생 은후.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 중 이 네 명을 ‘엄선’한 그는 그녀들에게 10년 만에, 심지어 15년 만에 만나자고 한 이유에 대해 ‘잘못을 바로잡고 싶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그녀들에게 공통적으로 저질렀던 잘못은 ‘도망쳤다는 것’이다. 강진우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그녀들의 흉터 자국을 감쪽같이 없애기라도 한 듯 ‘우린 서로한테 잘못한 게 없는 거야. 예나 지금이나’라는 자기중심적인 결론을 내린다. 물론 여인들은 그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듣고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나아가 오래 묵혀뒀던 의혹들을 파헤치면서 눈물을 삼키거나 분노를 터뜨린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다.

    그런데 강진우가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그 ‘긁어 부스럼’이 필요했기 때문. 그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과거의 여인들을 불러들여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네 명의 여인 중 가장 똑똑하고 이성적인 은후가 지적한 것처럼 ‘결혼할 여자가 가장 섹시하고 예쁘고 착한지 확인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변명으로 죄책감을 봉합하려는 심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강진우의 진짜 의도는 다른 곳에 있다. 다름 아닌, 이 모든 상황은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극의 말미에 강진우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다른 이들의 상처와 그 자신의 자괴감이다.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의 실제 삶은 파괴돼가는 것을 느낀 진우는 약혼녀와 통화하면서 흐느낀다. ‘사랑해’라는 공허한 대사를 허공에 날리면서. 그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남자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실제 삶을 갉아먹으면서 창작을 할 수밖에 없는 ‘팔자’에 대한 서러움이다.



    극의 구성을 보면, 마치 몰래카메라로 찍어서 대강 편집해놓은 것처럼 장소 이동이 없는 상태로 네 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돼 있다. 공간적 배경은 강진우가 묵고 있는 호텔방이며, 여인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으로 각 에피소드가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매우 객관적으로 묘사해놓은 듯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강진우 외에 또 하나의 자아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바로 강진우에게 투사된 자신을 바라보는 작가의 자조적인 시선이다.

    막판 반전으로 관객과 네 명의 여인 뒤통수 맞아

    단순하고 건조한 극의 진행방식이 의도된 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은 극 말미에 있는 반전이다. 관객은 그녀들과 함께 완벽하게 뒤통수를 맞는다. 소설의 시점에 비유하자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그 관찰자가 참으로 시니컬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에피소드가 끝나면 에누리 없이 전환되는 극의 구성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강진우는 그녀들이 떠나가고 난 뒤에는 가슴 아파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모습만을 보인다.

    구성의 묘미를 살린 연출이 돋보이며, 특히 에피소드 사이의 간극을 암전으로 쉽게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진우가 브리지 음악에 맞춰 춤추는 모습은 어정쩡한 느낌을 준다. 사실 소품이 바뀔 일이 없기 때문에 구성의 묘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장면과 장면 사이를 채울 만한 행동을 찾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춤을 추고 있는 이석준이 극 속의 강진우인지, 드라마 속에서 잠시 나온 이석준인지, 그가 춤을 추는 이유는 무엇인지 명확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썸걸즈’는 영화 ‘너스 베티’의 감독으로도 잘 알려진 닐 라뷰트가 쓴 연극으로, 2005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당시 ‘프렌즈’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슈위머가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연극에는 인간 심리를 코믹하면서도 시니컬하게 다루는 닐 라뷰트 특유의 색깔이 잘 드러나 있다.

    한편 원작의 국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유머나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구사됐기 때문이다. 캐스팅은 적절해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깔끔했고, 대사 전달도 잘됐다. 붉은 톤과 푸른 톤이 조화를 이룬 깔끔하고 세련된 무대는 작품의 콘셉트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월11일부터 오픈 런,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문의 02-766-6007

    강진우는 바람둥이?

    카사노바인가 돈 주앙인가


    과거 팔아서 먹고사는 일그러진 예술가의 초상

    조니 뎁 주연 ‘돈 주앙’의 한 장면.

    ‘썸걸즈’에서 강진우의 여인들은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나도록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잠자리까지 요구한다. ‘카사노바’의 기본 요건 중 하나는 ‘마력적인 매력으로 인해 자신이 상처 준 여인들에게서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강진우는 그야말로 세기의 카사노바인 듯하다.

    많은 남자들이 호기심과 동경을 지니고 있는 ‘카사노바’는 현재 일반명사처럼 쓰이지만, 원래는 18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실존했던 인물-조반니 자코모 카사노바-의 이름이다. 유럽 전역을 돌며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던 그가 남긴 회고록에는 10대 소녀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100명이 넘는 여인들과의 애정행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카사노바와 거의 비등하게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쓰이는 이름이 있으니, 바로 ‘돈 주앙’이다. 돈 주앙은 전설 속 인물로, 14세기 스페인의 호색가로 알려져 있다. 돈 주앙 역시 파란만장한 애정행로를 자랑하는데, 그에 대한 전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은 티르소 데 몰리나의 희곡 ‘세비야의 호색가와 돌(石)의 초치객’(1630)이다. 이후 그의 이야기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바이런의 서사시 ‘돈 주안’을 비롯해 국적과 장르를 초월하며 다뤄져왔다. 국내에서는 말론 브랜도와 조니 뎁이 출연했던 제레미 레벤 감독의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질 마외가 연출한 뮤지컬 ‘돈 주앙’도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작품마다 이름이 다양하게 쓰였는데, 프랑스에서는 돈 주앙, 스페인에서는 돈 후안, 이탈리아에서는 돈 조반니라고 불리기 때문.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평생 매력을 잃지 않고 많은 여성을 거느리는 모습은 남성이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하다. 그런데 극의 말미에 주인공이 구원을 받거나 개과천선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작품 속에서 바람둥이가 평안한 결말을 맞이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만일 악마가 나타나서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세기의 바람둥이가 돼볼 것인지 거래를 제안한다면 어떨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