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8

2008.06.03

현명관, 삼성으로 복귀한 까닭은

5월26일부터 태평로 사무실로 출근 이건희 회장 공백 메우는 역할 향후 행보 주목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입력2008-05-27 12: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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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명관,  삼성으로 복귀한 까닭은

    현명관 삼성물산 고문과 그가 일하게 될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위).

    그의 도전은 끝났을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도전’이라는 자서전을 낸 적이 있는 현명관(67) 삼성물산 고문에 대해 제주도민들은 이런 의문을 품는다. 제주지사가 되려는 꿈을 접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현 고문은 다양한 인생 역정을 걸어온 인물. 그는 “살아오면서 크게 네 번 도전했다”고 밝힌 바 있다.

    5월14일 삼성물산 고문으로 위촉된 그는 제주에서 상경, 삼성 복귀를 준비했다. 먼저 매일 아침 신라호텔 피트니스센터에서 몸을 단련하며 복귀 이후의 활동상을 구상했다. 신라호텔은 자신이 대표이사로 일한 곳이기도 해서 언제 찾아도 정겨운 공간이다. 피트니스센터의 골수 회원들은 오랜만에 만난 현 고문을 환대하며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위로했다.

    현 고문은 200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삼성을 떠났다가 2005년 전경련 부회장에서 물러나 잠시 삼성물산 회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다 제주지사 자리에 도전하기 위해 거주지를 고향인 제주로 옮겼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온 것이다.

    삼성 전략적 방향과 프로젝트 조언

    그는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했기에 삼성물산에 대해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최근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재 삼성물산 핵심 임원들과 집중 대화가 필요해, 일단 상견례 수준의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 고문은 5월26일부터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사무실로 출근한다. ‘상임고문’이어서 늘 사무실에 나온다. 이름만 걸어놓은 명예직 고문이 아니다. 삼성본관 건물은 현 고문이 ‘화려한 삼성 시절’을 보낸 곳. 1993년부터 3년간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맡을 때 몸담았던 낯익은 일터다.



    삼성물산 사옥은 서울 서초동으로 옮겼기에 현 고문은 서울 시내 태평로에서 독립 근무를 하는 셈이다. 사무실이 본사와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그의 역할이 유추된다. 실무 현안에는 관여하지 않고 전략적 방향이나 큰 프로젝트에 대해 조언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현 고문께서는 경영의 큰 틀을 잡는 조언자 임무를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 고문의 ‘행동반경’이 삼성물산 권역보다 훨씬 넓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물러나는 데 따른 리더십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이란 분석이다. 삼성그룹 내부와 전경련 사정에 밝은 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에게 그룹 안팎의 동향을 알리고 이 회장의 심중을 읽어 그룹에 전달하는 가교 활동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 계열사 사장을 지낸 모 인사도 “현 회장을 다시 영입한 것은 단순한 일자리 제공 차원이 아닐 것”이라며 “이수빈 삼성그룹 회장 내정자와 함께 현 고문이 그룹의 원로 리더로 활동하도록 하려는 전략”이라 추정했다.

    이건희 회장은 4월22일 삼성그룹 쇄신안을 발표한 이후 서울 이태원 자택에 머물며 향후 활동에 대해 구상하고 있다. 4월28일 삼성전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6월 말에는 삼성그룹 회장 자리도 떠난다. 그 후에는 대주주 지위로만 머문다고 밝힌 바 있다. 7월부터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서의 활동에 주력한다고 한다. 8월8일 베이징올림픽이 개막되는 만큼 IOC 위원으로서도 바삐 움직여야 할 전망이다. 이 회장은 이런 구상을 하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최근에는 워커힐호텔의 빌라에 며칠 투숙하며 휴식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이 회장은 현 고문이나 이수빈 회장을 불러 ‘긴 호흡의 대화’를 나눌 것으로 보인다. 대표이사직을 맡은 현직 최고경영자는 산적한 현업 처리 때문에 시간에 쫓기는 데다 단기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반면, 원로 경영인은 큰 안목으로 회사의 미래를 보는 여유가 있다. 현 고문은 삼성을 5년간 떠나 있었기에 바깥에서 삼성을 바라본 소회를 이 회장에게 전달할 적임자로 꼽힌다. 현 고문은 자서전에서 이 회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해놓았다.

    이건희 회장을 옆에서 보필하면서 느낀 것은 그의 집중력이 남다르다는 것이다. 한 문제에 골몰하기 시작하면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본질에 닿을 때까지 파고든다. “왜?”라는 질문을 다섯 번 정도는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물은 찬데, “왜 차냐?”고 한 번 질문한다. 물이 찬 것은 얼음 때문이라는 답이 나오면 “그럼 얼음은 왜 차냐?”라고 재차 묻는다. 얼음은 섭씨 0도 이하에서 얼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오면 “그럼 왜 섭씨 0도 이하에서 얼음이 되냐?”는 질문을 한다.

    현 고문은 제주지사가 되려는 야심을 버렸을까. 그는 4월10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4·9 총선에서 아쉽게도 한나라당은 도민 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며 “한나라당 제주도당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자연인으로 백의종군해서 고향 제주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기자회견은 그가 이건희 회장 소유의 삼성생명 주식 28만800주를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자리였다. 기자회견 직후 현 고문이 삼성에 직격탄을 날린 것으로 오해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자신이 40년 가까이 몸담은 회사라 하더라도 개인의 명예보다 중시할 수 없어 ‘폭로’한 것으로 보았다.

    삼성 차명주식 처리건 현 고문이 ‘총대’

    그러나 이런 발표는 현 고문이 ‘돈키호테’식으로 불쑥 감행한 것이 아니고 삼성과 사전에 조율해 이뤄졌다. 삼성그룹 쇄신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차명주식 처리건이 중점 논의됐고 현 고문이 ‘총대’를 멘 것으로 알려졌다.

    현 고문이 밝힌 ‘새로운 삶’은 우선 삼성물산 고문으로 가시화됐다. 중학교(제주 제일중)를 졸업할 때까지 제주 바닷가에서 자란 그는 제주지사가 되려는 희망에 부풀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다음 감사원 공무원, 일본 유학, 삼성 사장 등의 화려한 경력을 다져온 그도 지역기반이 취약해 지사 선거에서 거푸 고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첫 번째 도전으로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서울 유학을 떠난 일을, 두 번째로는 감사원 공무원 사표를 내고 넓은 세상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유학 간 일을 꼽았다. 세 번째는 일본에서 돌아와 감사원에 복직했다가 삼성에 입사한 것. 네 번째는 제주지사 출마였다.

    제주 제일중학교 졸업생으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김모(41) 씨는 “낙후한 제주도를 살리려는 열망에서 한때 중학교 동창회가 앞장서 현 선배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려 노력했으나 이제는 시들하다”면서 “삼성그룹이 정상궤도에 접어들게 하는 것도 국가경제 전체로 봐서 중요하므로 그분이 삼성에서 성과를 내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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