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8

2008.06.03

400살 퀘벡 정체성 고민 여전

올 7월 기념일 앞두고 축제 분위기 고조 프랑스권 문화 구심점 위상은 갈수록 격하

  • 밴쿠버=황용복 통신원 facebok@hotmail.com

    입력2008-05-27 13:1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400살 퀘벡 정체성 고민 여전

    퀘벡 설립 400주년을 축하하는 불꽃놀이와 기념음악회에 참가하는 퀘벡 출신의 팝스타 셀린 디옹.

    3억3000만(미국 인구 3억명, 캐나다의 영어사용 인구 2600만명)의 영어권에 에워싸여 있는 770만명의 프랑스어 세상 퀘벡이 올해 7월로 창설 400주년을 맞는다. 1608년 7월3일 프랑스인 사무엘 드 샹플랭이 28명의 고향 사람들을 인솔해 현재의 퀘벡주 퀘벡시 자리에 프랑스의 첫 북미 정착촌을 연 것이 퀘벡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퀘벡시는 북미 프랑스 영토의 중심지였고 인구 70만에 이르는 지금도 퀘벡주의 수도로 캐나다 프랑스권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곧 400주년을 맞는 퀘벡시는 벌써부터 온통 잔치 분위기다. 이미 정초에 겨울축제 등 400주년 맞이 행사가 시작됐고, 올 가을까지 문화, 스포츠, 시민 페스티벌, 국제대회 등 갖가지 기념행사 일정이 잡혀 있다. 올 여름에는 퀘벡이 낳은 세계적 팝스 타 셀린 디옹 등이 참가하는 열린음악회도 펼쳐진다.

    이런 들뜬 분위기의 밑바탕에는 프랑스 영토에서 출발해 영국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현재는 캐나다 일부가 된 프랑스계 토박이 주민들이 200여 년 동안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쏟은, 현재진행형인 고뇌가 깔려 있다. 콜럼버스가 다녀온 땅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임이 밝혀지자 프랑스와 영국은 실망한 나머지 이 새 땅에 신경을 끄고 지냈다. 그러나 스페인은 같은 땅을 두고도 발상의 대전환을 했다. ‘인도가 아니면 어때, 새 땅을 통해 돈벌이를 하면 인도와 교역하는 것보다 못할 게 없지’라고 말이다.

    북미 프랑스 영토의 중심지 인구 70만

    스페인은 중남미 일대의 원주민 제국을 정복하고 그들의 물산과 금은보화를 국내로 빼돌렸다. 스페인이 갈수록 부강해지는 것을 지켜본 영국과 프랑스는 뒤늦게 자신들도 신대륙에서 무언가 해야 한다고 깨닫고 정착촌 개설을 시도했다. 1607년 영국이 지금의 미국 버지니아주에 제임스타운을 설립했다. 이듬해 프랑스가 신대륙에 차린 첫 영구적 발판이 퀘벡이다. ‘퀘벡’은 현지 원주민 말로 ‘강폭이 좁아지는 곳’이란 뜻이다.



    퀘벡으로 온 프랑스계 주민들은 원주민과의 모피교역을 통해 북미 대륙 깊숙이 연고지를 넓혀갔다. 그러나 당시 북미의 영국계 이주자들과 퀘벡의 프랑스계 이주자들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영국계는 대대손손 북미에 뿌리내리고 살 요량으로 솔가해 건너왔고, 농업을 경제활동의 기본으로 삼았다. 반면 프랑스계는 거의 모두가 새 땅에서 한밑천 잡은 뒤 귀국하겠다는 꿈을 지닌 채 단신으로 건너온 남자들이었다.

    이들은 거점만 퀘벡으로 삼았을 뿐 삼삼오오 카누에 교역물자를 싣고 원주민을 찾아나섰다. 일부는 미시시피강을 타고 남하해 멕시코만까지 이르기도 했다. 퀘벡에 주재하는 프랑스 총독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북미 내륙의 모피교역 상권을 모두 프랑스 영토로 선언해 ‘뉴 프랑스’(프랑스어로 Nouvelle France)라고 불렀다. 일리노이, 아칸소,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등 미국 중서부와 남부에 프랑스어식 지명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는 북미의 프랑스인들이 정착하지 않고 떠돌이 비즈니스를 벌이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본국의 처녀들을 현지에 보내는 캠페인까지 벌였다. 이렇게 해서 퀘벡은 비로소 정착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퀘벡을 제외한 북미의 프랑스 영토는 영유권을 주장할 개연성이 부족했고, 당연히 동해안 쪽의 영국계 정착민들은 프랑스의 내륙 진출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이 갈등이 끝내 프랑스와 영국 간의 7년 전쟁(1756~1763년)을 불렀다.

    전쟁에서 진 프랑스는 북미 영토를 송두리째 포기했다. 이로 인해 퀘벡은 영국 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패전 직후 총독 등 프랑스 관리들만 본국으로 돌아갔을 뿐, 이미 이 땅에 정착한 8만여 명의 보통사람들은 ‘내 고향 퀘벡’에 그대로 남았다. 영국은 퀘벡을 접수한 후 한때 이들을 영국화하려 했으나 이내 그 같은 노력을 포기했다. 국적이 바뀐 퀘벡인들이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꾸리는 것을 용인한 것이다.

    분리주의자들 기회 있을 때마다 ‘독립’ 외쳐

    400살 퀘벡 정체성 고민 여전

    퀘벡시 세인트로렌스 강변에 자리잡은 북미의 유일한 성곽도시 올드퀘벡의 야경.

    이러한 정책 변화는 퀘벡인들이 영국에 동화되기를 완강히 거부한 탓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남쪽 영국계 주민들 사이에서 반란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처지에서는 ‘반도’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로 영국 왕의 신하가 된 퀘벡인들을 다독거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 이 조치 덕에 퀘벡 사회의 구심점인 가톨릭 교회와 대다수 주민이 남쪽의 혁명세력에 동조하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북미의 북쪽 땅은 미국의 독립에 상관없이 영국령으로 남아 뒷날(1867년) 결성된 캐나다 연방의 중요한 기둥이 됐다.

    캐나다 연방 결성 뒤로 캐나다의 정치와 문화는 영어권 위주로 다져졌다. 애초 프랑스어권 캐나다가 영어권 캐나다와 대등하게 나라를 끌어갈 것으로 믿었던 퀘벡인들은 퀘벡의 위상이 점점 캐나다 내 여러 주 중 하나로 격하돼가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다. 실제 캐나다 건국 당시에는 프랑스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국민의 비율이 절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비율은 그 뒤로 계속 낮아져 지금은 22%에 그친다. 퀘벡주 내에도 영어 또는 제3의 언어를 주로 쓰는 주민이 20%에 이른다.

    퀘벡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위기감은 때로 과격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1968년 분리독립을 제1의 정강으로 내걸고 출범한, 그리고 여러 차례 퀘벡주 정부 구성에 성공한 퀘벡당(Parti Quebecois)은 주민투표를 통해 의사를 수렴한 뒤 독립을 선언한다는 목표다. 이에 따라 독립에 관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1980년과 1995년 실시됐으나 모두 부결됐다. 95년 투표 때는 독립 찬성49.4%, 반대 50.6%라는 간발의 차이였다.

    캐나다는 다민족, 다문화의 연방제 국가일 뿐 아니라 국가의 역사도 짧다. 반면 국토는 엄청나게 넓다. 이 때문에 캐나다인들이 국가에 대해 느끼는 귀속감은 상대적으로 적다. 대신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주로 주)에 대한 귀속감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퀘벡의 분리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나라 자체가 여러 토막으로 갈라질 가능성, 나아가 캐나다의 실체가 소멸할 우려까지 몰고 온다.

    분리독립을 목표로 삼지 않는 자유당이 2003년 이래 지금까지 퀘벡의 주 정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독립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리주의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이 죽지 않았음을 내비친다. 당장 올 2월 발칸반도의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캐나다가 이를 인정하는 과정에서도 ‘그럼 퀘벡은 뭐냐’는 문제가 제기됐다. 스티븐 하퍼 연방총리는 퀘벡은 코소보와 다르다는 원론적 설명을 또 한 번 내놓아야 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